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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53)화 (53/156)
  • 52화. 친구(1)

    샐라임의 말이 맞았다.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인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태도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목숨을 건 게임을 걸어온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나타나라. 오히려 누구인지 빨리 아는 편이 나으니 어서 모습을 드러내 주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어디 보자…….”

    그건 그렇고, 아직 퀘스트가 하나 남아 있었다.

    “열람.”

    +

    # 제7 호감도 퀘스트

    제목: ‘보고 또 보고.’

    내용: 네 번째 남자 주인공 ‘레크리드 니엘’의 ‘매그넘 마법 상점’에 가서 물건 한 개를 판매하고 오시오.

    제한 시간: 일주일

    보상: 없음

    페널티: 5일 기숙사 감금

    +

    이번엔 레크리드와 관련된 첫 번째 퀘스트가 나왔다.

    이 정도면 나름 양호한 편이다.

    그동안 해 왔던 음식을 먹여 주라거나, 포옹을 얻어 내라는 것과 비교하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편한 퀘스트였다.

    다만 저 페널티가 어이없다는 게 문제지. 대놓고 날 가지고 놀고 있다는 뜻이잖아.

    이 게임은 퀘스트를 이용해 내 행동을 유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괘씸하긴 하지만…… 5일 동안 감금 당할 순 없지. 뭐, 한 번쯤은 마법 상점에 가야 할 일도 있고.

    빠르게 퀘스트를 해결하는 게 좋겠군.

    “나도 오랜만에 시장 구경 좀 하자. 맨날 보는 게 아카데미나 몬스터 모가지뿐이니 살맛이 안 난다고.”

    샐라임이 옆에서 칭얼댔다.

    “내일 수업 끝나고 바로 나가죠. 이번엔 뭐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법 상점에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샐라임이 봉인된 칼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방법이 있다든가, 관련된 사람을 안다면 참 좋을 텐데……. 매번 갑갑한 검집에 갇혀 목소리만 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전쟁터를 통째로 불태운 사람이 이렇게 갇혀 살다니. 밖으로 나와 마구 능력을 뽐내야 할 텐데.

    “꼭 꺼내 줄게요! 샐라임.”

    그러자 샐라임이 새침한 말투로 대답했다.

    “됐으니까 죽지나 마셔.”

    * * *

    다음 날, 오랜만에 정령술과 수업으로 향했다.

    임무 활동이 아닌 이론 수업이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루나!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C등급 임무에서 활약을 했다던데.”

    아미카 선배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반겨 주었다.

    벌써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마 첸테 선배가 말한 거겠지.

    “무슨 소리예요, 선배. 저 죽다 살아났어요.”

    곧이어 잰퓨어도 자리에 착석했다.

    당연한 듯이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루나.”

    “응.”

    “이렇게 수업 때 보니까 또 색다르네,”

    “…….”

    “원래 그렇게 막 다채롭고 그래?”

    “…하.”

    “왜 한숨을 쉬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임무를 갔다 와서 완전히 체력을 회복한 잰퓨어는 능글거리는 성격이 두 배는 더해진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자꾸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탓에 나는 정신이 다 혼란스러웠다.

    “봐 봐, 쟤네 사귀는 거 맞다니까.”

    “첸테, 너 저 둘 사이에 껴서 괜찮은 거 맞아?”

    “난 신경 안 써.”

    뒤에선 선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려왔다. 결국 이런 오해를 받고 마는 것인가.

    맘 같아서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난리 치는 것 같아 애써 무시했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잰퓨어는 그저 나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후……. 살기 참 힘들다.”

    “어깨라도 주물러 줄까?”

    “!”

    나는 순식간에 당황해서 얼굴이 굳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 어깨를 주물러 준다니!

    템트의 꿈속에서 내 등과 어깨를 안마해 주던 잰퓨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굳은 얼굴이 금세 빨개지자 잰퓨어가 흥미로운 눈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뭐야, 루나.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해!”

    “그럼 왜 이렇게 새빨개지셨지, 응?”

    나는 애써 앞을 바라보며 무시했고, 잰퓨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살폈다.

    그때, 펠리엇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쳤고, 펠리엇은 책을 가리키며 수업을 진행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수업을 다 듣고 나자, 펠리엇이 공지 사항을 설명했다.

    “자매 교류회 친선 경기로 비무 대회가 곧 다가온다. 검법, 마법, 암술, 정령술, 모든 과가 섞여서 진행될 거야. 다들 말 안 해도 준비 잘하고 있지?”

    드디어 나왔다.

    비무 대회.

    게임에서도 비무 대회는 큰 의미를 가졌다. 세계관이 크게 확장되는 계기일뿐더러 마지막 다섯 번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다섯 명이 모두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치열한 호감도 싸움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모든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아서일까, 네 명이 나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남자 주인공이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거다.

    삼각관계를 넘어서는 다각 관계. 그리고 남자들의 살벌한 기 싸움까지…….

    진정한 ‘가이즈 인 러브’가 시작된다는 거다.

    흔한 역하렘물 게임이 그렇듯, 여주인공은 남주인공들 사이에서 꽃향기나 맡으며 즐기면 되는 건데…….

    나는 그걸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운명인 것도 모자라 내 몸을 지킬 만한 실력을 키워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환생한 인생, 좀 여유롭게 즐겨 보나 싶었더니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비무 대회, 마지막 남주인공, 다섯 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까지.

    미래가 상상이 되니 벌써부터 골치가 다 아파 왔다.

    나는 내 운명을 탓하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 * *

    수업이 끝나고 학교 밖으로 나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가방 안에 판매할 물건들을 넣었고, 적정량의 돈도 챙겼다.

    “오늘은 제발 아무 일도 없길.”

    내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메고 아카데미를 나가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어떤 여자가 나무 앞에서 폴짝폴짝 뛰는 것이 보였다.

    “……?”

    무시하고 지나가자. 엮이면 골치 아프다. 그런데, 그 여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런.

    여자는 굉장히 난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지금 도와 달라는 거지……?

    잠시 고민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시장에 갔다 와야 하는데.

    하지만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 빠르게 도와주자.

    나는 발걸음을 돌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묻자 여자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안경에 양 갈래로 묶은 머리. 순하고 착한 얼굴에 볼에 난 주근깨가 인상적인 그녀는…….

    “이블린?”

    1학년 F반이었을 당시, 나에게 적성 테스트에 대해 알려 주었던 반장이었다.

    “루나? 루나 맞지?”

    이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우와, 완전 오랜만이야. 이렇게 보는구나! 잘 지냈어?”

    이블린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꼴통들만 가득한 F반에 들어온 게 안쓰러울 정도로 착하고 순진한 친구였다. 전학을 와 적성 테스트에 대해 알지 못할 때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 게 어제 같은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그럼! 잘 지냈지! 이블린. 이렇게 보니 반갑다.”

    나도 환한 미소로 회답해 주었다.

    세 명의 남주인공을 제외하면 이 학교에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나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울 수밖에!

    “나도 반가워. 루나 너는 무슨 과로 들어갔어?”

    “정령술과. 너는?”

    “나는 마법과야. 정령술과라니, 멋있다.”

    그녀는 적성 테스트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마법D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나도 정령술과에 들어갔다고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몰라. 다들 비웃더라니까.”

    물론 히아신스 혼자였지만.

    나는 괜히 친구를 만난 것처럼 들떠 그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난처해 보이던데.”

    그러자 이블린은 울상을 지으며 나무 위쪽을 가리켰다.

    “내 마법 지팡이가 저기에 걸려 버렸어.”

    “대체 어쩌다가?!”

    꽤 거리가 있는 높이였다.

    대체 뭘 하다가 저기에 지팡이가 걸린 거지?

    “내 지팡이가 말을 잘 안 듣거든.”

    나무 위에서 혼자서 꾸물꾸물 대며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는 지팡이는 딱 봐도 다루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샐러맨더.”

    내가 샐러맨더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금세 나타난 도마뱀에게 지시했다.

    “저것 좀 꺼내 와 줘.”

    아무래도 내 정령은 나를 아주 좋아하는 듯했다. 이런 자잘한 부탁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는 걸 보니 말이다.

    샐러맨더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나무 위로 휙 올라가더니 지팡이를 품에 안고 내려왔다.

    “신기해. 애완동물 같잖아? 대체 어떻게 꺼낼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후후. 이 정도야 별거 아니지.”

    내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이블린도 따라 웃었다.

    “그럼.”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끝냈다 싶어서 그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퀘스트를 빠르게 해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때, 이블린이 내 손을 다시 한번 붙잡았다.

    “루나!”

    “응?”

    “혹시… 괜찮으면 내일 나랑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

    그녀는 약간은 수줍은 듯한 말투로 제안했다. 마치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설레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고민한 이유는 매번 남주인공들만 만나다 보니 거절이 몸에 배어 있던 탓이었다.

    “물론이지.”

    나도 이블린이라면 환영이었다. 성격은 완전 극과 극으로 다르지만 이야기는 곧잘 통하는 것 같았다. 나도 약간은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대했다.

    “그럼 내일 열두 시에 본관 옥상에서 보자!”

    “좋아.”

    그녀와 나는 그렇게 약속을 한 채 헤어졌다. 동성 친구가 생긴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내일 점심은 뭘 먹지. 맛있는 걸 사서 같이 나눠 먹어야겠다.

    요새 사과 샌드위치가 맛있던데. 이블린도 좋아하겠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샐라임에게 말을 걸었다.

    “샐라임. 저도 친구가 생기려나 봐요.”

    * * *

    매그넘 마법 상점은 험버트 시장가와 멀리 떨어진, 테일하트 마을에 있었다.

    “저기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오묘한 조명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간간이 붙잡았다.

    입구에 들어가려 하자 ‘화제의 아이템’이라는 글자와 함께 여러 물약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건을 팔러 왔어요.”

    내가 가판대 앞으로 들어가며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지루한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소년은 내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랐다.

    “저번의 그 손님이시죠?! 오랜만이군요!”

    그가 검은색 눈동자를 예쁘게 빛내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내가 반가운 건지, 무료함을 달래 줄 손님이 와서인 건지 그는 신나 보였다.

    그때, 레크리드가 물었다.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

    아, 팔의 상처를 말하는 건가 보다.

    그건 진작에 나은 지 오래였다.

    나는 비실비실하게 생긴 겉모습에 비해 회복력이 아주 빠른 편이었다.

    “그럼요. 흉터는 조금 남았지만요.”

    “다행이네요. 다음부턴 꼭 조심하세요.”

    그가 여전히 동네 의사 선생님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가판대 앞에 앉아 물건을 펼쳤다.

    “두 가지 물건을 가져왔어요.”

    내가 가져온 물건 중 하나는 ‘깨진 우정의 펜던트’였다.

    지니고 있을 시 애정도가 10% 증가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펜던트 말이다.

    나는 손수건으로 꽁꽁 감싼 펜던트를 내밀었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효력이 발휘되어 손수건으로 꼭꼭 숨겨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물건은…….

    “템트의 비늘.”

    미노타 섬에 갔을 때 템트를 처치하고 그녀의 비늘을 일부 잘라 온 것이었다.

    새까맣게 변한 템트의 시체에서 유일하게 반짝반짝 빛이 나던 것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귀해 보여 잘라 온 것이었는데 팔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디 보자……. 잠시만요.”

    가방에서 비늘 조각을 찾으며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건 펜던트라고 하셨죠?”

    레크리드가 손수건에 싸인 펜던트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사라락.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수건을 펼쳤다.

    “……?”

    내가 당황스러운 눈길로 레크리드를 쳐다보았고,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 지금 뭐 하는…….”

    놀란 내가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지니고 있을 시 같이 있는 상대의 애정도가 10% 증가한다.

    순식간이었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리고 레크리드의 얼굴이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보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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