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살인 표적
그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율리우스 제국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말한 그는 객관적으로 보면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맨 처음 내가 거미 감옥에 빠졌을 당시 먼저 말을 걸어 준 것으로 보아 붙임성도 좋아 보였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결혼이라니!
“음……. 죄송해요. 제가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요.”
내가 당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세계에서 결혼이 아무리 빠르다고는 하지만 난 아직 열여섯 살이라고.
그때, 옆에 있던 잰퓨어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에 불을 켠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페니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저기, 말조심 좀 하죠? 제가 루나랑 사귈 사이인데,”
“뭐라는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죄송합니다.”
내가 잰퓨어의 말을 끊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페니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충격적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여성은 처음 봅니다……. 혹시 나이가 문제 되는 거라면 나중에라도 꼭 저를 찾아 주십시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은 체일빈 마을에 산다며 내 손을 붙잡고는 신신당부를 했다. 또한 내가 사는 마을을 물어보더니 나중에 꼭 한번 들를 거라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뵙죠.”
우리는 벨리아와 페니,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미노타 섬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어두컴컴한 방, 이곳은 험버트 시장가에 있는 한 상점의 지하실이었다.
히아신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방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각은 오후 두 시. 십 분 정도 일찍 왔으니 상대를 기다려야 했다.
“후…….”
수업도 제치고 여기로 걸음했다.
그녀는 사실 아카데미니, 수업이니 모두 관심이 없었다.
비젠티아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세이먼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있고 싶어서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검법과에 들어갔다. 물론 처참한 실력 때문에 F반을 면할 순 없었지만 매일매일 세이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런데, 요새 세이먼이 정신을 못 차렸다.
루이아나라는 그 분홍색 눈을 가진 계집애 앞에만 서면 이성을 잃는 것 같았고,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결혼 상대라는 것을 망각하고 멋대로 행동했다.
물론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남자란 동물은 가만히 놔두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잠시 한눈을 판 것일 테다.
하지만 그렇게 남겨진 여자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남자를 탐내는 새로운 여자를 없애 버리는 것.
임자가 있는 남자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 것이었다.
감히 족보도 없는 상인 집안 딸 주제에. 분명히 더러운 생선이나 파는 장사꾼일 거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추잡하고 격 떨어지게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어디서 백작 가문에게 덤비려 들어? 제대로 교육해 줄 필요가 있었다.
학교를 못 다니게 하든,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하든, 어느 정도 겁을 줘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괘씸한 것.”
그녀는 눈을 매섭게 떴다.
덜컥.
그때,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미리 와 있었군요.”
모자를 써서 눈이 가려진 남자는 여유롭게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럼요. 중요한 말씀이라고 하셨잖아요.”
“하하.”
남자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무슨 일이죠?”
“지금까지 일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여기 돈을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책상 위로 돈주머니를 건넸다.
히아신스는 아주 풍족한 가문의 딸이었지만 요새 들어 세이먼의 눈에 들기 위해 치장을 심하게 하는 까닭에 개인적인 돈이 더 필요했다.
그녀는 옷깃 속에 돈주머니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정보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았기 때문이죠.”
그녀는 아쉬웠다. 정보를 몰래 갖다 팔면서 돈을 얻는 일이 쏠쏠하기도 했고, 루이아나를 엿 먹이는 짓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전이었다.
아카데미에서 하교하던 히아신스에게 누군가가 접근했다. 그는 자신이 밀리센트 가문의 수행원이라고 밝혔다.
“세이먼 님과의 혼담이 이어지고 계시죠?”
히아신스와 세이먼과의 관계를 이미 다 알고 있던 수행원은, 루이아나가 그녀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느냐며 어떤 거래를 제안했다.
“간단합니다. 루이아나의 정보만 가져다주신다면 대가는 섭섭지 않게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웬 밀리센트 가문인가, 했다.
“그 계집애가 저희 가문에 먹칠을 좀 해서요.”
전학 온 첫날부터 심상치 않은 건 짐작했다만, 공작가에게 원한을 산 여자애일 줄이야.
히아신스는 밀리센트 가문의 치솟을 듯이 높은 세를 알기에 적잖게 놀랐지만 이내 흥미롭게 눈을 번뜩였다.
안 그래도 루이아나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밀리센트 가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일엔 깊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저 이득만 얻어가면 될 뿐.
공작가의 인장을 보여 주는 것이 신원 또한 확실한 것 같았고, 뒤가 구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가가 그녀를 강하게 유혹했다.
돈뿐만이 아니었다.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나, 학교엔 적응을 잘하고 있는지 정도의 작은 정보를 알려 주는 대가로 평소엔 만져 보지도 못했던 보석들을 아낌없이 받았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더 이상 정보가 필요 없다니. 이유가 뭐지?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거래는 끝인 건가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히아신스 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보도 필요 없는 새로운 길이 무엇일까?
그러자 남자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낮은 목소리가 작은 방을 울렸다.
“그 계집년을 없애는 일입니다.”
“……?”
히아신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학교 밖에서 처치하는 것은 손이 너무 많이 간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 해결하기로 한 것이죠.”
“그걸 저보고 하라는 말인가요?”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요한 정보와 물건은 모두 드리겠습니다. 다시는 숨도 쉬지 못하게 이 세상에서 끝장내는 겁니다.”
“……!”
히아신스는 적잖게 놀랐다.
계집년을 없애는 일이라고 해서 단지 학교에서 퇴출시키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예 죽이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거다.
“물론 대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저희에게는 무려 특급 물품이 있기 때문이죠.”
히아신스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죠?”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물약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러브문’이라 불리는 사랑의 묘약입니다. 이걸 나눠 먹은 사람끼리는 무조건 사랑에 빠진다고 알려져 있죠.”
“어떻게 그런 걸……?”
“히아신스 님을 위해 특별히 공수한 물건입니다. 백 년에 한 번 나온다는 밀랍꽃에서 채취한 꿀이 들어갔기에 지금으로선 전 세계에서 하나뿐일 겁니다.”
“하지만 직접 그 아이를 죽이라는 건…….”
히아신스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를 없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본인도 인정했다. 아예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루이아나에게 겁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 직접 손에 피를 묻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
“물론 히아신스 님께 전혀 해는 가지 않을 겁니다. 일단 어떻게든 죽이면 학교 내에서 아주 조용하게 처리될 것이기 때문이죠.”
히아신스는 고민했다.
그녀를 죽여 버릴 것인가?
아카데미 학생 하나가 죽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귀족 가문의 자제이기 때문이다.
그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 가문 전체가 휘청거릴 수도 있고, 아예 무너질 수도 있었다. 특히 명성 높은 가문이거나, 대를 이을 자제가 몇 없는 경우에는 최악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다 귀족일 때의 이야기다. 루이아나 그 계집애는 분명 상인 집안의 딸이랬지. 따라서, 그녀가 죽는다면, 학교에서 누군가는 슬퍼하긴 하겠지만 이 사회에 큰 무리가 가진 않을 것이었다. 고작 해 봐야 그녀의 부모 정도가 슬퍼하고, 이 아카데미에 입학시킨 것을 후회할 터.
루이아나 한 명이 죽어 봤자 세상은 그리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
평민이라는 것이 딱 그런 존재다. 작고 하찮으며 보잘것없는 존재.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빠인 나이츠 백작도 방해가 되는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을 시켜 처치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적지 않게 보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건 그저 세상의 장난질일 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안 그래도 옛날부터 눈에서 치우고 싶은 상대였다. 그녀가 존재하는 한 세이먼의 눈길을 끌어올 수 없을 거다. 게다가 저 ‘러브문’만 있다면……!
십 년 동안 자신에게 마음 한 번 주지 않았던 세이먼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미래는 아름답고 밝았다.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나와 세이먼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목표인 상황에서 루이아나만 없어져 주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하하하!”
그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앞날이었다.
“할게요.”
그녀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좋은 선택이십니다, 히아신스 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그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필요한 물품은 모두 준비해 주신다고 했죠?”
“물론이죠.”
그녀는 수없이 되뇌었다.
이건 나에게 내려온 운명이다. 운명을 거스를 순 없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 * *
임무를 끝내고 아카데미로 돌아오자마자 퀘스트가 쏟아져 내렸다.
교문을 넘는 순간 무슨 장치라도 발동된 것인지 시끄럽게 알림창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우, 시끄러워.”
그러자 잰퓨어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루나, 지금 내 목소리가 시끄럽다고 한 거야……? 다들 감미롭다고 해 줬던 목소린데…….”
옆에서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거는 잰퓨어는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내내 딱 붙어 있었다.
“아까 그 남자한테 마음이라도 준 건 아니지?”
“아무래도 한마디 따끔하게 해 줬어야 했는데. 그래도 루나, 내가 더 낫지?”
“불안해서 안 되겠어. 이제 루나 너 내 옆에만 있어.”
이렇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내 옆에 붙어서 칭얼대더라도 몬스터가 나타나면 진지한 얼굴로 공격을 가한다는 거였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잰퓨어를 볼 때마다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템트의 환술에 걸려 겪은 꿈속에서의 장면.
잰퓨어가 웃통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고, 팔을 벌리자 내가 와락 안기는 모습.
내 머리카락과 피부를 만져 주던 모습까지……. 아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마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듯 딱 맞고 포근했던 그의 품.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이던 목소리까지…….
미쳤어, 루나!
나는 내 머리를 꽁꽁 때렸다.
비단 잰퓨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세이먼은 내 입에 키스를 했고, 에르셈프는 내가 목욕하는 곳에 들어왔으며, 심지어 레크리드는 직접 씻겨 주기…까지 했다!
이들을 실제로 볼 때 나는 제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잰퓨어는 키가 큰지라 내 머리가 그의 턱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나를 안을 때면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 안으로 폭 집어넣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팍이 느껴졌다.
가, 가슴팍…….
“…….”
나는 또다시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잰퓨어와 첸테 선배에게 말했다.
“이만 가 볼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잰퓨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샐라임, 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아요. 마음이 왜 이러죠?”
싱숭생숭한 마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샐라임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루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되겠다, 다른 마음 먹지 못하게 훈련에 들어가야겠어.”
샐라임의 말이 맞았다.
정신을 쏙 빼놓도록 훈련을 하다 보면 남주인공들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훈련이 없어도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일이 생겨났다.
그건 바로 다음 퀘스트의 내용 때문이었다.
[확인하지 않은 퀘스트가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
# 제3 스토리 퀘스트
제목: ‘죽음을 피해라!’
내용: ‘누군가’에게 살인 표적이 된 당신. 그 또는 그녀로부터 필사적으로 살아남으시오.
제한 시간: 두 달
보상: 전설급 아이템
페널티: 사망
+
이제야 생각이 났다. 내가 누군가에게 살인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걸.
그리고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퀘스트가 내려오는 걸 보니 이 근방에서 사건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날 죽일 사람이라…….
나를 적대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현재로서는 밀리센트 가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학교 밖을 나서지 않으면 그들에게 붙잡힐 가능성은 없을 텐데.
“…설마.”
학교 안에서 나를 노리는 자가 있는 건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람을 심어 놨을 수도 있고, 기존에 있던 누군가일 수도 있다.
“…….”
뭐가 되었든 간에 확실한 건,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샐라임,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게다가 템트의 꿈속에서 죽음에 임박한 상황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거대한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인생 조기 종영은 사양이다. 어떻게든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남는 걸 보여 줄 테다.
내 물음을 들은 샐라임이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 전에 네가 죽여 버리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