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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51)화 (51/156)
  • 50화. 템트(4)

    죽지도 않았다.

    여전히 내 눈앞에는 새하얀 눈밭이 보일 뿐이었고, 안절부절못하는 템트가 보였다.

    “이, 이런, 이런 미친! 내, 내 먹잇감이! 내 먹잇감이!! 돌려놔!”

    그녀는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지 마구 내 배의 상처를 막았다.

    푸슉!

    그녀가 길게 꼽힌 칼을 빼냈다.

    “헉…헉…….”

    나는 피를 토하며 숨을 몰아 내쉬었다.

    “왜… 왜 꿈에서 깨지 않는 거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죽으면 현실의 나도 죽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오열하면서 신선도 걱정을 하겠지.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이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내 결정은 오답이었다.

    “이곳엔 죽음도, 삶도 없어. 너는 이제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된 거라고!”

    “현실의… 현실의 나는?”

    “말이라고 해? 곧 있으면 시체가 되겠지!”

    “이런…젠…장…….”

    더럽게도 운이 없었다.

    나는 그저 칼로 내 배때기를 쑤시는 행동만 했을 뿐인 거다. 현실의 나는 똑같이 배를 움켜잡고 쓰러져 있겠지. 그리고 현실의 내가 죽기까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오 분? 오 분이면 길다.

    이렇게 피를 흘리는데, 삼 분이면 충분히 죽을 시간이었다.

    “이 망할 계집애야. 감히 내 먹잇감에 손을 대? 그게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템트는 아까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드디어 몬스터의 모습이 깨어난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난 마음에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아, 그니까 애초에 환술을 걸지 말든가! 아픈 건 나야! 네 공간이니 아픔 좀 없애 보든가! 정의의 사도네 뭐네 하더니 진짜 짜증 나게 하네, 이 몬스터가! 으윽…….”

    그러자 템트가 시퍼런 얼굴을 했다.

    “이런다고 꿈에서 깰 것 같니? 너는 이미 글렀어. 내 고유 영역에 들어온 순간 넌 영원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

    그녀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는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고유 영역에 들어온 순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고……?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박히듯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나는 얼굴을 눈밭에 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삼 분 후면 나는 죽는다.

    저 뒤에 있는 저택을 한 번 바라보았다.

    문이 닫힌 채 그저 고요해 보일 뿐인 집.

    “끄흐…….”

    나는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어 눈밭 위를 기었다.

    손을 뻗어 눈을 움켜쥐고, 발로 땅을 밀어 조금씩 나아갔다.

    “곧 있으면 죽을 계집애가, 어딜 도망가? 너는 좀 더 고통을 맛봐야 해!”

    그녀는 이젠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빨이 뾰족하게 달린, 험악한 얼굴을 한 몬스터였다.

    그녀는 내 등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퍽!

    “억! 으억!”

    내가 맞을 때마다 신음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손톱이 나갈 것 같아도, 눈 때문에 온 감각이 마비될 것 같아도, 나는 눈 위를 기었다.

    그러자 템트가 엎드려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멱살을 움켜쥐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응? 저택에라도 기어 들어가려고? 꿈속으로 들어간다고 네 고통이 사라질 것 같아!?”

    “…….”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퍽!

    그녀는 내 멱살을 놓으며 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흐으…….”

    정말 아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서 겪어 본 고통 중에 원탑이었다.

    이제 누가 ‘죽을 것같이 아파.’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련다.

    그런 사람들은 진짜 죽음 직전까지 가 보지 않았으니까, 이 고통의 백 분의 일도 모를 거다.

    나는 또다시 엎어져 눈밭을 기었다.

    저택까지만…….

    저택까지만 갈 거다.

    저택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조각들을 재결합해 만든 꿈속이랍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 낸 것이죠.

    내 꿈속으로.

    영원히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내 꿈으로. 그렇게,

    턱.

    손을 뻗자 저택 입구의 계단이 느껴졌다.

    젖 먹던 힘을 다해 계단을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갔다.

    저 멀리서 템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려나 싶겠지.

    “하아…….”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정상적인 사고 회로가 돌아가지 않았다.

    몽롱하고 영원한 꿈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샐러맨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도마뱀의 형상을 띤 정령이 순식간에 내 앞으로 나타났다.

    이곳은 내 꿈의 영역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곳.

    “불태워 버려.”

    나는 계단에 엎어져 문 앞에 엎드린 채 입을 움직였다.

    그 입술의 움직임이 내가 짜낼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을 거다.

    휙.

    샐러맨더는 내 말을 알아듣고는 망설이지 않았다. 볼을 잔뜩 부풀린 뒤 저택을 향해 화염을 쏘았다.

    화르륵.

    작은 불꽃은 저택의 문에 옮겨붙었다.

    샐러맨더는 저택의 왼쪽으로 가더니 그쪽에서도 화염을 불어 넣었다.

    화르르.

    샐러맨더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온갖 곳에 화염을 내뿜었다.

    나는 희미한 의식으로 불타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저 멀리서 템트가 깜짝 놀란 채 나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이곳은 내 고유 영역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녀는 틀렸다.

    저택의 계단은 그녀의 고유 영역이 아니었다.

    내 꿈의 영역이지.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내 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령을 부르자 소환된 것으로 보아 이 계단까지가 내 꿈의 영역이 맞았다.

    샐라임은 계약자가 환술에 걸리면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을 잊는다고 말했다.

    사실 그건 잊는 것이 아니었다.

    템트의 술법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과는 아주 다른 행복한 꿈속에 빠져들었고, 그곳이 꿈속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정령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모험가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는데 어떻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환술에 완벽히 걸려들지 않은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저택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내 꿈의 영역, 즉 나만의 영역이라고.

    그렇기에 정령을 부릴 수도 있었던 거고, 샐러맨더도 나타날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한다고 네가 꿈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저택은 활활 타올랐다.

    지붕이 무너지고, 뼈대가 드러났다.

    쾅!

    기둥이 쓰러지면서 이 층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샐러맨더의 화염은 보통의 불과 달랐다.

    물에도 꺼지지 않았으며, 위력도 몇 배는 강했다.

    불길은 저택을 무너뜨리고 있었고, 나는 마지막으로 계단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죽음이 없는 곳이라더니, 진짜 죽지 않고 아프기만 더럽게 아팠다.

    “꿈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

    “꿈 자체를 없애 버리면 돼.”

    “……?!”

    저택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조각들을 재결합해 만든 꿈속이랍니다.

    템트는 분명 이 ‘저택’이 ‘내’ 꿈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바깥은 템트의 고유 영역이다.

    내 꿈과는 무관한 곳이라는 거지.

    그러니 꿈에서 깰 수 있는 방법은 저택 안에 있었다.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인데.

    하지만 상관없다.

    저택 안에 있는 그 어떤 방법을 모른다면, 그냥 저택을 없애 버리면 돼.

    꿈이 사라지면 저절로 깨게 되어 있으니까.

    안 되면 말고. 이러나저러나 죽는다.

    쿠당탕!

    모든 기둥이 쓰러지고 저택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큰 불길은 금세 저택의 구성물들을 재로 만들어 버렸고, 나는 그저 그것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안 돼. 안 돼!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안 된다고!”

    “…….”

    템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절대! 절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끄흑…….”

    눈이 서서히 감겼다.

    길고 끝없는 잠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깼다.

    눈을 뜨자 바로 앞에는 섬 끝자락에 서 있는 템트가 보였다.

    이곳은 하얀 설원이 아니었다.

    미노타 섬이었다.

    복부의 고통 또한 없었다. 환각에서 깨어났으니 좀 전의 세계는 모두 무너진 것이었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을 수 있었다.

    내 앞에는 처치해야 하는 상대가 남아 있으니까.

    나는 왼쪽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역시.”

    샐라임이 손에 잡혔다.

    검을 순식간에 뽑은 뒤 나는 템트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제 끝이야……!”

    높이 들어 올린 검신 위로 붉은 화염이 초승달 모양을 그렸다.

    “붉은 낫.”

    순식간에 느껴졌다.

    내 주변을 둘러싼 일정 공간이 새빨간 기운으로 공명하며 강한 힘이 검 끝으로 모이는 것을.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낫을 내질렀고,

    서걱!

    초승달 모양의 화염은 템트의 허리를 베어 버렸다.

    “커헉……!”

    아무런 방어 능력도 없는 템트는, 행복을 주는 사도가 되겠다던 말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몬스터의 결말을 맞이해라.”

    두 동강 난 템트의 몸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나는 템트를 처치한 채 그 자리에 엎어져야만 했다.

    환각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정신적 타격이 너무 세게 다가왔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신이 붕괴해서 시체가 되었을 거다.

    그리고 조금 지났을까.

    잰퓨어와 첸테 선배가 멀리서 달려왔다.

    “루나……!”

    항상 늦게 도착한단 말이야, 응?

    엎어져 있는 나를 보자 잰퓨어는 사색이 되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루나, 루나. 괜찮은 거야? 왜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거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미, 미안하다, 루나. 생각보다 대왕거미를 따돌리는 것이 오래 걸렸어.”

    “템트는 제가 죽였어요.”

    나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임무는 모두 해결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남은 게 있어요.”

    그건 바로 거미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 주는 것.

    내가 그들에게 사슬거미의 본거지에 잡혀 가서 겪은 일을 설명하자 잰퓨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루나, 너는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온 거야?”

    “감옥 전체를 불태웠더니 거미들이 우릴 건져 내더라고. 그때 도망쳤지.”

    “생존 능력 하난 인정해 줘야 해.”

    “하지만 사람들이 남아 있어. 꼭 구해 준다고 약속했거든.”

    감옥에서 펑펑 울고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그 사람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가 가지 않아도 이젠 템트가 사라졌으니 죽을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서 가죠.”

    우리는 사슬거미의 본거지를 향했고,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대왕거미가 보이지 않자 사슬거미들은 단합하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우리는 거미 감옥에 접근했다.

    첸테 선배가 대지를 들어 올려 손쉽게 그들을 구해 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그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헤일리 공국에 오시면 꼭 저를 찾아 주세요.”

    벨리아는 알고 보니 헤일리 공국의 유일한 공작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꼭 도움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은 페니였다. 내가 감옥에 갇히자마자 말을 걸어 준 남자다.

    “감사 인사는 저기 있는 첸테 선배에게 하세요. 제가 뭘 했다고. 하하…….”

    하지만 페니는 내가 무어라 말을 하든 무언가 엄청난 결심을 한 얼굴로 나를 향했다.

    뭐지? 할 말이 있는 건가?

    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네?!”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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