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템트(3)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하얀 설원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와 본 적도, 꿈꿔 본 적도 없는 공간이다.
휘이잉.
매서운 바람이 문을 닫을 것처럼 불어왔다.
힘을 주어 문을 활짝 연 채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잠옷 차림에 맨발인 상태였다.
사락.
맨발로 땅을 밟자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어떤 인영.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한 여자였다.
“템트…….”
템트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아주 우아하고 가뿐한 몸짓이었다.
“환영합니다. 제 고유 영역에 들어오신 걸.”
고유 영역?
자기가 관장하는 공간이라는 건가.
“여기가 어디지? 나를 당장 내보내 줘.”
템트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제가 만든 환각 속에 빠졌습니다. 제 눈을 바라본 그 순간부터요.”
“환각……?”
역시 내 정신세계가 지배당한 것이었다.
샐라임이 그렇게 그녀의 술법에 빠지는 걸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녀의 눈을 보자마자 걸려드는 정신계 공격이라니.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뻐하세요. 앞으로 당신은 제가 만든 꿈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아주 행복한 상태로 만들어 드리죠. 저는 인간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사도니까요.”
그녀는 흐뭇한 미소로 나를 대했다. 마치 자신이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저 저택은 뭐지? 저 안에 있는 남자들은 다 뭐고.”
“저택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조각들을 재결합해 만든 꿈속이랍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 낸 것이죠.”
“…….”
“부디 조금이나마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즐거워? 저건 농락하는 거나 다름없어. 현실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말없이 천천히 발을 옮겨 나에게로 다가올 뿐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손에 기다란 칼을 쥐고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우매합니다. 기껏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구해 줬는데도, 저를 탓하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녀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론은 됐어. 원하는 게 뭐지?”
이곳에서 대결이라도 벌이자는 건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들었는데, 내 영혼을 빼앗을 셈인가?
“성격이 급하신 분이군요.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말씀드리죠. 저는 당신의 육체를 원합니다.”
“육체? 죽으라는 거야?”
“당신은 제가 드리는 행복한 꿈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육체를 저에게 바친다는 선에서 말이죠. 그곳은 눈물이나 고통, 두려움도 없답니다.”
“거절한다면?”
“아쉽게도 거절의 선택지는 없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이미 제가 지배했으니까요.”
“…뭐?”
그랬다.
나는 그녀를 본 순간 환각에 빠졌기에 내 몸은 템트를 보았던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아무런 공격도 할 수 없이 얼어 있는 상태일 터.
“포기하세요, 모험가여. 욕심을 버린다면 모든 것이 편해집니다.”
이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지?
지금 이 자리에서 템트를 쓰러뜨리면 되는 건가?
옆에 동료가 있었으면 나를 깨워 줄 수 있었을 텐데, 하필 혼자 와 버려서 이런 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젠장.
일단 해 볼 수 있는 걸 해 보자.
샐라임의 말대로면 그녀는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다고 했으니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손은 머리보다 빨랐다.
내가 주먹에 온갖 마나를 실어 그녀의 얼굴을 향해 갈겼다.
휙!
하지만 그녀는 가뿐하게 몸을 피할 뿐이었다.
탓!
내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 반대쪽 주먹으로 그녀의 배를 향해 휘둘렀다.
휙!
“저택을 빠져나왔길래 똑똑하신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군요.”
“무슨 말이지?”
그때, 그녀가 순식간에 내 뒤로 몸을 옮기며 칼을 내 목에 갖다 대었다.
“……!”
“여기는 제 고유 영역입니다. 이곳에서는 저는 무적의 상태가 됩니다.”
“무적이라고……?”
“절대 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녀는 입을 내 귀에 대고 후후, 하고 웃었다.
귀에 숨이 닿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왼쪽 허리에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없어…….”
항상 허리춤에 있던 샐라임이 없었다.
샐라임은커녕 현재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투복도 입지 않은 잠옷 차림새라니.
자칫해서 저 칼이라도 맞으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에선 모든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묘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건 싸워 봐야 알겠지?”
나는 빠르게 등을 빙글, 돌려 내 목을 위협하고 있는 그녀의 팔을 쳐냈다.
툭.
칼이 힘없이 눈밭으로 떨어졌고, 나는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퍽!
이번엔 타격이 들어갔다. 그녀는 반대편으로 고개가 돌아간 채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얼굴을 맞고 웃는 사람이라니. 미친 건가.
나는 두 번째 주먹질을 갈겼다.
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퍽! 퍽! 퍽! 퍽!
주먹에 마나를 둘렀기에 충분히 위력은 강했을 거다.
이라도 하나 빠져야 정상인데.
하지만 그녀의 볼도, 그녀의 입술도, 모두 정상이었다.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무의미하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힘차게 발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갈겼다.
퍼억!
하지만 그녀가 내 발목을 잡고 그대로 빙글, 돌려 나를 눕혀 버렸다. 그러고는 위에 올라탄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빛나는 초록색으로,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지?”
내가 그녀의 밑에 깔린 채로 입을 열었다.
진작에 죽여도 되었다. 아까 내 뒤에서 목을 위협했을 때 바로 그어 버렸어도 되었을 텐데.
여기서 내가 죽는 건 안 된다는 건가?
그러자 템트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지금 죽이면 신선도가 떨어져서요.”
마치 나를 고깃덩이처럼 여기는 그녀의 모습에 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확실한 건 현실의 몸을 죽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나를 죽이면 현실의 몸도 죽어 버린다는 건데.
“이런…….”
처음에는 자살을 해서 꿈에서 깨어나려고 했다.
꿈은 대개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벼랑 끝에서 떨어진다거나, 칼을 맞자마자 꿈에서 깨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현실의 몸도 죽는다.
템트는 자신이 원할 때까지 나를 신선하게 유지한 다음에 먹을 생각이었던 거다.
휙!
나는 그녀의 등을 잡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밑으로 깔았다.
그녀는 순순히 몸을 눕혔다. 나는 그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마구 갈겼다.
퍽! 퍽! 퍽! 퍽!
내 주먹질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고개. 그러면서도 그녀는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당장! 내보내란! 말이야!”
나도 이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그녀의 고유 영역. 언제 어떻게 나를 구워삶을지 몰랐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몰아세워야 했다.
휙!
나는 심지어 바닥에 놓인 칼을 들어 그녀의 심장에 꽂아 버렸다.
콰악!
“하하하하!”
그녀는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는지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내가 그녀의 위에 앉아 허탈한 표정으로 내뱉자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더 크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하신 분은 처음 봅니다. 멍청한 건지, 끈질긴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근 백 년 만에 저에게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았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초조했다.
무엇이라도 알아내야 한다.
분명, 대화를 하다 보면 단서가 있을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당신은 현실의 자아가 센 편이군요. 환술에 완벽하게 걸려들지 않았어요. 이대로 죽기에는 아까운 인재군요.”
“그렇게 말할 거면 살려 놓으라고!”
“하지만 전혀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니까요.”
“어째서지?”
그녀는 단언했다.
내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왜?
모든 술법이라면 깰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환술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
“설마…….”
내 머릿속에 어떤 의심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분명 여기서 날 죽이면 현실의 내 몸의 신선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즉 환각 속 내가 죽으면 현실의 나도 죽는다는 것.
그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걸까?
상대는 인간을 속여서 영혼을 빨아먹는 템트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또한 바보 같은 짓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굳이 거짓말을 한 거지?
이 환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건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저는 모든 인간들이 행복의 세계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꿈속에 빠져서 영원히 현실을 잊은 채, 원하는 삶을 사는 거죠.”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현실을 외면한 자에게 천국은 없어.”
“그게 무슨 상관이죠? 이 세상은 템트가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들에게 행복을 선사해 줄 능력이 있으니까요. 가엾고 하등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뿐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칼을 눈밭 위로 떨어뜨렸다.
지금으로서 내가 시험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
그건 바로…… 스스로 죽는 것.
하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정말 현실의 나까지 죽어 버린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이 꿈속에서 살아가야겠지.
나를 받드는 네 명의 가짜 남주인공들 사이에서, 여유와 쾌락을 만끽하며.
딱딱딱.
손톱을 빠르게 깨물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야.
내가 애써 두려움을 감추며 소리쳤다.
“대답해. 내가 왜 여기서 못 빠져나갈 거라 생각하지? 환술이라고 빈틈이 없는 건 아니야.”
그러자 템트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저는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아니까요.”
두려워하는 것?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머리가 복잡했다.
템트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을 했고, 나는 그걸 믿어야 하는지, 부정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간단하게 생각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템트의 말이 진실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 현실의 나도 죽어 버린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여기서 깨어날 수 있었다.
진실일까, 거짓일까.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제 말이 거짓일까요?”
템트가 내 속마음을 읽은 건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
그리고 나는 생각을 끝냈다.
스윽.
나는 땅에 떨어져 있는 기다란 칼을 주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역방향으로 쥐었다.
칼끝은 나를 향했다.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건 바로 죽음이다.
나는 과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을까?
무서웠다. 손끝이 떨려오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넌 천사가 아니야.”
본능을 따르지 않겠다.
온전히 머리에 나를 맡기겠다.
내 삶은 항상 그래 왔으니까.
“멍청한 몬스터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기다란 칼을 배에 쑤셔 넣었다.
푸욱-
그러자 템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졌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하지?!”
금세 나에게로 다가와 내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더 깊숙이 배에 칼을 꽂아 넣을 뿐이었다.
“끄흑…….”
배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고, 손은 피로 물들었다.
진짜, 진짜 말도 안 되게 아프다.
차라리 빨리 죽고 싶을 정도야.
입에서도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고 턱 밑으로 줄줄 흘렀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템트가 칼을 꽉 쥔 내 손을 풀어내려 했다.
나는 하얀 설원 위에 쓰러졌다.
새빨간 선혈이 내 주위를 물들였고, 나는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렇게 여기서의 의식을 잃어가며 현실로 돌아가는…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꿈에서 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