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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49)화 (49/156)
  • 48화. 템트(2)

    “우음…….”

    밝은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 덕분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얀 침대 시트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잠은 푹 잤는지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웃통을 벗고 있는 한 남자.

    “깼어? 어제 늦게 잤는데.”

    옅은 갈색 머리가 마구 흐트러진 채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그.

    “잰퓨어.”

    나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잰퓨어가 팔을 벌리더니 어서 안기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와락-

    내가 그의 품에 쏙 들어갔고, 맨몸이 맞닿아 그의 체온이 전달되었다.

    따뜻하고, 매끄러웠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등을 쓸었다. 손끝으로 간지럽히는 그의 손길에 야릇하게 감각이 곤두섰다.

    “맨날 나랑만 이러면 좋을 텐데.”

    잰퓨어가 아쉬운 듯, 만족스러운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때, 문을 열고 다른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투명한 금발 머리를 한 남자는 흰 셔츠에 앞치마를 맨 채였다.

    방에 들어설 때부터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는 금세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좋은 아침이에요, 루나.”

    그는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내 볼을 부여잡더니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그의 입술에 포근함을 느끼며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잰퓨어는 아쉬운 얼굴로 그걸 쳐다보며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무방비 상태로 침대에 엎드려 있을 뿐.

    입술을 뗀 세이먼은 참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오늘따라 욕망이 들끓는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시선을 내리깔더니 내 몸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은 토마토 스튜와… 베이컨, 스크램블드에그예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어요.”

    그러고는 내 어깨를 괜히 지분거렸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가운을 하나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먹을래. 배고파.”

    “이리 와요.”

    큰 키의 세이먼이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복도로 이끌었다.

    복도는 길었고, 집은 적당히 컸다. 이 층 구조로 되어 있는 저택은 원목을 중심으로 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포근함과 안락함을 주었다.

    식당에 도착하자 내 자리에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음식 앞에 앉아 포크를 들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앞에 있는 의자에 각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세이먼과 잰퓨어.

    세이먼은 턱을 괸 채로, 잰퓨어는 고개를 곧게 세운 채로 내가 어서 음식을 입에 넣기만을 기다렸다.

    “루나는 많이 먹어야 해요.”

    “챙겨 주지 않으면, 루나는 손도 대지 않으니까.”

    나는 그들을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인 뒤 수저를 들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서려고 하자 이번에는 레크리드가 식당 입구에 서 있었다.

    짙은 초록색 셔츠를 걸친 채 잠자코 나를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 같았다.

    “어서 가요.”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이 층의 복도 끝으로 갔다. 그곳은 욕실이었다.

    “오늘은 라벤더 향이에요.”

    연보랏빛 물이 가득한 욕조에 라벤더 꽃잎이 예쁘게 띄워져 있었다.

    내가 가운을 스르륵 내리자 뒤에서 레크리드가 옷을 주워 주었다.

    딱히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욕조에 들어갔다.

    밥을 먹고도 잠이 온전히 깨지 않은지라 잠이 솔솔 왔다.

    게다가 따뜻한 물에 잠겨 있으니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

    그렇게 몇 분 졸았을까?

    누군가가 욕조 밖으로 놔둔 내 팔꿈치를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딱히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욕조 안에서 기절한 건가 싶어서.”

    셔츠에 스카프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은 에르셈프였다.

    손가락 끝으로 내 살결을 문지르는 그는 왠지 모를 인내가 느껴졌다.

    “레크리드, 이제 그만 씻겨 줘.”

    내가 레크리드에게 지시하자 에르셈프가 욕실 밖으로 나갔다.

    목욕을 끝낸 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티타임 룸이었다.

    화려하고 예쁜 디저트가 있는 원탁 테이블과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두 개 있었다.

    에르셈프는 의자에 앉지 않고 방 안을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나를 와락 안았다.

    순식간에 에르셈프 특유의 시원한 향이 코끝을 찔렀고, 두껍고 단단한 근육이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

    그는 내 어깨를 잡고는 벽으로 밀었다.

    내 등이 가볍게 벽에 닿자 그가 고개를 훅 들이밀었다.

    “오늘은 다른 대화를 해 볼까?”

    “무슨 소리야, 에르셈프.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아까 목욕하는 모습을 봐 버려서…….”

    귀를 붉히는 그와는 달리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아 초콜릿을 들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초콜릿을 뺏어 들었다.

    “뭐야, 에르셈,”

    에르셈프는 다른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가볍게 눌렀다.

    “더 달콤한 게 있는데, 왜.”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저리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장난치지 마. 오늘은 이 책에 대해서 읽어 주기로 했잖아.”

    하지만 에르셈프는 오늘따라 이상했다. 비키라는 내 턱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잡더니 위로 올려 벽에 고정시켰다.

    “하루는 상관없잖아. 안 그래?”

    팔이 올려지자 가운이 흘러내리며 내 하얀 팔이 드러났고, 에르셈프는 다시 한번 내 팔에 자신의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쪽, 소리를 내며 연달아 네 번 입을 맞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저리 안 가? 에르셈프.”

    굳이 언성을 높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중얼거리기만 해도, 에르셈프는 내 말을 곧잘 들었다.

    괜히 혀로 입술을 축이며 뒤로 물러난 그는 나를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렇게 나와 에르셈프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농담을 치기도 하고, 진지한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디저트가 반절 정도 남았을 때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뭐 해야 하지?”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잠에서 온전히 깨지 않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씻어도, 음식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잰퓨어, 잰퓨어는 어디 있지?”

    이상하게 잰퓨어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방에 없을 것 같았다.

    당연히 있을 텐데, 왜 없을 것 같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나를 지배했다.

    “잰퓨어에게 가는 거야?”

    에르셈프의 말을 뒤로 한 채 침실로 돌아간 나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잰퓨어를 볼 수 있었다.

    가슴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셔츠 단추가 풀어진 채였다.

    “오늘 오후엔 날 찾아 줬구나, 루나.”

    “…응.”

    “피로를 좀 풀어 줄까?”

    나는 말없이 침대에 엎드렸다.

    아까부터 머릿속이 물에 잠긴 것 같았다.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일 뿐, 내 사고 회로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잰퓨어는 능숙하게 내 등에 올라타더니 팔부터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어루만지다가, 팔마디를 꾹꾹 눌렀고, 날개 뼈에 입술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눈을 뜬 채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나무로 된 침대 헤드가 보일 뿐이었다. 양각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무늬를 따라 틈이 파여 있었다.

    그런데, 그 틈 사이로 작은 거미가 보였다. 회색의 통통한 몸통을 가진 거미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미……?

    거미가 지나가네?

    이상하게 머리가 답답했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것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잰퓨어의 손길을 느꼈다.

    안마가 끝나자 어느새 네 명의 남자들이 모두 내 침실에 모여 있었다.

    의자에 앉기도 하고, 벽에 기대어 서 있기도 한 그들은 나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 나머지 그들에게 내뱉었다.

    “산책을 나가고 싶어.”

    밖으로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시원한 공기라도 마시면 좀 나아지겠지.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이 생소한 감각이 어서 사라지길 바랐다.

    그런데.

    “루나, 이젠 제 차례예요. 양보할 만큼 했어요. 저랑 둘이서만 시간을 가져요.”

    “바깥은 추워서 안 돼. 감기 걸리면 안 된단 말이야.”

    “재단사를 불러서 옷을 지어 볼까? 참 아름다울 것 같군.”

    “오후를 지루하게 만들었다니, 미안해요.”

    다들 말을 돌리며 말리는 것이다.

    뭐지?

    아까까지는 내 말이면 모두 깜빡 죽을 것처럼 행동하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그럼 나 혼자라도 나가지, 뭐.”

    침실에서 나와 일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탔다. 그러자 네 명의 남자들이 주르륵 한 번에 나와 내 뒤에서 계속해서 만류했다.

    “우리와 놀아요, 루나. 나가지 말아요.”

    “여기 있어 줘요. 당신이 제 유일한 행복이란 말이에요.”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뭐라는 거야.

    왜 나가지 말라는 거지?

    그리고 저택의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이상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문의 손잡이에는 두꺼운 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내가 막아 놨어요. 도망가지 못하게.”

    세이먼이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사슬?

    사슬이라면.

    이상하게 아까 본 거미가 떠올랐다.

    아까……?

    그리고.

    “사슬거미……?”

    내 입에서 이상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새로운 책에서 본 곤충인가요? 저에게도 설명해 줘요.”

    사슬거미.

    분명 어디서 본 단어다.

    그리고,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팡! 치고 지나갔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느낌.

    “헉!!”

    내가 입을 막으며 까무러치듯이 놀랐다.

    입에서 무언갈 뿌리고 사슬을 내뿜는 모양새의 거미.

    나는 분명 사슬거미와 싸웠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저택에 있는 거지?! 여기가 대체 어디야?

    이런 집은 내 집이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왜 이 남자 넷이서 내 시중을 들고 있는 거지?

    멀리하기에도 모자란 마당에 왜 내 옆에 딱 붙어 있냐고!

    나는 바로 내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샐라임!

    허리춤에 꽂던 칼이 없다. 항상 가지고 다니기에 절대 나와 떨어지지 않는 유일한 것인데.

    “내 옷이랑 물건은 어디 있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옷이야 당연히 옷장에 있지, 루나. 내가 입혀 줄까?”

    에르셈프가 말했고, 나는 그를 무시한 채 드레스 룸으로 달려갔다.

    벌컥!

    옷장 문을 열었다.

    좌르륵.

    옷걸이에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옷들이 존재감을 뽐내며 걸려 있었다.

    하나하나씩 빠르게 살펴보았다.

    ‘타락한 천사의 의복’은 어디 있지?

    그거 전설템인데!

    그리고 내 칼이랑 부츠는 다 어디 있는 거야?

    드레스 룸이 너무 넓어 찾을 수가 없었다.

    원피스부터 파티용 드레스까지 아주 많은 옷이 있었지만 정작 내가 찾아야 할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문 앞으로 달려갔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사슬이 칭칭 감긴 손잡이를 붙잡고 흔들었다.

    덜컹 덜컹 덜컹!

    하지만 사슬은 튼튼하게 묶여 있어 열쇠로 풀지 않는 이상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어느 세계에 와 있는 거지?”

    확실한 건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라는 거다.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의 의지만이 떠올랐다.

    “잰퓨어와 첸테 선배를 구해야 해!”

    하지만 저쪽에 있는 잰퓨어는 도대체 누구지?

    생김새도 똑같고, 말투도 똑같아.

    그렇다면…….

    “이건 꿈인가?”

    아까부터 몽롱한 기분, 안개처럼 뿌연 머릿속, 알 수 없는 낯선 느낌까지.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날 왜 가둬 놓은 거지?”

    이 저택에 나를 가둬 놓은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꿈속에 들어온 거라면 굳이 또 가둘 필요가 있는 건가?

    어떻게 하면 이 꿈에서 깰 수 있지?

    나는 볼을 잡고 꼬집어 보고 머리를 꽝꽝 때려 보는 등 온갖 별짓을 다 해 보았다.

    “루나, 왜 그래요. 요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는 거예요?”

    “최근 들어 루나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세이먼과 레크리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고, 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스트레스야.

    너네가 바로 스트레스다.

    “세이먼. 이 문 열어.”

    “안 돼요. 도망갈 거잖아요.”

    “다시 올게. 그러니까 사슬 풀어.”

    “미안해요. 그것만은…….”

    “당장 열쇠 안 가져 와?”

    내가 소리치자 세이먼이 잠시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이러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열쇠 꾸러미 찾아서 나한테 줘.”

    그러자 세이먼이 풀이 죽은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루나, 화내는 모습도 섹시해.”

    잰퓨어가 옆에서 능글맞은 소리를 해 댔고, 나는 이 잰퓨어가 진짜 잰퓨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약간 무서워졌다.

    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쩌지?

    곧이어 세이먼이 열쇠 꾸러미를 가져와 나에게 건넸고, 그는 억울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화를 내서 삐진 건가?

    나는 사슬을 잠근 자물쇠의 구멍을 보고 맞는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덜컥, 덜컥.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자물쇠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칭칭 감긴 사슬을 천천히 풀어내었다.

    철커덩.

    풀린 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문을 열어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절대 열어서는 안 될 문이라면?

    그래서 이 남자들이 그렇게 말린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온갖 물음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도박이다.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대가는 내가 지불한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갇혀 있는 삶을 선택할 바에야 나는 도박을 하련다.

    “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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