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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44)화 (44/156)

43화. 둘만의 시간(3)

“네……? 그게 대체 무슨.”

그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포갰다.

따스한 그의 손가락이 느껴졌고, 동시에 그에게 팔을 결박당했다.

“…흡.”

순간적으로 입이 다물리며 숨이 멈췄다.

그의 유려한 보랏빛 눈이 나를 올곧이 향했는데, 마치 나를 옥죄는 것 같았다.

에르셈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위에 올라타서,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에서는 어떤 욕망과 절제가 동시에 담겨 있는 듯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 네 생각까지 해 줄 여유 없으니까.”

그의 낮은 음성이 방을 울렸다.

이 공간의 시간만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코가 서로 맞닿을 거리였다. 약간은 떨리는 모습.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똑똑!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우리 방에 볼일이 있을 리가 없기에 에르셈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똑똑똑똑!

똑똑똑똑똑똑!

엄청나게 급한 사람처럼 빠르게 창문을 콕콕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

그 소리에 에르셈프가 내 위에서 내려왔다. 밑에 깔려 있던 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창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활짝, 열었다.

소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레이번. 무슨 일이지.”

창문을 열자 커다란 독수리가 발에 종이 뭉치를 단 채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몹시 피곤하다는 말투로 독수리에게 말을 걸었다.

“휘이이익!”

독수리가 알 수 없는 울음으로 그에게 말을 하자 에르셈프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발에 달린 종이 뭉치를 풀자 독수리의 움직임이 금세 멈췄다.

에르셈프는 종이 뭉치를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

그리고,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첫째 형이 쓰러졌다…고?”

“……?”

굳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내용을 읽는 그는 남은 종이 뭉치들을 전부 확인한 뒤 종이를 내려놓았다.

첫째 형이라면 레비온 카이센 비젠티아.

현 라인하르트 왕국의 왕세자다. 다음 왕위를 물려받기로 확정이 된 왕자.

가끔씩 마을에 나와 백성들의 삶을 파악하던 그는 나이도 어렸으며 건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쓰러졌다고?

“어째서죠?”

“공격을 받았나 봐. 정확한 건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몇 분 동안 생각에 잠긴 듯이 가만히 얼어붙어 있던 그는 이내 독수리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레이번. 이만 가 봐.”

독수리는 궁을 비운 에르셈프를 찾아 날아온 것 같았다. 아마 통신에 활용되는 훈련 받은 새일 터다.

에르셈프는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더니 테이블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러고는 종이 뭉치를 차례대로 펼쳐 놓더니 원래부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깃펜을 집어 들었다.

무언가를 쓰려는 찰나, 손을 우뚝 멈추고는 나를 쳐다봤다.

“먼저 자. 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

아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짱해진 그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내뱉었다.

“갑자기 일이라뇨.”

“형의 상태가 위독한 수준이야. 게다가 공격을 받았다는 건 비젠티아 왕실의 보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고. 직계 후손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내려왔어.”

그는 금세 자리를 잡고는 빠르게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펜으로 몇 번의 사인을 하는 것 같더니 글을 길게 쓰기도 했다.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까 침대에 누워서 바라봤던 사람이 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왕자였다는 게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네요.”

조용한 방 한가운데에서 내가 내뱉자, 그가 대답했다.

“형 같지도 않은 사람이었지.”

“…….”

“마지막으로 말을 한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아.”

에르셈프의 얼굴엔 묘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형과 왕실을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섣불리 관여하지 않으려는 느낌.

당장 궁에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이곳에서 서류를 처리하는 모습이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에겐 전혀 와닿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렇게 적막한 밤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까.

두터운 종이 뭉치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있는 에르셈프에게 내가 물었다.

“도와줄까요?”

순간적으로 그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냉정하고 고고하지만 때로는 참 다정한 사람.

자신의 감정을 꽁꽁 싸매는 얼음 같은 사람이 나에게 지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걸 알았기에 그의 말이 헛되이 들리지 않았다.

나도 그를 돕고 싶었다.

“괜찮아.”

“잠이 안 와서 그래요. 도와줄게요.”

한 번 거절한 그는, 내 두 번째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면 내가 그려 놓은 표시가 있어. 그걸 토대로 분류만 해 주면 돼.”

“아, 이해했어요.”

어쩌다 보니 나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는 서류 뭉치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걸 나한테 보여 줘도 되나?

하지만 에르셈프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나에게 숨길 것이 없다는 것 같은 태도였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온전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나는 서류에 얼굴을 박고는 열심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거두더니 자신의 할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분류 작업을 끝내고 그가 부탁한 몇 가지 일을 더 도와주었다. 의자에 앉아 책상에 기댄 채 서류를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점점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암.”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고 있는데, 에르셈프는 완전히 일에 몰두하여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기어코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너무 졸리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그러던 나는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얼굴을 박은 채 잠이 들고 말았다.

* * *

밝게 비치는 아침 햇살에 나는 눈을 떴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자 그제야 내가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언제 잠들었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분명 새벽 세 시까지 깨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덮고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누운 기억은 없는데.

“에르셈프?!”

설마 에르셈프가 잠든 날 눕혀 준 건가?!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새벽까지 업무를 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셔츠의 맨 윗 단추를 채우며 나에게로 걸어왔다.

“일어났나?”

그의 말은 마치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드디어 일어났나? 와 같은 말투.

“왜 깨우지 않았어요?”

“굳이 깨우면 소란스럽게 굴 것 아닌가?”

그는 다시 틱틱 대는 에르셈프로 돌아왔다.

괜히 자신의 앞머리를 꼬며 대답한 그는 등을 휙, 돌렸다.

방을 둘러보자 책상에 있던 서류는 온데간데없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새벽에 있던 일이 꿈인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레이번을 통해서 보냈어.”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그는 묻지 않아도 대답해 주었다.

“이만 가지.”

그러고는 평소와 같은 고고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했다.

“아, 그럼요! 가야죠. 잠시만요.”

나는 세수라도 할 생각으로 욕실로 향했다. 눈곱이라도 떼어야지.

격하게 세수를 마친 나는 욕실을 나가자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에르셈프를 볼 수 있었다.

“왜 웃는 거죠?”

그러자 에르셈프가 대답했다.

“세수를 참 재밌게 하는군.”

한쪽 입꼬리를 올린 것이 비웃음처럼 보였다.

“……?”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이끌었다.

“흠흠, 그만 가죠.”

어서 빨리 각자 갈 곳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잊고 있던 에르셈프의 호감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이름: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나이: 18

직위: 비젠티아 왕국의 제3 왕자

호감도: 36%

+

대체 언제 36%가 된 거야!?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흐릿하게 시스템 음성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잘 기억은 나질 않지만…….

에르셈프가 내 위에 올라탔을 때였나?

아니면 내 얼굴에 고개를 들이댈 때였나?

나는 머리를 벽에 꽝꽝 박고 싶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한 번에 10%가 오를 수 있어.

이건 거의 한눈에 반한 거나 다름없잖아!

물론 호감도가 가장 높은 세이먼을 제외하면 다른 남주인공들과 똑같이 40% 이하라고는 하지만, 가장 수월하게 보았던 에르셈프가 갑자기 치고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어젯밤엔 에르셈프가 나를 제압하지 않았던가.

손을 잡아 못 움직이게 하고는 고개를 들이밀던 에르셈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악.”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걸까.

아니면 아니라고 해……?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뭐가 맞고 뭐가 아니냐고.

다행히 전령조가 와 주는 덕택에 에르셈프의 돌진을 막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장담했건만…….

보란 듯이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다니…….

그런데 이건 에르셈프가 잘못한 거 아냐?! 갑자기 사람을 못 움직이게 하고는 다가오는 게 어디 있어.

전령조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소리를 내자 에르셈프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침이 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말끔하게 돌아온 그의 모습은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당분간 보지 말죠, 우리.”

“무슨 말이지?”

“…아니에요.”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마차에 올라탔다.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샐라임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어쩔 거였냐는 둥,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잠이 들 수 있었냐는 둥, 앞으로 그런 놈은 다신 만나지 말라는 둥.

아주 엄마가 할 법한 잔소리를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아, 알겠어요, 샐라임. 다 이해했다고요.”

“너는 좀 더 혼나야 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야.”

샐라임은 어젯밤 내내 눈을 뜨고 밤을 샜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나는 나를 걱정해 주는 칼 한 자루가 괜히 고맙게 느껴졌다.

홀로 떨어진 이 세계에서 날 걱정해 주는 건 정령 하나뿐이구나. 앞으로 좀 더 잘해 줘야겠다.

계속해서 떠드는 샐라임에게 대충 대꾸하며 나는 시간표를 확인했다.

곧 있으면 두 번째 임무가 들어온다.

첫 임무에선 여러모로 느낀 게 많았다. 실전에서 느낄 수 있는 위험성과, 도처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까지.

죽음도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임무 때 만났던 하늘도깨비나 고블린에게 죽을 경우 시신을 온전히 찾기도 힘들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죽어도 슬퍼할 부모가 없다는 것이지만.

그때였다.

똑똑!

어젯밤에 들었던 것과 같이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기숙사 창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었다.

“운디네!”

여자의 형상을 한 운디네가 창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보나 마나 잰퓨어가 보낸 거겠지.

나는 창문을 열어 운디네를 맞이했다.

정령은 두 손을 모아 나에게 쪽지를 전했다.

‘보고 싶어. 지금 다리로 나와 줘.’

허.

내용을 읽은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주 대놓고 들이대는 게, 이제는 숨기지도 않을 생각인가 보다.

“…흠.”

잠시 고민한 나는 쪽지를 뒤집어 몇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디네의 손에 쥐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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