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둘만의 시간(2)
그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고요한 방 안에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씻으라니.
난 안 씻어도 되는데!?
내가 최대한 당황한 척을 하지 않으며 말했다.
“전 안 씻어도 돼요.”
그러자 에르셈프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씻지.”
성큼성큼 욕실로 걸어가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은 왠지 이런 상황이 엄청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쏴아아-
욕실에서는 에르셈프가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그 소리를 듣자 이상한 상상이 되었다. 미쳤어, 루나. 작작해.
에르셈프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좀 나은 것 같았다.
“후…….”
피곤한 것도 까먹은 지 오래였다.
그저 빨리 이 시간이 지난 뒤 아침이 되어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달칵.
침대에 앉아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에르셈프가 문을 열고 나왔다.
욕실 문이 열리자 뿌옇게 피어오른 수증기가 문틈을 비집고 나왔고, 에르셈프가…….
하얀색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운을 입고 나왔어?! 원래 입던 옷을 입지 않았단 말이야?
에르셈프는 창피함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왕궁에서는 맨날 이렇게 살아서 자연스러운 건가?
에르셈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시선이 꽂힌 건 순식간이었다.
좀 전에 화났던 마음이 한순간에 싹 풀려 버리는 그런 모습…이었단 말이다.
“…….”
큰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 다부진 근육이 느껴지는 가슴팍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어 있으니 매력은 더욱 증폭되었다. 저 하얀 가운 사이로 보이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가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정신 차리자! 씻고 정신 차려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저도 세수 좀 할게요.”
그리고 욕실로 빠르게 걸어간 다음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어푸! 어푸!
세수를 하니 좀 나은 것 같았다.
고개를 올려 거울을 보자 물을 잔뜩 맞은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몇 시간 있다가 나가면 되니 굳이 샤워를 할 생각도 없었다. 다치기도 했고.
내가 욕실을 나오자 에르셈프가 침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왜 쳐다보는 거냐고.
내가 물에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기며 그에게 말했다.
“에르셈프가 침대에서 자요.”
아무리 그래도 왕자님이었다.
왕자님이 아니어도 양보했을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당연히 에르셈프가 침대에서 자는 게 맞았다. 친구라고는 해도 엄연히 지위라는 게 있으니.
그런데 에르셈프는 칼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아냐, 루나가 자.”
“괜찮아요. 저는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난 바닥이 편해.”
“…….”
우리 둘은 서로 고집을 부렸다.
에르셈프도 만만치 않게 물러나지 않았고, 나 또한 그의 호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건 부담스러워서 한숨도 못 잘 게 분명했다.
“어떻게 왕자님이 바닥에서 자요.”
그러자 그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옛날부터 바닥을 좋아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조선 시대도 아니고 여기서 바닥에서 자는 사람이 어딨냐고.
“부담스러워서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게다가 바닥이 깨끗하지도 않고.”
내부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바닥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르셈프는 가뿐히 무시할 뿐이었다.
“쓸데없이 말만 많군. 난 잘 거니까 건들지 마.”
그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톡.
나는 그 물방울에 시선이 꽂혔다. 물기가 맺힌 바닥을 보니 더럽긴 더러운 것 같았다.
그리고 거대한 침대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탓에 바닥이 매우 좁았다.
지금도 침대 앞에 서 있느라 에르셈프와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몇 분을 옥신각신했다.
나는 에르셈프가 침대에서 자야 하는 이유를 열댓 개나 내세웠고,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단숨에 무시해 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 바닥에서 잘 생각 꿈에도 하지 마.”
그러고는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후…….”
그렇게 몇 분을 내리 말다툼한 우리는 결국에는 이 넓은 침대를 두고 왜 서로 좁은 바닥에서 자려고 하느냐, 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럼 루나가 왼편에서 자고, 내가 오른편에서 자면 되겠네.”
에르셈프는 이와 같이 제안했다.
아까부터 쉬지 않고 말싸움을 한 나는 결국엔 지쳐서 침대의 왼편에 눕고 말았다.
털썩.
이제는 될 대로 되라, 다.
그런데 에르셈프가 내가 눕는 걸 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뭐지? 어디 가는 거지?!
딸깍.
그가 전등 스위치를 껐다.
순식간에 방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찼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옅게 침대를 비추었다.
휴, 뭔가 했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괜히 긴장이 되었다.
나는 배에 손을 모으고 정 자세로 누웠다. 편하게 자는 건 불가능이었다.
그저 몸을 눕힌 채로 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
고개를 슬쩍 돌리니 에르셈프가 옆으로 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예 몸을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아주 작정한 사람 같았다.
“뭐…뭐죠?”
내가 눈으로 흘끗 그를 쳐다보며 말하자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냥 옆으로 눕는 게 편해서.”
“……?”
그럼 눈이나 감을 것이지, 왜 쳐다보는 건데?
나는 그래서 몸을 돌려서 그를 등졌다.
이러면 안 보이겠지.
새우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옆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락.
내 머리카락에 어떤 감촉이 느껴졌다.
무언가 부드러운 손길.
“……!”
에르셈프가 내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내 머리카락이 휘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하난 참 예뻐.”
머리 하나?
다른 건 다 별로다, 이거야?
내가 코웃음을 팡 치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려 했을 때였다.
“…어쩌다 쫓기게 되었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향해 물었다.
밀리센트 가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되물었다.
“그 전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에르셈프는 나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쫓는 사람이 있다는 것부터 공작가를 언급한 것까지 모두.
“…….”
그는 말이 없었다.
“말해 줘요.”
내가 재촉을 하자,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나에게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야. 그런 과정에서 알게 된 거고.”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거죠?”
그러자 에르셈프는 짧게 대꾸했다.
“알 만큼 알아.”
그의 말에 나는 등을 휙,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누워 있는 자세가 되었다.
그와의 거리가 그리 가깝진 않았지만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는 되었다.
“그럼… 제가 죽을 위험에 처했다는 것도 알아요?”
에르셈프의 정보통 정도라면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응.”
그는 손을 뻗어 다시금 내 머리를 만졌다.
그러고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죽지 않을 거야.”
“…….”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에르셈프답지 않게 솔직한 표현이었다.
* * *
에르셈프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솔직한 마음이 나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나를 향한 제 마음이 그저 고마움뿐이고, 그 이상의 것은 없다는 걸 믿었다.
오늘 같이 나온 것도 단지 자신에게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고, 보듬어 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해 주고 싶은 것 정도였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알았다.
루나가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괴한이 따라붙는 걸 보니, 오늘 자신이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거다.
죽어……?
나를 위했던 루나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야?
그는 복잡한 생각에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선의 끝에 닿은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깨끗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단지 안쓰러운 걸 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무언가… 스스로에게 어떤 다짐을 부여하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지켜 줄 것이라고.
“에르셈프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루나는 여전한 반응으로 그를 내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가볍게 넘겨 버렸다.
에르셈프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자각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루나와 나는, 아무 사이가 아닌데.’
“단지, 빚을 갚기 위한 것뿐이야.”
조용히 속삭이자 루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네? 무슨 빚을…….”
“그런 게 있어. 더 이상 묻지 마.”
그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손등으로 제 입을 가리며 그는 최대한 표정을 숨겼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루나는 아이 같은 면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날카롭게 상대방의 모습을 알아채는 통찰력이 있었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맨날 절 뒤치다꺼리 필요한 부족한 애로 취급하더니 고마운 게 있었던 거였어요? 그럼 진작에 말해 주시지.”
“조용히 좀 해.”
“내가 언제 그랬을까? 그랬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에르셈프가 혼자 오해한 건 아니고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젠장.
안 그래도 오늘따라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위험에 처한 그녀가 더 이상 위협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아가 그녀가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아릿했다.
게다가 붉어질 대로 붉어져 가라앉을 줄 모르는 얼굴 탓에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였다.
그것도 모르고 루나가 계속해서 자신을 놀리니 에르셈프는 그녀의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손이 먼저 나갔다.
저 조그만 입을 막아서 말을 못 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조심스럽게 뻗은 손이라 그런지 그녀가 제 손길을 쏙 피하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에르셈프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 읍.”
낯부끄러운 말을 아기 새처럼 조잘거리는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에르셈프는 루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얇은 팔이 손에 잡혔고, 그녀의 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따라왔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덮자, 그녀는 제압당한 상태로 우물거렸다.
“읍. 으그. 므흐는.”
그리고 찰나였다.
에르셈프가 자세를 바꿔 그녀를 침대에 눕혔고, 그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어 에르셈프는 루나를 자신의 팔 안에 가둘 수 있었고, 여유롭게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단지 가볍게 제압만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들을 끌고 가 버렸다.
에르셈프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이 루나의 이마에 닿을 듯이 고개가 가까워졌다.
미친 듯이 쿵쿵대는 그의 심장 소리를 숨기기 위해 에르셈프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장난 아니라고 했을 텐데.”
“…….”
“억지로 입을 다물게 해야 내 말을 들을 건가?”
루나는 에르셈프의 말에 버둥거리던 몸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동시에 루나가 숨을 확 내쉬자 그는 작게 놀랐다.
이렇게 작고 여린 여자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순식간에 방 안엔 정적이 흘렀고, 어두운 방 안에서는 남녀 둘이 침대 위에 붙어 있었다.
달빛이 창문 밖으로 은은하게 비추어 루나의 볼과 콧대가 반짝거렸다.
에르셈프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어떤 가문이 와도, 자객이 와도 괜찮아.”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
“내 옆에 있으면, 위험하지 않을 텐데.”
“……!”
깊은 밤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아름다웠던 달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루나와 단둘이 있는 상황 때문이었을까.
에르셈프는 평소와 달리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천천히 제 마음을 내비치고 싶었다.
“참 다정하군요. 에르셈프는.”
사랑과 유사한 모든 감정을 부정하던 그였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것이 미래의 자신을 아프게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있으니.
“…그럼 그 말은…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