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제4 남자 주인공
밤이 꽤 깊은지라 마을 골목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에르셈프가 가리킨 곳에는 유일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마법 상점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팔의 상처는 꽤 깊었는지 피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진짜 드럽게도 아프군.
에르셈프는 나를 부축하려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의 손길을 떼어 냈다.
아까부터 몸이 붙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굳이 부축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안 잡아 줘도 충분히 걸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가끔씩 휘청거릴 때마다 에르셈프는 몸을 붙잡아 주려고 했다.
“…그러면 내 앞길을 막지 말던가.”
“…….”
안 그래도 피를 많이 흘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에르셈프가 계속해서 틱틱 대니까 더 이상 대꾸할 힘이 없었다.
딸랑.
그렇게 우리는 주황색의 따뜻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마법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에르셈프가 먼저 가판대 앞으로 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여전히 팔을 감싸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혈제나 진통제 종류의 포션을 좀 주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느꼈다. 분명 엄청나게 익숙한 목소리라고.
에르셈프는 포션을 받아 들고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팔 줘 봐.”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나는 에르셈프의 손길을 거절하며 지혈제를 받아 들었다.
뚜껑을 따고 약을 팔에 바르려는데, 자꾸만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자꾸만 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 건 순식간이었다.
설마!
빠르게 내 머릿속을 때려 오는 정보의 나열.
나는 풍성하게 부푼 짙은 갈색 머리를 한 남자를 보며 얼어붙고 말았다.
여기서 만나게 된다고?
어째서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러스트 속 남자.
하지만 기존의 스토리 정보와는 달랐기에 예상하지 못한 만남.
레, 레크리드…….
그는 내가 만나게 될 남자들 중 네 번째.
제4 남자 주인공.
레크리드 니엘이었다.
저 멀리서 골드를 세며 가판대 앞에 서 있는 그를 쳐다보자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곧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떠오르는 익숙한 글자들.
+
이름: 레크리드 니엘
나이: 16
직위: 매그넘 마법 상점의 주인
호감도: 0%
+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며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와는 이렇게 만날 운명이 아니었다.
예정된 만남은……. 곧 있으면 시작되는 학교 행사에서 물품을 팔러 온 레크리드와 마주치며 시작되는 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으니까. 이렇게 길거리의 마법 상점에서 마주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는 거다.
선한 인상의 그가 의아한 듯 눈을 뜨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여기서 만나게 되었지?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레크리드가 비젠티아 아카데미와 협력을 맺어 물품을 지원하고 판매하러 오는 사업을 학교에서 진행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나게 된다는 것은, 아직 그가 학교에 물건을 팔러 들어오기 전의 시간대이고, 나는 그를 예정보다 일찍 마주친 것이라는 거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눈앞에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가판대 앞에 서 있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게임은 일러스트 반영을 참 잘해 주는구나. 그 점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그는 소년과 남자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법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 마치 강아지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 하지만 마냥 귀여운 건 아니었다. 여러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그는 때론 남자다웠고, 때로는 붙임성 좋은 소년 같았다. 그림같이 잘생긴 외모에 나는 잠시 시선을 빼앗겨 감상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레크리드가 말을 걸었다.
그는 내 깊은 상처를 보았는지 약간 놀란 것 같았다.
“많이 다치셨군요. 의자를 드릴게요”
레크리드는 우리에게 앉으라며 간이 의자 두 개를 놓아 주었다.
내 옆에 앉은 에르셈프는 자연스럽게 붕대를 꺼내더니 내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감아 줄게.”
“아니에요, 에르셈프. 제가 하는 게 편해요. 주세요.”
나는 몇 번이나 그를 거절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잠시 멈칫하더니 붕대를 건네주었다.
에르셈프에게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자잘한 도움을 받는다면 금세 거리가 가까워질 것 같았다.
호감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한 손으로 낑낑대며 혼자 붕대를 감았다.
생각보다 피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아프기는 또 눈물 나게 아팠다.
진통제 포션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이 듣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는지 고통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레크리드가 가판대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포션을 드시더라도 꼭 병원에 가 보세요. 칼에 베인 거라면 상처가 감염될 수 있으니까요.”
따뜻한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말을 하는 그는 어딘가 형식적인 느낌이 났다.
호감도가 0%라서 그런 것일 터다.
그의 모습은 상점을 지나가는 손님에게 하는 태도와 다를 게 없었다.
“감사합니다.”
레크리드는 가판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텅 빈 눈동자로 턱을 괴었다.
손님 없는 가게를 지켜야 하는 것이 지겹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북쪽에서 오셨죠? 그곳은 어떤가요?”
“네? 북쪽이라뇨?”
내가 그를 향해 되물었다.
“북쪽에서 오신 모험가분 아니세요? 오늘 대거로 내려오셨던데.”
“아, 아니에요. 학생이거든요.”
내가 엉성하게 감은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비젠티아 아카데미에 다니시는구나.”
“네, 맞아요.”
“학생분이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다니시다니, 의외네요. 사정이 있으셨나 봐요.”
그는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든 때우려는 심정으로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해 진짜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았고, 단지 심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이렇게 팔도 다치고, 꼴이 말이 아니네요.”
그러자 레크리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처를 한번 봐 드릴까요?”
“네?”
“여기저기 모험가분들을 많이 본지라 웬만한 응급 치료는 할 줄 알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을 내뱉으면서 이미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멈추지 않는 피와 계속해서 몰려오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줄 수 있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20cm가량 길고 깊게 팬 상처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소독을 하고 꿰매 드릴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래 봬도 손재주가 좋으니까요.”
그는 마치 재미난 일이 생겨 신이 난 사람처럼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다쳤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아까 보았던 레크리드의 텅 빈 눈동자가 생각나서 그러려니 했다.
그는 구석에서 소독약과 여러 도구를 찾더니,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에르셈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왕자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괜찮아요. 금방 끝나니까.”
에르셈프는 여전한 표정으로 나와 레크리드를 쳐다볼 뿐이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아플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그가 소독약을 내 상처에 부었다.
“아아……!”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내 팔 전체를 감싸고 쥐어짰다.
“많이 아프죠.”
그의 말투는 마치 동네 의사 선생님 같았다. 신경을 쓰는 듯하지만 형식적인 느낌의 태도. 하지만 오히려 잰퓨어처럼 능구렁이 같이 다가오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아, 아파서 죽을 것 같고 너무 좋아요.”
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레크리드는 이내 바늘과 실을 꺼내 들었다.
얇은 의료용 실을 바늘에 꿴 그는 내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살에 바늘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느낌이 너무나도 소름이 끼쳐 그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나을 거예요.”
레크리드가 나를 향해 말했다.
몇 분이 지나고, 꼼꼼하게 상처를 꿰맨 그가 매듭을 지었다.
그제야 상처를 보니 확실히 벌어진 상처가 다물어져 있는 게 응급 처치가 잘 된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씩 소독해 주고, 일주일 정도 있다가 병원에 가서 실밥을 풀면 될 거예요.”
그가 내 팔을 잡고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감사합니다…….”
줄줄 흐르던 피가 멈추자 나는 그제야 표정을 풀 수 있었다.
레크리드는 달그락거리며 도구들을 정리한 뒤, 가판대 위쪽으로 올라가 또다시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뭐지?
나는 갑자기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의문스러웠다.
“…….”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이리저리 훑었고,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보통 칼이 아니네요.”
나는 그의 말에 몸이 우뚝 멈추었다.
뭐지? 내 칼에 샐라임이 들어 있다는 걸 아는 건가?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사실인데, 어떻게 아는 거지?
나는 그의 눈썰미에 놀라며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리죠?”
그러자 레크리드가 푸흣, 하고 웃었다.
무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입술이 갑자기 포물선을 그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짧게 내뱉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에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가 이어 말했다.
“별로 티 안 나요.”
“……!”
분명 알고 있는 거다.
샐라임이 갇혀 있다는 것을.
숨길 일은 아니기 때문에 전혀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샐라임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단서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무언가라도 물어볼 생각으로 그를 향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어서 오세요.”
새로운 손님의 등장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잔뜩 더러워진 옷을 입은 꾀죄죄한 손님은 레크리드를 향해 포션을 요구했다.
“…….”
나는 간이 의자에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엄청난 서비스업 전문가의 표정이 드러났다.
눈은 가만히 둔 채 입만 웃는 미소.
나도 전생에 아르바이트를 해 봐서 공감이 갔다.
레크리드가 진심으로 웃을 땐 참 예뻤는데. 게임 속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와의 엔딩이 이어서 떠올랐다.
레크리드 루트의 엔딩.
그건 바로…….
상사병으로 인한 사망이다.
어처구니없는 엔딩에 헛웃음을 지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레크리드와 엔딩을 맺을 경우 소소하고 행복한 여생을 맞이할 것 같지만 완전 오산이었다.
평생의 소원을 풀기 위해 여행을 나선다는 레크리드 때문에 여주인공은 집에서 혼자 그를 기다리다가 시름시름 앓게 된다.
아니, 행복한 엔딩 좀 맞이하게 해 주면 어디가 덧나?
하지만 게임 회사는 무자비했고, 그렇게 1탄의 여주인공을 상사병으로 죽여 버린다.
다섯 남자 주인공들이 있는 이 세계관에 새로운 여자 주인공을 투입하고 싶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2탄은 루이아나를 그리워하며 아픔을 지닌 남주인공들을 새로운 여주인공이 치유해 주며 가까워지게 되는 스토리다.
물론 게임은 처참히 망해 버렸지. 아주 꼴좋다.
어찌 되었든, 저렇게 순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의 레크리드이지만, 그의 호감도를 올리는 순간 나는 상사병에 걸릴 위험에 처한다는 거다.
내가 레크리드를 좋아하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로서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맞았다.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에르셈프와 이어지면 전쟁이 일어나서 죽고, 레크리드와 이어지면 상사병으로 죽는다니.
절망스럽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나갈 계획이 있으니 괜찮다.
세이먼을 제외하면 다른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도 낮은 편에 속하고, 게다가 내 곁에는 샐라임이 있으니 앞으로 실력을 키워서 이 게임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내면 된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
끙.
나는 매 순간 나를 감싸 오는 불안감에 지지 않으려 의지를 다잡았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에르셈프를 쳐다보았다.
이제 상처도 치료했고, 아카데미로만 돌아가면 되는데, 아까부터 에르셈프의 표정이 안 좋았다.
미간을 깊게 좁히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데, 무언가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완전 싹수없던 에르셈프가 떠오를 정도였다.
나는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자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에르셈프가 입을 열었다.
“고집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