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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38)화 (38/156)
  • 37화. 드러나는 속마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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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 호감도 퀘스트

    제목: ‘드러나는 속마음’

    내용: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인 ‘세이먼 유리츠.’ 그에게서 애정 어린 포옹을 받아 내시오.

    제한 시간: 6시간

    보상: 1회 페널티 면제권

    페널티: ‘누군가’의 살인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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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도 안 돼.

    지금 내가 본 게 맞는 건지, 잘못 본 건 아닌지 계속해서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잘 못 본 게 아니라는 거다.

    나는 속으로 탄식이 나왔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애정 어린 포옹이라니.

    그것도 ‘해 주시오’도 아니고 ‘받아 내시오’다.

    내가 그에게 포옹을 해 주는 것도 문제였지만 받아 내는 건 더 문제였다.

    세이먼이 나에게 고백을 한 현시점에서 서로 포옹을 하는 것은 고백을 받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페널티가 살인 표적?

    지금 죽지 않기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데 이 퀘스트를 깨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살인의 표적이 된단 말이야?

    정신이 나간 나머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는데,

    “루나……?”

    세이먼의 목소리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가까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작게 떨리며 나를 향하고 있었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를 집착하는 상대에게서 포옹을 받아 낸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살인 표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며 호감도를 올리지 않으려고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아무런 가치가 없던 짓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보상. 1회 페널티 면제권.

    아주 혹하는 보상이었다.

    앞으로도 어떤 퀘스트와 페널티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따내야만 했다.

    지금과 같이 내 뒤통수를 때려 버리는 퀘스트가 또 나올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

    나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집착을 하는 그에게서 포옹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

    * * *

    그 시각.

    잰퓨어는 첫 임무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며칠 내리 비를 맞았기에 몸은 아주 찝찝했고 자칫하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씻으면서 임무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관심이 가던 루나와 함께 임무를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설레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요새 참 이상해.”

    사실 잰퓨어는 주변에 여자가 넘치는 성격이었다.

    여자에게 조금만 관심이 가도 성큼 들이대고, 쉽사리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 습관의 타깃이 된 건 루나였다.

    처음엔 단지 외모에 눈길이 가서 다가갔다.

    은발의 머리도, 분홍빛 눈동자도, 신비로워 보이는 외관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잰퓨어에게 ‘연인’이란 그저 가벼운 존재였다.

    그리고 이번엔 그 존재가 루나가 되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비젠티아 아카데미에서 연인을 만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루나와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던 거다.

    원래라면 그녀와 친구를 하지 않고 바로 이성으로서 다가갔을 텐데, 그녀가 하도 친구가 되길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면 되니까. 큰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들이댈 때마다 칼같이 선을 긋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것이었다.

    연인이라는 게 뭐 그리 깊은 관계도 아니고, 관심이 가는 상대끼리 서로를 알아 가다가 재미없으면 헤어지는 것 정도 아닌가?

    “…흐음.”

    그런데 요새 잰퓨어는 자신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원래의 가벼운 관계를 선호하던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루나에게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진심 어린 마음을 내밀고 싶었다.

    웬만해선 입에 담지도 않는 에리피아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을뿐더러, 이유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여자 친구를 사귀어 왔던 그에겐 처음 느끼는 낯선 감정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잰퓨어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연인 좋지. 그런데 그 이상은 아냐.”

    루나가 궁금하고, 또 지켜 주고 싶은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연인으로서의 역할일 뿐이다.

    남자 친구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도 연애의 일부니까.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너무 설레발이군.”

    그는 이미 자신이 루나와 사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쳤다.

    그치만 루나를 향한 감정이 가볍든, 무겁든, 확실한 건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사실이었다.

    “재미있긴 해.”

    임무 중에 정령을 자유롭게 부리던 것도, 고블린의 소굴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던 것도 전부 매력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샤워를 마친 그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안 건 바로 직후였다.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이다.

    “입을 게 없잖아?”

    비젠티아에 오기 전에 총 다섯 개의 짐을 부쳤었는데, 아직 한 개의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여벌의 옷이 부족했고, 당장 입을 옷이 없었다.

    “이런…….”

    난처해진 그는 어쩔 수 없이 임무를 나갔을 때 입었던 셔츠를 걸쳤다.

    아마도 본관에 가서 짐의 행방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무언가 착오가 있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일 테다.

    “학생회실에 가 보면 되겠지.”

    교류회에 관해서는 자신에게 물어봐 달라던 세이먼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옷을 마저 걸친 채 빠르게 방을 나섰다.

    * * *

    넓은 대련장에서 에르셈프는 혼자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련 직후, 선생님이 부르는 탓에 다른 학생들이 다 집에 갈 때까지 시간을 뺏긴 탓이었다.

    그는 세심하게 롱 소드를 닦아 검집에 넣었고, 팔과 무릎에 찬 보호구도 벗어 가방 안에 넣었다.

    “음……?”

    차곡차곡 가방을 싸고 있었는데, 구석에 놓인 장갑의 모양새가 낯설었다.

    그는 철제로 된 장갑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세이먼의 것인가……?”

    장갑 끝에 ‘세이먼 유리츠’의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장갑 한 쪽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검법과의 대련장엔 사물함이 없기 때문에 짐을 각각 보관할 수 없었다. 다들 한 곳에 짐을 몰아 넣다 보니 이렇게 물건이 바뀌는 경우는 허다했다.

    “정말 귀찮게 만드는군.”

    에르셈프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투덜댔다.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검법 수업이 휴강이라 세이먼을 만나려면 다음 주는 되어야 했다. 그때까지 자신의 장갑을 쓸 수 없다는 건 검술 연습에 차질이 생긴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물론 그에게 장갑은 수없이 많지만, 최근 들어 손에 익은 것을 사용하고 싶었다. 검술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만큼, 물품에 대한 선택도 까다로웠다. 에르셈프는 아직 세이먼이 학교에 있을 거란 생각에 가방을 챙겨 학생회실로 향했다.

    본관에 다다라 계단을 오르려고 했을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에르셈프 왕자님?!”

    뒤를 보니 빨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한 여자가 있었다.

    누구지?

    이름도 모르고, 처음 보는 여자 같았다.

    에르셈프가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좁히자, 여자가 입을 열었다.

    “같은 검법A반인 카브리나입니다. 몇 번 같은 팀이 되기도 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시는지요?”

    “…아.”

    에르셈프는 짧게 소리를 내며 깨달았다. 빨간 머리를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팀을 구성하여 진행했던 수업 당시, 그녀의 검술 실력이 형편 없어 자신이 대신 나섰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 절 구해 주신 것 너무 감사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나서 주셔서…….”

    에르셈프는 눈썹을 치켜떴다.

    구해 준 것? 누가 누굴 구했다는 거지?

    착각이 심한 녀석인가 보군.

    에르셈프가 눈짓으로 인사를 받고는 등을 돌려 가던 길을 가려고 했을 때였다.

    “어디에 가십니까?”

    카브리나가 제 머리카락처럼 볼을 빨갛게 붉힌 채로 에르셈프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순간적으로 에르셈프는 인상을 확 구기며 몸을 뒤로 내뺐다.

    타인에게 확실히 거리를 두는 그에겐 이렇게 훅 들어오는 것이란 불쾌 그 자체였다.

    “학생회실.”

    에르셈프는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는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고, 손을 들어 올려 더 이상 건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군요. 저는 교무실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이 같은데…….”

    카브리나는 에르셈프와 친해지고 싶은 듯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에르셈프의 무뚝뚝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에르셈프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나한테 볼일이 있나?”

    에르셈프는 날카로운 눈매로 카브리나에게 말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카브리나는 당황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왜 말을 거는 거지? 난 쓸데없이 말 거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

    “네? 그건, 그게 아니라…….”

    카브리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듬자 에르셈프가 몇 마디 더 얹었다.

    “혼자 가고 싶으니 더 이상 말 걸지 마.”

    “…네, 네?”

    “가는 길이 같다면 뒤에서 걸으면 되잖아.”

    후우.

    에르셈프는 말을 끝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르는 상대에게 이렇게 길게 말을 해 주다니.

    ‘나도 참 많이 나아졌군.’

    그는 그녀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뒤 등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카브리나는 얼어붙은 채로 계단에 서 있을 뿐이었고, 에르셈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그는, 학생회실 앞에 다다랐다.

    * * *

    여전히 나는 세이먼과 단둘이 학생회실 안에 있었다.

    내 앞엔 그가 서 있었고,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포옹을 받아 내야 한다.

    그리고 포옹을 받아 내더라도 호감도를 최소한으로 올려야 한다.

    호감도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존재하니까 어떻게든 호감도를 최소한으로만 올려서 나중에 수를 쓰든가 해야 한다.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것도, 입술을 깨물던 것도, 주먹을 꽉 쥐던 것도 모두 멈추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포옹을 받아 내는 것에는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 내가 택한 방법은…….

    “겁이 나요. 세이먼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를 가두려 하는 것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전부 다 너무 무서워요.”

    ‘달아나려는 토끼’ 전략이다.

    호랑이는 토끼 정도는 자신의 손안에 쉽게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을 뻗어서 움켜쥐기만 하면 바로 탐스러운 먹잇감이 될 것이니까.

    “제가… 무섭다고요?”

    “비켜 줘요. 저는 세이먼과 사랑을 약속한 적 없어요.”

    하지만 그러한 먹잇감이 달아나려 한다면?

    “약속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저 제 옆에만 있어 주면 되는 건데.”

    “마음에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루나. 당신이 나 말고 사랑할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죠?”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토끼는 그리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중 한 마리가 혼자서 도망을 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시, 달아나려는 먹잇감이 더 탐스러워 보이는 법.

    감히 도망을 허용하지 않는 호랑이는,

    “루나, 정신 차려요. 현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발톱을 뻗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틀며 다시금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이 무섭다고,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붙잡힐 것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한다. 손만 뻗으면 나를 잡아챌 수 있을 것 같은 우월감을 주는 거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다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그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고,

    “…….”

    내가 한 번 더 시선을 올려 그를 쳐다보자,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던 그가 몸을 움직인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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