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37)화 (37/156)
  • 36화. 드러나는 속마음(1)

    나는 내가 정령술사라는 것에 감사했다. 샐러맨더를 부려 잰퓨어와 첸테 선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잰퓨어와 첸테 선배 또한 나를 찾으려 운디네와 놈을 보냈었지만 그 행동은 마력을 너무 많이 앗아 가는 탓에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끄떡없었다!

    절벽 위로 올라간 샐러맨더는 금세 잰퓨어와 첸테 선배가 숨어 있는 숲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나에게 돌아온 샐러맨더는 길을 알려 주었다. 물론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진 만큼 그들에게 가기 위해 오랫동안 걸어야 했지만 말이다.

    잰퓨어는 거지꼴로 도착한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작고 여린 애를 고블린 소굴로 보냈다니……. 난 쓰레기야.”

    자책하는 잰퓨어를 다독이며 우리는 게이트로 향했고, 긴 시간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 큰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되어 있는 이 게이트는 연결된 장소로 워프할 수 있는 장치였다.

    차례차례 게이트에 진입했고,

    슈우우-

    우리는 비젠티아 아카데미가 위치한 테일러 마을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이다.”

    간만에 도착하는 아카데미는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흐으…….”

    이번 임무는 D등급인 데다가 우리에게 부여된 첫 번째 모험이었다.

    그만큼 부담도 컸고, 돌발 상황이 많았기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첫 임무를 완벽하게 해결해 냈다는 생각에 우리는 모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임무 완료 신고만 하면 돼.”

    임무를 시작할 시 받았던 스크롤을 학생회실에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때, 첸테 선배가 웬일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막내가 하는 걸로?”

    그 말을 들은 나는 스크롤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 * *

    루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시각,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검법A반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대련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우연찮게 세이먼과 에르셈프가 상대가 되어 맞붙는 날이었다.

    왕실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에르셈프와 수석으로 입학해 쭉 일등을 유지하는 세이먼의 대결.

    사실상 에르셈프는 라인하르트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의 실력자였기 때문에 세이먼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셈프는 매번 대련을 할 때마다 기본을 다지듯이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합을 맞추어 주곤 했다.

    그래도 상대가 세이먼인지라 학생들은 다들 기대가 되는지 숨을 죽이고 둘을 바라보았다.

    기세 좋게 먼저 달려든 쪽은 세이먼이었다. 다부진 몸과 잘 다듬어진 근육은 세이먼을 날렵하게 움직이게 해 주었다.

    탕!

    에르셈프의 검과 세이먼의 검이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둘 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검을 휘둘렀다.

    세이먼은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눈빛으로 에르셈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겁고, 강렬했다.

    “왕자님의 한낱 치기 어린 장난은 그만두시지요.”

    “지금 나에게 명령을 하는 건가?”

    에르셈프는 애초에 사람을 대할 때 친절한 편이 아니었다.

    상대가 평민이라면 대놓고 하대를 했다. 아예 경멸하는 수준으로 볼 수 있었다.

    귀족이라면 그나마 예의를 차려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도 에르셈프 기준이지, 상대는 모욕감을 느끼기 일쑤였다.

    게다가 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에르셈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괜한 사람 들쑤셔서 상처를 주지 말란 말입니다.”

    하지만 세이먼은 그것에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자신의 세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그러는 자네야말로, 학생회장이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옥죄고 있는 건 아닌가?”

    표정을 구겼던 에르셈프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예전부터 세이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학생회장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그녀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것 아니냐고.

    파르르르.

    두 개의 대검이 공중에서 교차하며 힘을 겨루었다. 두 쪽 다 칼이 부서질 듯이 강한 힘이었다.

    “저만큼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순수? 최근에 들었던 말 중 가장 웃기군. 자기 자신을 파악 못 하는 것도 병이라던데.”

    “사내답지 못하게 말꼬리를 잡으시는군요.”

    “검은 속내부터 가리고 말해. 도저히 못 봐 줄 처지니까.”

    둘 다 힘이 만만치 않은지라 그 누구도 밀리지 않았고, 결국 둘 다 검을 튕겨 내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탁.

    세이먼이 가볍게 땅을 디디며 입을 열었다.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에르셈프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 웃기는 말을 하는군.”

    “…….”

    챙! 탕!

    다시 한번 그들의 검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날을 세웠다가, 찔렀다가, 공중에서 교차까지하는 칼날은 자칫하다간 부상으로 이어질 정도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마음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뻔한 싸움은 체력 소모일 뿐이니까요.”

    “애초에 생각도 없었어.”

    그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어머니가 죽은 후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후로, 왕실에서 온갖 무시를 당한 이후로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이다.

    사랑이란 것은 불신 그 자체라고.

    과거의 기억은 모두 지웠다. 앞으로 사랑이란 그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받지 않아도, 주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짜 감정.

    그런 가치 없는 감정 따위로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

    그녀를 향한 마음은…….

    그래, 그저 고마움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구해 주고, 보듬어 준 것에 대한 감사 정도. 거기에 호기심이 조금 추가된 것뿐이다.

    그 이외의 감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이 밥을 먹게 되었을 때도 세이먼이 하도 루나에게 관심을 보이길래 재미 삼아 질투를 유발한 것일 뿐이다.

    “사랑싸움 같은 거 시답지도 않아.”

    에르셈프가 입꼬리를 비틀며 내뱉었다. 감정에 매몰된 세이먼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세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 마음, 변치 마시길 바랍니다.”

    낮은 음성이 마치 으르렁거리는 짐승과 같았다.

    “저는 제 것을 건드리는 사람을 가만 둘 만큼 자비가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경고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는 욕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제 것에 손대는 걸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애원할 때까지 물고 늘어져 찢어 갈길 성격이었다.

    그리고, 루나는 처음부터 제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순리와 같은 것이었고,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설사 그녀가 망가질지라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줄 생각은 없다.

    “돌아 버리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걸.”

    에르셈프가 쿡쿡 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저렇게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쁜 마음에 골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가 궁금한 건 사실이긴 했다.

    그저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겠지만.

    “장난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이먼은 검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항상 따스한 줄만 알았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얼음처럼 서늘한 파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만!”

    담당 선생의 대련 중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살인 사건 하나 나겠다. 얘들아, 눈에 살기 좀 풀어.”

    “…….”

    실력 양성을 위한 대련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혈투가 벌어질 것 같아 선생이 미리 제지한 것이었다.

    세이먼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인사를 했다.

    * * *

    학생회실에 가도 세이먼이 없자 나는 그 안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지친 나는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은 채 나가려던 참이었다.

    벌컥.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머리에 물기가 남은 축축한 모습으로 그가 들어왔다.

    “세이먼.”

    그는 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루나, 오랜만이에요.”

    이상하게 세이먼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가끔가다 보였던 날카로운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

    그리고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42%

    +

    42%.

    위험한 수치다.

    거의 반절에 가까워졌다는 거다.

    “세이먼, 임무 완료 신고를 하러 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네?”

    “옷에 피가 묻어 있네요.”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임무를 갔다 왔다고 들었어요. 다친 건 아니죠? 위험한 일은 없었나요? 충격을 받았다거나.”

    “아… 딱히.”

    “그 사람들이랑 너무 친해진 건 아닌 거죠? 쓸데없는 관계는 맺지 마요.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니니까.”

    쏟아지는 세이먼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질문의 내용이 이상했다.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네. 얕은 상처뿐이고 다른 곳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세이먼.”

    내 대답에 세이먼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나직하면서도 어딘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너무 걱정했어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루나가 위험에 빠질까 봐.”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이전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42%였던 것은 이전의 식당에서와 같다. 그런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지? 무엇이 그를 자극한 거지?

    나는 그를 가늘어진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을 툭 내뱉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 그래 봤자 가벼운 임무를 갔다 온 것뿐인데.”

    내가 들어도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아니, 누가 보면 세이먼에게 화풀이를 하냐고 물어볼 정도의 말투였으니까.

    세이먼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괜히 친절하게 굴어서 호감도를 올릴 수는 없다. 그러자, 세이먼이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미소를 머금는 평소와는 달리 오늘따라 쉽게 표정 변화가 드러났다. 그러고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푸른빛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이내 초조한 듯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

    내가 그의 대답에 당황한 나머지 잠시 별말을 하지 못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루나를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어요.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지금 무슨 말을…….”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구긴 세이먼이 내 옆으로 훌쩍 다가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귀에 자신의 입을 대고는 속삭였다.

    마치 은밀한 걸 묻는 듯, 작게 읊조리는 말투였다.

    귓가에 닿는 그의 숨결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곤두섰다.

    “그 사람들 하고는… 어떻게 지냈어요? 설마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건 아니죠? 내 여자가 남의 손 타는 건 정말 싫은데.”

    말을 내뱉으며 그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릿결을 파고들었고, 부서지듯이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알던 세이먼이 아닌 것 같았다.

    항상 친절하고, 남을 잘 챙겨 주는 세이먼이었는데,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친절하긴 했다. 나를 잘 챙겨 주긴 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이상하다는 말이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잡고 입을 열었다.

    선을 긋기 위해서였다.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저는 제가 알아서 몸조리 잘 할 수 있어요. 세이먼이 이렇게 다가오는 거, 저는 부담스러워요.”

    최대한 냉정하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내 얼굴 똑바로 보고 말해요, 루나.”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얼굴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주황색 노을빛이 물들었다. 여유롭게 시선을 내리깔던 그는 나른하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린아이를 회유하는 듯한 부드럽고 안락한 말투, 하지만 나를 집어삼킬 듯한 욕망이 다분한 그의 언어 하나하나가 내 귀에 박혀 들어왔다.

    “…….”

    갑자기 바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마치 나를 협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루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저없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니.

    “아뇨, 지금까지 세이먼이 절 도와주려고 한 것 모두 고마웠어요. 하지만 앞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 나가고 싶어요.”

    그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가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루나, 정말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네?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아니, 그 표정은 미소가 아니었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두고 웃고 있는 짐승 같았다.

    “…아닐걸요. 잘 생각해 봐요.”

    세이먼은 무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나, 저는 루나한테 관심이 많아요. 가능하다면 항상 제 옆에 붙여 놓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고요. 그러니 절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거절한다면요?”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도망 못 가게 할 거니까.”

    세이먼은 확실히 이상했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얼굴과 키를 맞추었다.

    내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러자 세이먼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말했다.

    “놀랐어요?”

    “…….”

    “놀라지 말아요. 앞으로 계속 이럴 거니까.”

    세이먼이 이렇게 파격적으로 다가온 이상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말은…….

    “세이먼, 저는.”

    그때였다.

    단숨에 내 눈동자를 흔들리게 한 것은, 한순간에 내 목소리를 멈춰 버리게 한 것은.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의 음성이었다.

    귀를 울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시야에 뜬 알림창은 나의 모든 행동을 정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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