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첫 임무(1)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다.
아까 잰퓨어와 물탱크 뒤에서 바짝 붙어 있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가까이 느껴지던 그의 숨결,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
“아악.”
혼자서 소리를 내질렀다.
분명 중반까지는 잘 되었다.
잰퓨어를 만나러 가기 전에 샐라임과 세웠던 ‘잰퓨어 막기 프로젝트’를 그대로 실행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빙긋, 웃으며 내 말을 모두 받아치는 것은 물론이요, 내가 말하려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경비원의 등장으로 뜻밖의 긴장감이 도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때는 호감도가 오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죠?”
잰퓨어는 내가 막 대해서 그렇지, 사실상 엄청나게 괜찮은 남자 부류에 속했다.
보기 드문 녹안을 가지고 있었으며 슬림한 라인의 몸매가 참 괜찮은 편이었다.
게다가 그가 매일 걸치고 다니는 흰색 셔츠는 기가 막히게도 잘 어울렸고 왠지 모를 섹시함까지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잰퓨어는 그만큼 매력 있는 상대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앞에서는 정반대로 말했지만.
그런 그가 나에게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며 다가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절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향한 마음과 비슷했다.
누가 봐도 멋있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엄청 매력적이라는 것.
그 정도였다.
다만, 물탱크 뒤에 숨었던 것처럼 스킨십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사람이란 말이야…….
침대에 머리를 꽝꽝 박았다.
루나. 정신 차려야 해.
절대 마음을 줘선 안 된다고.
이게 설마 입덕 부정기는 아니겠지?
“잰퓨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알겠더라. 네 말을 들어 먹질 않던데?”
샐라임이 침대에 엎어져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 주는 것이었다.
“그쵸?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지.”
에르셈프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도움되는 일만 해 주고는 있지만, 그도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타입이었다.
고집이 세서 내가 싫다고 거부를 해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게끔 만들었다.
게다가 왕족이라는 점이 그의 말을 잘 거부하질 못하게 만들었으니.
세이먼은 그래도 좀 나았다.
내가 말하면 알겠다고 하는 편이긴 하니.
하지만 세이먼은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준 만큼 내가 모질게 굴기가 힘들었다.
저번에 학교에서 퇴출당할 뻔했을 때 절실히 느꼈다.
세이먼을 옆에 두는 게 내가 살아가는 것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말이다.
“공략하는 것보다 공략하지 않는 게 더 힘들다니.”
본 게임에서처럼 남주인공을 공략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남주인공의 취향을 파악해서 그것대로만 행동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공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주인공의 취향을 파악한 뒤 그것과 정반대로 행동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도 다른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잰퓨어의 호감도가 벌써 15%에 달했다.
그리 높은 숫자는 아니지만 잰퓨어는 호감도가 올라갈수록 애정 표현이 솟구치듯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골치 아플 것이 분명했다.
“이런 미친 게임아…….”
나는 머리를 싸맨 채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
* * *
나는 첫 임무 제도를 시작하는 정령술과 수업에 들어갔다.
앞으로는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펠리엇의 말에 학생들은 전부 운동장에 팀별로 나뉘어 서 있었다.
나는 G팀으로 향했고, 그곳엔 첸테 선배와 잰퓨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첸테 선배는 대충 받아 주었고, 잰퓨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
이상하게 어제 일이 생각나 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잰퓨어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고, 그걸 본 첸테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야, 둘이 벌써 말 튼 거야?”
“하하, 어쩌다 보니까요.”
잰퓨어가 사람 좋은 웃음을 날리며 대답했다.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그때 첸테 선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왔다. 딱 봐도 잘 어울리는 남녀 한 쌍이 하루 만에 말을 놓았다고 하니 무슨 관계라도 있나 의심하는 것이었다.
내가 선배를 향해 꽥 소리쳤다.
“선배, 무슨! 사귄다니요!”
사색이 되어 소리를 치자 잰퓨어가 작게 웃음 지었다.
“원래 연인은 다 친구 사이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너 조용히 안 해?!”
내가 잰퓨어를 향해 으름장을 놓자 그가 알겠다며 입을 다무는 흉내를 내보였다.
“아니면 말고.”
첸테 선배 또한 눈썹을 찡긋거릴 뿐이었다.
같은 반이 된다는 건 이게 정말 안 좋았다.
사람들은 남녀가 좀만 묘한 기류가 있어도 바로 엮으니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하.
수업은 왜 안 시작하는 거야.
가뜩이나 머리도 심란해 죽겠구만.
눈을 매섭게 뜨며 펠리엇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곧이어 펠리엇이 도착했고, 그는 이미 팀별로 나눠 서 있는 우리를 보며 감탄했다.
“너희들의 첫 임무를 나눠 주마!”
첸테 선배가 앞으로 나가 G팀의 임무 스크롤을 받아 왔고, 우리 셋은 모여서 스크롤을 열어 보았다.
+
정령술과 G팀 첫 번째 임무.
등급: D
내용: 레인타운 마을에 있는 서쪽의 숲으로 들어가 고블린을 퇴치하고 그들의 서식지에 있는 ‘마인의 자루’를 가져오시오.
+
스크롤엔 임무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론으로만 배운 내용에 대한 실전 경험을 위해 부여되는 임무인 만큼 실제 모험가들이 받는 임무와 거의 비슷했다.
물론 난이도는 훨씬 떨어지게 조정을 해 놓았겠지만.
펠리엇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다른 팀들은 다 E~F등급이지만 너희들은 특별히! D등급 임무다. 일 학년이 있다고 하지만 무려 슈퍼 루키니까. 첸테 네가 잘 이끌도록.”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첸테 선배는 펠리엇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금 나한테 슈퍼 루키라고 한 거지?
내가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입단 테스트를 제외하면 전투 경험은 전무하지만 이제 샐러맨더를 부를 줄 아니 괜찮을 거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끄덕이며 임무를 수행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샐라임의 말로는 나는 아직 걸음마도 못 배운 아기 같은 상태라고 했다. 그러니 내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정령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이 임무부터 달성하는 것이 목표고.
“순간 이동 마법을 걸어 주마.”
펠리엇은 금세 마지막 팀인 우리 팀으로 다가왔다.
손에 빛나는 결정 하나를 쥔 채 주문을 영창한 그는 곧이어 일렁이는 문 하나를 만들어 냈고,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명했다.
“잘 갔다 오거라. 성공하길 비마.”
그렇게 우리는 한 명씩 천천히 레인타운 마을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갔다.
* * *
문을 향해 들어가자마자 몸이 빙그르르 돌았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곳은 세상 처음 보는 짙은 어둠이 깔린 마을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아직 시간이 이른데도 불구하고 해가 져 버려 어두컴컴했다.
“레인타운 마을은 닷새에 나흘은 비가 오기로 유명한 곳이야. 해가 금방 지고 밤이 기니 시간을 잘 분배해서 거처를 준비해야 해.”
역시 사 학년 짬밥이 있는 첸테 선배가 레인타운에 들어오자마자 말해 주었다.
나는 정말로 RPG 게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벙쪄 있었다.
그때, 처음 듣는 시스템의 알림창이 내려왔다.
“?!”
[상태창이 활성화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
이름: 루이아나 밀리센트
나이: 16
직업: 견습 정령술사
보유 스킬:
-패시브: 검술 Lv.5, 체술 Lv.2, 정령술 Lv.1
-액티브: 보유 스킬 없음.
호감도:
-세이먼 유리츠: 42%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26%
-잰퓨어 이브: 15%
+
나에 대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내 능력치와 호감도 현황을 알려 주는 상태창이었다.
말도 안 돼.
미연시 게임에서 RPG 게임까지 다 되잖아?
그런데…….
보유 스킬이 참으로 처참하구나.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스킬의 레벨조차 한 자릿수에 불과하고 액티브 스킬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원래 주인공은 처음부터 스킬 빵빵하게 갖고 태어나는 거 아닌가?!
물론, 내가 마나가 엄청 많다고는 하지만, 스킬이 없으면 무용지물인데!
그렇게 호소하고 싶었지만 이 게임은 미연시 게임이었다. 나는 미연시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이고, 그 속에서 RPG 게임이 일어나는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호감도는 내가 일일이 남주인공들을 바라보며 확인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는 스킬창을 끈 뒤 첸테 선배와 잰퓨어와 함께 길을 나섰다.
현재 시각은 오후 한 시.
첸테 선배의 말에 의하면 여섯 시만 되어도 아주 깜깜해지니 그때는 잘 곳을 찾아서 불을 피워야 한다고 했다.
“그 전에 서쪽 숲까지 갈 수 있을까요?”
“지도상으로는 시간이 나와 있지 않아 가늠할 수가 없어. 평지를 쭉 걷기만 하면 되니까 생각보다 금방 갈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지. 변수가 있을지도.”
잰퓨어의 질문에 첸테 선배가 대답했고, 나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비는 꽤 많이 내렸고 우리는 로브 모자를 뒤집어쓴 채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경사가 없는 평지인데도 진흙이 질퍽거리는 탓에 걷는 것이 힘들었다.
그나마 ‘마술사의 군화’를 신은 덕에 다른 사람들보다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루나 너 움직임이 좋은걸.”
잰퓨어가 옆에서 발을 맞추며 말을 걸어왔다.
비가 내리는 탓에 그의 머리는 흠뻑 젖어 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곳엔 전생과 달리 우산이 없었다.
그냥 비가 오면 맞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야말로 로브가 튼튼해 보이는데.”
“바꿔 줄까? 내 거 대신 걸칠래?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루나.”
“…됐어.”
나는 짧게 거절했다.
그의 호의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받아서도 안 되었다.
그리고 나를 약한 사람 취급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여자라느니, 약하다느니 이런 이유로 남자의 호의를 받고 싶지 않다는 거다.
나는 충분히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힘이 있었다.
그나마 자신 있는 검술의 레벨이 5라는 것에 충격을 먹긴 했지만.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을까.
비는 그칠 기미를 안 보였고, 이따금씩 천둥 번개마저 쳤다.
“그러고 보니 첸테 선배는 무슨 정령을 다뤄요?”
“나는 대지의 정령.”
“대지면 정령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놈이라는 녀석을 다룰 수 있어. 땅을 뒤흔들거나 부술 수도 있고, 직접 공격을 가할 수도 있어. 다른 정령들에 비해 공격력이 약한 편이라 지형을 잘 이용해야 해.”
“그렇군요.”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서로의 체력을 생각해 그만두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곳은 학교와 달리 우릴 보호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선생님이 달려와 줄 수도 없다는 거야. 죽을 수 있는 가능성도 항상 있고.”
“첸테 씨. 너무 겁주지 말아요. 레인타운 자체가 으스스해서 그렇지 이번 임무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라고요.”
잰퓨어는 모자를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너는 바깥 임무를 많이 받아 봤지?”
“네. 엔리에타에서는 항상 임무를 통해 수련을 합니다. 레인타운에 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요.”
레인타운 마을은 서쪽 숲과 가장 인접해 있는 마을로 예비 모험가 학생들이 임무를 맡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꼽혔다.
잰퓨어와 말을 놓아서 그렇지,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이 학년이었다.
그리고 엔리에타는 비젠티아 아카데미보다 훨씬 입학 조건도 까다롭고 수업의 난이도도 높다고 했다.
자연스레 정령술에 실력이 있을 것이었다.
물의 정령과의 친화력이 좋다고 했으니 아마 정령을 다뤄 본 경험도 많을 것이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실전 경험이 없는 난 그들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엄호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때,
샤샥.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도 아닌 것이, 아주 가볍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첸테 선배가 잰퓨어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들었지?”
“네.”
샤샥.
우리가 걷는 무성한 숲속엔 나무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샤샥.
빠른 속도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리를 잡는 어떤 형체들.
정확히 볼 수는 없어도 파란색의 무언가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루나, 이리로 와.”
잰퓨어가 내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었다.
몬스터일까?
점점 우리를 둘러싸는 수가 많아졌고, 그들의 몸이 온통 파랬기에 우리는 파란 돔 안에 갇힌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때, 첸테 선배가 중얼거렸다.
“잰퓨어, 너는 루나를 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