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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31)화 (31/156)
  • 30화. 밤의 산책(1)

    저녁 식사도, 퀘스트도 무사히 마친 나는 아쉬워하는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보낸 뒤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세 번째 남주인공한테 먹여 줬다고?”

    샐라임에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자 그는 아주 흥미로워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퀘스트 내용이 남주인공을 특정하지 않아서 가능했어요. 처음에는 세이먼과 에르셈프만 생각했거든요.”

    “오, 꼬마 똑똑한걸.”

    “십 초 남기고 성공했어요. 샐라임, 저 이제 퀘스트만 보면 수명이 줄어들 것 같아요.”

    내가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 엎어졌다.

    그러자 샐라임이 작게 후후, 웃는 게 들렸다.

    “다음부터는 샐라임이랑 의논해야겠어요. 이러다간 머리가 다 빠져 버릴지도 몰라.”

    내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이템은 확인해 봤어?”

    샐라임의 말에 내가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무려 전설급 아이템을 부여받았다고 했다!

    나는 저번에 군화를 받았을 때처럼 옷장을 확인했다.

    오늘 총 두 개의 아이템을 부여받았기에 옷장에는 두 가지의 물품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깨진 우정의 펜던트’와 또 하나는 ‘타락한 천사의 의복’이었다.

    나는 하나하나 확인을 해 보았다.

    +

    이름: 깨진 우정의 펜던트

    등급: 서사급

    설명: 아주 진하게 빛나는 붉은색 보석이 눈에 띄는 펜던트다. 지니고 있을 시 같이 있는 상대의 애정도가 10% 증가한다. 상대가 여럿이 있을 경우엔 처음 본 상대에게만 적용된다.

    +

    “으어!”

    나는 설명을 읽자마자 펜던트를 원래 있던 자리로 던져 버렸다.

    애정도가 10% 증가한다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슨 이런 아이템을 줄 수 있어?!

    완전 엿 먹이는 거잖아!

    나는 보기만 해도 께름칙한 물건을 갖다 놓은 뒤, 다음 아이템을 읽어 보았다.

    이건 무려 전설급이었다.

    예전에 게임을 하던 기억이 생각나 아이템을 여는 것이 설레었다.

    +

    이름: 타락한 천사의 의복

    등급: 전설급

    설명: 이만 년 전 악마에 의해 타락한 천사 ‘탈리트’가 입던 전투용 숏 드레스다. 탁월한 심미성이 돋보이며, 보기와 다르게 방어력이 우월하다. 착용 시 공격력 증가와 마법 방어력 증가, 마나 소모량 감소 효과가 적용된다.

    +

    전설급 아이템은 무려 의복이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대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드레스는 투박한 전투용 의복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소재에 레이스가 달린 모양새였다.

    전투 시 불편하지 않도록 드레스의 길이는 짧았으며, 목까지 올라오는 하이칼라가 인상적이었다.

    원래 입던 드레스는 저택에서 살 당시 몇 개 없었던 옷들 중 가장 얇은 것이었다.

    여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절에 맞는 옷을 살 돈이 없었으며, 돈이 생겼을 때는 옷을 사러 갈 시간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의복이 생기다니! 완전 땡큐였다.

    나는 드레스를 착용했다.

    등 뒤에 달린 지퍼는 올리기 힘들었지만 겨우겨우 올려 입을 수 있었다.

    길이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드레스 밑에는 ‘마술사의 군화’인 롱부츠를 신어 종아리까지 보호되는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열심히 다 차려입은 뒤 샐라임을 향해 빙글, 돌면서 물었다.

    “어때요?”

    그러자 샐라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혹시 별로인가? 싶어서 거울에 가서 내 모습을 확인했다.

    “완전 예쁘잖아!”

    새하얀 은발과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드레스는 그림같이 잘 어울렸고, 정말 ‘타락한 천사’가 생각날 정도로 악마의 모습이 쓰인 천사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분홍빛 눈동자는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서 아름답게 빛내며 존재감을 돋보이고 있었고, 전체적인 이미지에 신비하고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거 입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때 샐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방금 입지 말라고 했나?

    “왜요? 이상해요?”

    내 눈엔 예쁜데, 남의 눈에는 아닌가 싶어 묻자 샐라임이 대답했다.

    “……요새 드레스 같지도 않고 옛날 거 같아. 촌스러워. 별로야.”

    “아니 이만 년 전 건데 당연히 요새 드레스 같지 않겠죠.”

    갑자기 날아오는 비난에 내가 당황하며 말하자 샐라임은 더욱 입을 삐죽대며 말했다.

    “이전 거가 더 예뻤어.”

    이전의 드레스는 정말 무난한 스퀘어 네크라인의 새하얀 면 소재의 드레스였다.

    이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하얀 탓에 빨래를 자주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효과가 죽여주잖아요. 공격력에 민첩, 마법 방어력까지!”

    나는 예쁘든 안 예쁘든 전설급 아이템을 옷장에 썩혀 둔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로브를 입어 다 가리게 되더라도 입는 게 맞았다.

    정령술과에선 곧 첫 임무가 시작된다.

    임무 시 전투가 일어날 수 있으니 내 스탯을 올릴 수 있는 아이템들은 모두 착용해야만 했다.

    ……저런 펜던트는 제외하고.

    다시 한번 ‘깨진 우정의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마름모꼴의 새빨간 색의 보석이 박힌 펜던트는 예쁘긴 했지만 효과가 너무나도 쓸모없었다.

    저건 나중에 시장에 갔을 때 갖다 팔아야지.

    그나저나 샐라임은 오늘따라 왜 저렇게 삐딱하지?

    자기는 칼에서 못 빠져나오는데 나만 아이템 획득해서 기분이 안 좋았나?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샐라임에게 미안해졌다.

    계약대로라면 샐라임이 칼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시장을 나다니며 수소문했어야 하는데, 시장에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 쉽게 행하지 못했다.

    샐라임은 그런 나에게 나중에 실력을 키워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때 수소문해 줘도 된다며 쿨하게 말했지만.

    “…….”

    나는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 * *

    아이템을 전부 확인한 나는 그제야 잰퓨어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정령을 통해 편지를 보내겠다는 말.

    정령을 그렇게 써먹어도 되는 거야?

    샐라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령과 친화력이 높으면 가능하지.”

    그리고 정령과 친하지 않으면 그런 부탁은 거절해 버린다고 말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잰퓨어는 마력량 테스트에서도 무려 이등을 한 장본인이었다.

    친화력이 높을수록 마력량이 높다고 했으니 잰퓨어의 친화력도 만만치 않게 높을 거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 기숙사 창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디네군.”

    창문을 열어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샐라임이 중얼거렸다.

    가까이 온 것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듯했다.

    끼익.

    내가 창문을 열자, 아름다운 여자 형상을 한 정령이 눈에 보였다.

    아주 투명하고 몸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정령은 나에게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전달했다.

    쪽지였다.

    ‘열 시에 다리에서 만나요.’

    짧게 쓰여 있었다.

    나에게 쪽지를 전달한 운디네는 금세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

    잰퓨어에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물의 정령을 다루는군.”

    샐라임이 중얼거렸다.

    투명한 액체같이 보이던 그것은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였다.

    “운디네가 너에게 거부감이 없는 걸로 보아 너도 운디네와 계약할 수 있겠는걸?”

    “종류가 다른 정령과도 계약이 가능한 거예요?”

    “물론이지. 하급 정령 정도는 쉽지만 그 이상은 아주 어려워서 중급 정령술사 정도는 되어야 해.”

    하급 정령을 다루는 사람은 하급 정령술사,

    중급 정령을 다루는 사람은 중급 정령술사라고 불렸다.

    다루는 정령의 등급과 부여받는 정령술사의 등급이 같다는 것이다.

    물론 등급끼리의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평생을 하급 정령술사로 사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했으니 말이다.

    “운디네와 계약할 수 있다니! 벌써부터 설레요!”

    “확실한 것은 아니야. 너는 불의 친화력이 강하니 물의 정령은 널 거부할 수도 있어.”

    그는 너무 확신하지 말라고 했고,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열 시에 다리에서 만나자는 잰퓨어의 제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잰퓨어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런 쪽지 따위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네 번째 호감도 퀘스트의 주의 사항이었다.

    주의 사항: 친구 관계가 파괴될 시 페널티 적용.

    혹여나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 경우 친구 관계가 깨질까 봐 걱정이 되어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밤에 나가기 싫다고 말을 했더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하지만 아까 식당에선 밤에 만나는 것이 좋다며 쿵짝을 맞추지 않았는가!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간은 금세 열 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예 나가지 않는 건 위험할 것 같아.”

    “펠리엇과 관계가 틀어지니까요?”

    “응. 그렇게 되면 앞으로 너의 과 생활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샐라임이 조언을 해 주었다. 일단 나가기는 하되, 학교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은 거절하고, 최소한 친구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그를 대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흐음…….”

    고민이 되었다.

    샐라임의 말대로 일단 나가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인 것은, 어떻게 하면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고 친구처럼 대하고 올 수 있느냐는 거다.

    잰퓨어는 계속해서 나에게 친구가 아닌 남자로서의 가능성을 어필했다. 친구 그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루나, 아무래도 네가 살아남으려면 연기력을 기를 필요가 있겠구나.”

    샐라임은 나에게 연기를 하라고 했다.

    무조건적으로 친구 같은 연기를!

    에르셈프 앞에서 한 일인극에 이어 이제는 드라마에 도전인 것인가.

    나는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나갈 준비를 마쳤다.

    * * *

    기숙사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온 뒤 계단을 타고 삼 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복도 끝의 비상구 문에 다다랐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걸림 없이 수월하게 문이 열렸다. 그가 미리 잠금장치를 풀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다리로 향했다.

    건물 사이에 있는 다리엔 바람이 많이 불었으며, 저 멀리 보이는 잰퓨어는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다리는 잔디를 심어 놓았기에 풀과 꽃이 많이 자라 있었다.

    돌도 많았기에 걷는 것이 불편했지만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갔다.

    전설 아이템을 입어서 그런지 훨씬 몸 움직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잰퓨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고, 다리의 난간에 서서 달을 바라보던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호감도가 5% 증가했습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나를 감쌌다.

    “뭐지? 왜 호감도가 오르는 거야?”

    내가 그에게로 다가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거지?

    아무리 밤에 만난다고 한들 아직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왜…….

    “…….”

    샐라임은 내 혼잣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이건 내 능력 밖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호감도가 오른 거라면 원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름: 잰퓨어 이브

    나이: 17

    직위: 율리우스 제국 사립 아카데미 학생

    호감도: 15%

    +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른 호감도에 의아해하고 있는 상태에, 잰퓨어가 금세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 나오는 줄 알았잖아요, 루나.”

    “…….”

    그리고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

    고작 호감도가 올랐다는 것에 내 페이스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거다!

    “꼬마야, 잊지 마.”

    기숙사 방에서 샐라임과 세웠던 계획대로 가야 한다.

    완전 친구 콘셉트로 그를 대하는 것.

    이성으로는 절대 생각할 수 없게 여자의 뿌리를 완전히 잘라 버리는 것이 내가 세운 ‘잰퓨어 막기’ 대책이었다.

    그리고,

    “야.”

    나는 이제부터 연기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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