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타오르는 불꽃(2)
나는 식당 모서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포착된 무언가.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 줄 구원자다.
평소 같았으면 반갑지 않을 상대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누구보다 그를 환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잰퓨어!”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지나가던 잰퓨어를 붙잡았다.
같은 학교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있던 그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휙휙 돌아보더니, 이내 나를 찾아냈다.
“루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벗어난 뒤 금세 내 자리로 다가왔다.
혹여라도 인사만 한 채 갈 길을 가지 않을까, 싶었던 나는 그가 쉽게 와 준 것에 감사했다.
“밥을 먹고 있었나요? 아, 이쪽은…….”
그가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눈짓하며 물었다. 일행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들이 있었군요. 밥 맛있게 먹어요.”
단호하게 말을 끝낸 뒤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같이 밥 먹을래요?!”
그러자 세 남자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나도 모르게 약간 움츠러들었다.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잰퓨어는 친구들과 있는데 자신을 왜 부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소, 소개해 줄게요! 제 친구들이에요!”
이상함을 감지한 잰퓨어는 다시 나에게 다가왔고, 내 어색한 표정을 보자 무언가를 느낀 건지 알겠다며 자리에 앉았다.
에르셈프의 옆자리이자 세이먼의 맞은편이었다.
이로써 나는 완벽하게 세 남자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이쪽은 세이먼 유리츠,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에요.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저를 많이 도와주는 분이에요.”
“안녕하세요.”
내가 세이먼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이먼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나를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그리고 이쪽은 에르셈프. 알죠?”
그러자 잰퓨어가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비젠티아 왕국의 왕자님을 뵙습니다.”
“친구인가?”
“맞습니다. 적성도 같은 과이지요.”
“……정령술과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같은 팀 동료로 활동하고 있지요.”
그러자 나와 누가 더 친한지에 대해 배틀을 뜨던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잰퓨어의 말에 입이 다물려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과, 같은 반에 같은 팀 동료인 것을 이길 수 없었다.
“이쪽은 잰퓨어 이브. 제 친구예요.”
내가 세이먼과 에르셈프에게 소개했다.
정확하게 친구라고 소개하는 것에 잰퓨어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가 맘에 안 드는 걸까.
호감도는 5%인 주제에 제일 연인 노릇을 하려 하잖아?
“오늘부로 친구가 되어서 소개를 시켜 주고 싶었어요. 괜찮죠?”
내가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세이먼은,
“당연히 괜찮지요. 학생회장 세이먼 유리츠입니다. 교류회에 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 주시면 됩니다.”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고,
에르셈프는 잰퓨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간을 작게 찌푸린 채,
“…….”
그라탱을 휘적일 뿐이었다.
잰퓨어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가 싱그러운 미소를 짓자 그의 주변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가장 미남 투톱이라 불리는 세이먼과 에르셈프, 그리고 그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잰퓨어까지.
셋을 앞에 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미모를 감상했다.
마치 꽃들을 앞에 두어 정신을 못 차리는 꿀벌이 된 느낌이랄까?
그때, 잰퓨어가 입을 열었다.
“루나, 오늘 저녁에 똑같은 시간에 만날까요?”
“……?”
“?!”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순식간에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파격적인 말에 깜짝 놀랐다.
아까 수업 시간 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지나가면서 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 네. 좋아요. 잰퓨어가 데려가 준다고 했죠?”
“그럼요. 깜짝 놀랄걸요. 아마 비젠티아 학생들도 모르는 곳일 거예요. 친구에서 연인되기 딱 좋은 장소죠.”
그는 옆에 눈을 시퍼렇게 뜬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미소를 흘리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 저녁 잰퓨어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호감도가 5%라고 하지만 엄연한 남자 주인공이었다.
게다가 아주 위험하고 능구렁이 같은 남자.
그런데 이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는 잰퓨어의 장단에 맞추어 줄 필요가 있었다. 친구들과 지나가던 걸 붙잡아 앉혔는데 퉁명스럽게 대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식당에 있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여덟 시가 되기 오 분 전이었다.
“대체 어떤 곳일지 궁금하네요. 밤에 산책하는 걸 좋아하나요?”
나는 잰퓨어와 끈질기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절대로 대화가 끊겨서는 안 되었다.
“물론이죠. 그것도 루나와 함께라면 더더욱.”
잰퓨어는 눈치가 없는 건지 그냥 무시하는 건지 세이먼과 에르셈프 앞에서 나에 대한 호감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오늘 친구가 되었다고 했는데 꽤 많이 친해졌나 봐요.”
세이먼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미소는……! 세이먼이 본인의 마음을 숨길 때 쓰는 표정이었다.
그 속에는 비난, 경멸, 증오 등이 들어 있을 때가 다분했다.
절대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티 내지 않는 세이먼은 항상 가면을 쓰곤 했다.
“사실 친구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요. 제가 원래 연인 될,”
“정령술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요! 잰퓨어가 2학년이어서 제가 많이 물어보려고 해요! 하하하.”
내가 파격적인 그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잰퓨어는 미쳤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말을 하려 하다니.
나는 잰퓨어까지 이 남자들의 기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두 명도 벅찼다. 그런데 세 명이라니.
한 명씩 처리해도 벅찬 상황에 셋이서 나에게 달려드는 걸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이번 해엔 자매 교류회를 추진하지 말 걸 그랬군요.”
세이먼이 들릴 듯 말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수습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여덟 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알림이 울렸다.
지금이다!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남은 시간은 약 일 분가량.
60초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나는 잰퓨어에게 다급하게 질문했다.
“잰퓨어, 밥을 시켜야 하지 않나요?”
“아, 까먹고 있었네요. 시키고 올게요.”
“어떡하죠, 저희 아카데미는 저녁 시간이 여덟 시까지여서 음식을 시킬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시계를 가리키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잰퓨어, 고맙다. 조금만 더 힘내 주어라!
그는 한산한 식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음 먹어 보는 거라 몰랐네요. 어쩔 수 없죠. 기숙사 가는 길에 매점이라도 들러야겠어요.”
“매점 음식은 몸에 좋지 않죠.”
“네?”
잰퓨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해 왔고, 세이먼이 그때 끼어들었다.
“지금이라도 가 보는 건 어때요? 매점도 음식이 적어서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로 말하는 세이먼. 그는 어서 빨리 꺼져 달라는 말을 웃으면서 하고 있었다.
그때 에르셈프도 끼어들었다.
“정신 사나워서 밥을 먹질 못하겠군. 어서 가 봐.”
그는 대놓고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잰퓨어는 자신을 보내려는 그들의 반응에 오히려 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눌러앉았다.
“루나, 밤에 학교 밖에 나갔다 올래요? 제가 통하는 문을 알아요.”
그는 학생회장인 세이먼 앞에서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맛있는 걸 먹고 오자구요.”
잰퓨어는 엄청난 여우였다.
이곳에 앉은 지 몇 분 되지 않아 눈치로 모든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둘이 나에게 관심이 있고, 서로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이런 상황에 놓였을 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자존심의 소유자였다.
나는 판만 깔아 주면 되었다.
그리고, 타이밍은 왔다.
이제 남은 시간은 약 30초가량.
시야의 오른쪽에 놓인 타이머로 시간을 재고 있던 나는 잰퓨어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내 샌드위치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샌드위치가 남아서 밤에 가져가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네요.”
나는 남은 음식이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잰퓨어는 자연스럽게 내 샌드위치에 시선이 꽂혔다.
“루나가 먹다 남은 건가요?”
“네. 배가 고프면 좀 먹을래요?”
내가 물 흐르듯이 그에게 물었고, 당연히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각 잡힌 세이먼이나, 고고한 에르셈프와는 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남긴 음식을 아낌없이 먹어 치워 줄 수 있는 그런 소소한 남자였다는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샌드위치 껍질을 벗겨 냉큼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
내가 먹지 않은 쪽으로 보여 주며.
“이쪽으로 먹어요.”
그에게 건넨 것이 아니라,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샌드위치를 통째로 건네줄 것이라 예상했던 잰퓨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대체 안 먹고 뭐 하는 거죠?’라는 눈빛을 세게 보냈다.
하지만 그는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빠르게 번갈아 보더니,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잰퓨어 특유의 미소였다. 그러고는,
앙.
내가 내민 샌드위치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잰퓨어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타오르는 불꽃’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제공됩니다…….]
[전설급 아이템 ‘타락한 천사의 의복’이 제공되었습니다.]
성공했다!
10초를 남기고 성공한 것이다!
퀘스트에는 분명 ‘남자 주인공에게 먹여 주시오’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세이먼과 에르셈프가 아니어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나는 딱 맞게 나타나 준 잰퓨어에게 감사를 표하며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이상한 저녁 시간대에 영원히 갇힐 필요도 없고, 전설급 아이템도 받을 수 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전설급 아이템을 열어 볼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잰퓨어의 호감도는 올라갔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먹여 주니 올라간 것이겠지.
하지만 선방이었다.
23%, 41%의 남주인공의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보다는 열 배는 나았으니까.
잰퓨어는 겉으로는 나에게 들이대도 호감도는 낮았다.
그러니까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나를 대하는 행동에 비해 위험도가 낮다는 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세이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에르셈프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가 3% 상승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세이먼과 에르셈프의 호감도가 올라 버렸다는 점이다.
대체 왜지?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질투심.
사람은 무릇 자신이 질투를 할 때 그것을 좋아한다고 깨닫는 경향이 있는 법이었다.
내가 잰퓨어에게 대하는 행동 때문에 세이먼과 에르셈프의 호감도가 올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퀘스트는 해결했지만 뜻밖의 낭패에 탄식했다.
결국 나는 셋의 호감도를 다 올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 큰 수치는 아니었지만 퀘스트의 의도대로 가 버렸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맛있네요. 루나가 먹여 주니까 더.”
잰퓨어는 받아먹으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가 내민 샌드위치를 손으로 받아 들었다.
“잘 먹을게요.”
세이먼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서워…….
에르셈프는 아예 아까부터 대놓고 무표정이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티 내는 것이었다.
“상한 것 같다고 하던데, 괜찮은가 보지?”
“아주 맛있는걸요. 하지만 밤에는 더 맛있는 걸 먹으러 가요. 열 시 괜찮죠?”
그 말에 세이먼의 눈빛이 금세 날카로워졌다.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는 표정.
“기숙사는 통금이 있을 텐데요. 규정을 어긴다면 기숙사에서 퇴출당할 수 있을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알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잰퓨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꾸했다.
분명 상관하지 않을 거다.
열 시에 어떻게 해서든 나를 불러내겠지.
물론 난 안 나갈 테지만.
잰퓨어는 금세 내가 남긴 샌드위치를 해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고요?”
내가 묻자, 그가 금세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정령을 통해 편지를 보낼게요. 밤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