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함께하는 수련(2)
그가 손을 올렸다.
“이렇게.”
그러곤 그냥 내 심장 앞 허공에 자신의 손바닥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얕게 마나를 주입해 줄게.”
나는 순간적으로 혼자 민망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서.”
그가 내 심장 앞에 손을 올리고는 재촉했다.
내가 그렇게도 성공하길 바라는 건가?
그의 요구에 나는 다시 명상의 자세를 취했다.
어차피 또 똑같이 집중을 하지 않으면 마나는 모이지 않을 것이었다.
진정한 내가 눈을 감고 다시금 집중하는 척을 했다.
이번에는 에르셈프가 나를 보는 거리가 무척 가까웠다.
나는 자연과 하나 된 기분을 느끼며 마나를 몸 안으로 모았다.
그리고 심장 부근으로 보내면 되는데…… 일부러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배쪽 부분에서 마나가 갈팡질팡하며 자리를 못 잡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에르셈프가 작게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
그러자,
갈 길을 몰라 헤매던 마나가 새로 들어오는 마나를 향해 금세 방향을 틀더니 심장 부근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트인 길을 따라 몸속에 도는 마나가 심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까 에르셈프가 오기 전에도 계속해서 실패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얕게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 길이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뚫린 길을 따라 힘차게 나아간 마나는 금세 심장 부근에서 빽빽한 소용돌이를 이루더니,
이내…….
동그란 원을 이루었다.
몇 시간을 연습해도 안 되던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마나를 그렇게 모으려고 해도 나를 갖고 노는 듯 빠져나가는 것이 일쑤였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기쁜 마음에 집중을 풀고는 소리쳤다.
“성공했어요!”
물론 그가 마나를 주입해 주었기 때문에 원을 만들 수 있었지만 정확히 감이 잡혔다.
어떻게 해야 마나를 심장으로 모으는지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며 그에게 성공했다고 말하자,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 마나와 상성이 잘 맞나 보네.”
그도 몇 번의 시도 끝에 자신의 도움이 이루어진 것 같아서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환하게 웃음 짓는 에르셈프는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게임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희미한 미소만을 지을 뿐 활짝 웃는 모습을 내보인 적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에르셈프의 도움 없이도 성공해 보이기 위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아까 그의 앞에서 하던 연극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이것을 성공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럽게 다가와 확실하게 확인받고 싶었다.
드디어 정령을 부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흡.”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집중을 한군데로 모았다.
한 번 뚫린 길은 막힘 없이 건재했고, 자연의 마나가 내 몸속으로 들어와 길을 따라 심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원을 이루었다.
“!!!!”
에르셈프의 도움 없이도 성공한 것이다!
내일 첸테 선배, 잰퓨어와 함께 첫 임무를 받게 되는데 기어코 오늘 안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꼬마야.”
그때 샐라임이 수련은 끝나지 않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장에 마나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면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어. 아직 미숙하기는 하지만 하급 정령 정도는 가능할 거야.”
나는 그의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셈프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나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볼 뿐이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있어 노을빛이 아름답게 잔디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샐라임이 읊어 주는 대로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정령을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정령계의 빛과 인간계의 빛이 하나가 되노니, 나는 그대와 마주하여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자,
몇 초 안 되어 허공에 작은 빛무리가 올라왔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내가 불러낸 정령이라는 거지?
이내 빛무리는 작은 도마뱀 모양을 한 정령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우와!”
정령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신성함을 풍겼다.
“샐러맨더군.”
샐라임이 중얼거렸다. 그는 불의 상급 정령이니 당연히 하급 정령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샐러맨더는 날개가 달린 도마뱀의 형상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마치 계약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처럼.
“나를 위한 창이자 방패가 되어 다오, 샐러맨더.”
내가 이어서 말하자 샐러맨더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주 귀여웠다.
그러고는,
쏙!
빙글빙글 돌던 정령이 내 품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감격에 젖어 품속에 들어온 정령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아주 짙은 붉은색이라 뜨겁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계약이 이루어진 거야.”
샐라임의 말이 끝나자, 정령은 내 품에서 나오더니 휙, 하고는 금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제 네가 원할 때 샐러맨더를 부르면 나타날 거야.”
당장이라도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방금 소환된 정령을 또다시 불러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정령술사가 된 걸 축하한다, 꼬마야.”
샐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검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옆에 에르셈프가 있는 까닭에 샐라임에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기에.
나는 계약에 성공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에르셈프, 고마워요!”
내가 너무 기쁜 나머지 발을 구르며 그에게 소리쳤다. 너무나도 큰 수확이니까!
“…….”
그러자 순식간에 에르셈프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붉어진 귀가 터질 듯이 새빨개진 것이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령이라고 해 봤자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아. 그리 좋아할 것도 아니고.”
정령이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괜히 시비를 거는 것이다.
꼭, 초를 친다니까?
새침데기 같은 그의 말에 내가 입을 삐쭉거렸다.
왕자 같은 엘리트는 이런 게 신기하지 않겠지, 그래도 나한테는 엄청난 수확이고 발전인데……!
그때였다.
그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귀엽긴 하네.”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에르셈프가 회색빛 머리칼을 날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상태창을 띄웠다.
+
이름: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나이: 18
직위: 비젠티아 왕국의 제3 왕자
호감도: 23%
+
아까 호감도를 낮췄던 덕분에 다행히 처음과 같은 수치였다.
자칫하면 25%가 되었을지도 몰랐으니 아까 연극을 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힘써준 에르셈프에게는 약간 미안하지만.
“수련은 다 끝난 건가?”
마나 운용에 정령 계약까지 마쳤으니 오늘 목표는 달성이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태연하게 제안했다.
“밥 먹으러 가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뭔가 다가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호감도가 20%대라면 절대 날 쉬이 보내 주지 않았을 게 뻔했다.
나는 칼같이 거절했다.
“아뇨, 제가 저녁을 안 먹어요.”
그러자,
“오늘은 먹어, 그러면.”
“별로 배가 안 고파서요.”
꼬르륵.
그때 내 배에서 민망한 소리가 났다.
젠장, 왜 하필 지금!
그때 에르셈프가 내 민망함을 감춰 주려는 건지, 듣지 못한 건지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학생 식당을 경험해 보고 싶어.”
“…….”
“그리 어려운 일 아니잖아.”
내가 거절할 걸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나를 설득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지를 털고는 앉아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아무리 내가 밀어 낸다고 한들 상황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같이 있는 상황에서 내가 수련에 성공했다는 좋은 사건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나도 그에게 고마워졌다.
그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한다고 해도 일어나라고 내민 그의 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그가 로브를 팔에 걸치더니 나에게 왜 안 오냐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고는,
“얼른 가지. 나 바쁜데.”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저건 누가 봐도 완연한 왕자의 권위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렇게 권력 남용해도 되는 거야?
거역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둘이서 같이 교정을 걷다 보니 저번에 무기 상점에 같이 가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와 같이 에르셈프와 걷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주변에서 다들 쳐다보며 수군거렸기 때문이다.
그가 왕자라는 것도 한몫했지만 눈부시는 외모가 여러 여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새삼 그의 옆태를 바라보았다.
‘어쩜 이리 잘생겼지.’
정갈하게 가르마를 탄 채 길게 떨어지는 회색 앞머리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와 색 조화가 어우러져 고고한 왕족의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앞만 보며 걷는 것은 그의 습관인 듯했다.
그렇게, 나와 에르셈프는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학생 식당은 복지 차원에서 마련해 놓은 무료 급식과 돈을 내고 사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존재했다.
“학생 식당 처음이에요?”
내가 묻자, 그가 잠시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응.”
하긴, 왕자님이 이런 식당에 올 리가 없겠지. 학교 내에서 돈 좀 있다 하는 귀족들은 오지도 않는 곳이었으니. 순전히 나와 밥을 먹기 위해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식당 건물로 향하고 있는데, 익숙한 남자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찔하게도 내가 그쪽을 바라봄과 동시에 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푸른 빛 눈동자의 주인공.
세이먼이었다.
그는 여전히 팔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하긴 회복하려면 두 달이 걸린다고 했지……. 퇴원을 해서 이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건가.
나는 그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퀘스트를 위해 밤에 찾아간 것을 빼면 히아신스와의 한바탕 사건이 마지막이었다.
나를 붙잡는 세이먼을 뿌리치고 나왔던 탓에 나는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루나, 어디 가는 길이에요?”
에르셈프 옆에 서 있는 나를 본 세이먼이 금세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에르셈프에게는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둘은 같은 반이 되어 안면을 튼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을 하려 했을 때였다.
에르셈프가 타이밍을 뺏어 대신 입을 열었다.
“밥을 먹으러 가던 중이었지.”
“둘이서요?”
세이먼은 나를 향해 물었고,
“그렇다.”
대답은 에르셈프가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무안한 마음에 세이먼에게 물었다.
“같이 먹으러 갈래요?”
나야 단둘이서 먹는 것보다 다 같이 먹는 것이 더 나았다. 그렇게 하는 편이 괜한 분위기를 안 만들 테니까. 세이먼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러자, 에르셈프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 손으로 무얼 먹는다는 거지?”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에르셈프.”
세이먼은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편할 텐데. 오래 걸릴 테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에르셈프야말로.”
“…….”
“식당의 음식은 입에 안 맞으실 텐데요.”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는다네.”
“그것참 다행이군요.”
나는 빠르게 받아치는 그들의 대화에 입이 다물렸다. 마지막에 세이먼이 비꼰 거지, 아마?
그 말을 들은 에르셈프는 이내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입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지.”
그렇게…… 나와 에르셈프, 세이먼은 다 함께 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 거의 끝난 탓에 식당은 한산했다. 에르셈프는 치즈와 버섯을 넣은 그라탱을 주문했고, 세이먼은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애플파이를 구입했다. 그리고 나는 햄과 야채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샀다.
우리는 큰 테이블의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난 모서리에 앉았고, 내 맞은편에는 에르셈프가, 내 옆자리에는 세이먼이 앉았다.
나는 자리 배치가 난감했다.
지금 나 갇힌 거 아니지……?
두 남자 사이에 끼인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태연하게 샌드위치 껍질을 벗겼다.
“보통 밥을 어디서 먹나?”
에르셈프가 나에게 물었다. 옆에 있는 세이먼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턱을 괸 채 나만을 향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것이니 신경을 껐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세이먼이 가로챘다.
“루나는 기숙사에 사니 식당에 자주 오겠지요, 에르셈프.”
마치 ‘루나는 내가 잘 알죠.’와 같은 말투였다.
“맞아요.”
내가 아무렇지 않게 거들자, 세이먼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에르셈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항상 공터에서 수련을 하길래 그럴 것 같았네.”
“……공터에서 수련을 하는 군요, 루나.”
“네. 사람도 없고 그쪽이 편해서요.”
“진작 말해 줬으면 제가 수련장을 마련해 주었을 텐데요.”
“…….”
“루나의 수련은 내가 도와주고 있으니 필요 없을 거야, 세이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