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펀칭 머신 테스트(2)
남자 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잰퓨어가 게임 당시에도 이런 성격이었나?
자고로 남주인공이라면 여주인공한테 스위트하게 다가와 줘야 하는 거 아냐?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렇게 대답하는 상대에게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우와, 저거 봐요.”
그때 잰퓨어가 내 시선을 앞으로 끌었다.
“구천 대가 나왔어요.”
내 말은 안중에도 없고 학생들의 테스트가 흥미롭다는 듯 앞을 보는 잰퓨어는 정말이지…….
“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작전을 변경하기로 했다.
“알겠어요. 정 그렇다면 귀찮게 안 할게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나 원래의 자리인 아미카 선배 옆자리로 왔다.
“뭐야, 루나. 무슨 이야기 했어?”
“뭐 좀 물어봤어요.”
“알려 줘. 궁금해.”
팔꿈치로 툭툭 치며 묻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무슨 말 했다가 오해나 놀림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테스트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내, 내 옆에 앉은 아미카 선배의 차례가 다가왔다.
자신을 부르기를 기다렸는지 그녀는 힘차게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녀가 앞으로 나가자 몇몇 학생들은 수다 떨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미카, 잘할 수 있지?”
“물론이죠.”
선배는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펠리엇을 향해 대답했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쾅!
선배는 검은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작지만 강하고 깊은 위력으로 펀칭 쿠션을 갈겼다.
“우와…….”
학생들이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마른 몸집에서 어떻게 저런 파워가 나오나 싶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녀는 숫자가 나오기도 전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역량을 아쉬움 없이 보여 줬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전광판은 숫자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띠리리리.
‘59849’
“!!!!!”
오만 구천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전광판을 바라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숫자들을 완벽하게 훌쩍 넘어 버리는 그런 숫자였으니, 놀랄 법도 했다.
“나이스!”
선배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뽐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이미 테스트를 본 학생들은 입이 벌어져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반발을 했고, 다음 타자의 학생은 자연스레 긴장감에 물들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오는 아미카 선배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그녀는 내 옆에 착석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래 보여도 과에서 매번 삼등 안에 들거든.”
그녀가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삼등 안에 드는 선배가 오만 구천이 나왔으면 한두 명 정도는 그 이상의 수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파워에 놀라며 그녀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육만에 다다르는 숫자는 함부로 볼 것이 아니었다.
중급 정령술사가 오십일만이 나오는 상태에서 고작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작은 소녀가 그 정도 숫자를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선배한테 까불면 안 되겠는데요.”
“루나 너는 특별히 봐줄게.”
“아미카! 나는?”
“너는 특별히 죽음이지.”
선배들과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데, 시야에 저 멀리 있는 잰퓨어가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학생들의 테스트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퀘스트의 제한 시간을 생각했다.
단 하루였다. 당장 오늘.
수업이 끝나면 또 어디서 그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못 찾을 가능성이 크니 수업 시간 안에 무조건 퀘스트를 성공시켜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그냥 페널티를 받아서 펠리엇의 미움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하잖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작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 몇 년을 봐야 할 펠리엇과 척을 진다니.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아까 ‘너무 원하니까 해 주기가 싫어요.’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작전 변경으로 일단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루이아나 윌리어스.”
내 이름이 불렸다.
* * *
나는 호명에 따라 앞으로 나갔다.
오히려 지금 테스트는 내 안중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잰퓨어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있을 텐데…….’
걸으면서도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앞으로 나가자, 펠리엇이 벌써 네 차례냐는 듯이 말을 걸었다.
“루나! 네 차례구나! 과연 올해 일 학년은 얼마나 나올까?”
그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스승과 안 좋은 관계가 형성된다면…….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데…….’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머신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심호흡도 하지 않은 채 주먹을 쥐고는 휙, 갈겨 버렸다.
휙!
숫자를 입으로 세면서 하늘 높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다른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의 없는 모습이었다.
푸욱!
그런데, 생각한 것과 다른 소리가 났다.
둔탁한 소리가 필드 안을 울려왔다.
학생들은 이미 내가 나온 시점에서부터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젠장!’
머릿속을 지배하는 잰퓨어 생각 때문에 쿠션을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다.
결국 쿠션 겉을 미끄러지듯이 때려 버리고 말았다.
타격의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나는 망했다는 생각으로 주먹을 부여잡으며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띠리리리.
전광판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꽤 오랫동안…… 올라갔다.
그러고는,
‘493800’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내뱉었다.
“?!”
학생들은 무심결에 전광판을 보고는 놀랐는지 소리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마음에 전광판을 보고 얼어 있었다.
이, 이게 뭔 일이야.
사십구만.
펠리엇을 제외하면 최고 기록이었다.
네 자릿수만 나오길 바랐던 내가 무려 사십구만이라는 숫자를 내놓았다.
“이거 잘못 나온 거 아니죠? 제가 잘못 때린 것 같은데…….”
“아무 문제 없단다, 루나.”
펠리엇은 싱긋, 웃으면서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때 허리춤에서 샐라임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아무 말 안 하고 있던 샐라임이 이제야 입을 여는 걸 보니 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주변에서는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 누구야? 처음 보는데?”
“일 학년인가?”
“설마 일 학년이 저럴 리가 없잖아.”
자리로 돌아가는 와중에 저 멀리서 잰퓨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아미카 선배는 돌아온 나에게 벙찐 얼굴로 말했다.
“너 사람 맞아?”
“네?”
“이종족 아냐?”
열여섯 살에 마력량이 무려 사십구만이 나왔으니 이종족이라 불릴 만도 했다.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나오는 숫자가 아닐 테니 말이다.
선배는 내 주먹을 가져가더니 이리저리 휙휙 돌려 보았다.
“주먹이라고는 써 본 적도 없는 애 같은데…….”
“올해 일 학년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진짜였구나.”
“입단 테스트 때도 엄청났다며.”
선배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말을 걸기 바빴다.
“미끄러져서 다행이지.”
그때 샐라임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샐라임과 대화를 할 생각으로 화장실에 가려 일어났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고 있는데,
“루나!”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목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자, 그곳엔 잰퓨어가 있었다.
그도 내가 이런 숫자를 낸 것에 놀라서 말을 건 것일까?
나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려 하고 있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마구 휘날리던 생각을 그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다음번에 같이 나가요!”
그러자 그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나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죠?”
“아까 밤에 같이 나가자고 했잖아요. 저랑 나가자구요.”
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싶은 마음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제발, 제발 알겠다고 해 주길 바랐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아니잖아. 제발 나랑 같이 놀아 준다고 말하라고!
그러자, 동그란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잰퓨어는 이내 표정을 풀고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다음에 같이 나가요.”
그는 졌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래도 들려오지 않는 시스템 음성에 좌절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으니 곧 있으면 친구가 될 수 있을 터다.
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왜 부른 거죠?”
“멋지다고 말하려 했어요. 최고 기록이잖아요.”
그는 생각보다 싱거운 말을 했고,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 탓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고마워요.”
“루나에게 잘못 장난쳤다간 된통 혼나겠는데요. 그동안 장난친 거 용서해 줘요.”
그는 장난식으로 괜히 너스레를 떨며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 된 거죠?”
내가 마지막 회심의 일격이라는 뜻으로 그에게 내뱉었다.
제발! 제발!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알겠어요. 원래 루나랑은 친구 안 하려고 했는데, 예외라고 해 두죠.”
친구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기쁜 마음에 방방 뛰고 싶었다.
[‘사랑은 친구부터’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제공됩니다…….]
[서사급 아이템 ‘깨진 우정의 펜던트’가 제공되었습니다!]
곧이어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고, 보상도 제대로 제공되었다.
‘깨진 우정의 펜던트’라니, 뭔가 말이 이상하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나는 퀘스트가 성공함과 동시에 잰퓨어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곤 화장실로 향했다.
아까 펀칭 머신 테스트로 나온 내 마력량 수치에 대해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샐라임, 뭐죠? 왜 이렇게 높게 나온 거죠?”
그러자 샐라임이 뭘 그리 놀라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게 나온 거야. 원래는 저거에 몇 배는 더 될걸.”
“무슨 말이에요, 그게?”
“네가 아직 마력을 다루는 게 미숙해서 측정치가 덜 잡혔어. 게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더 낮게 잡혔고. 아마 제대로 때렸으면 네 담임은 훌쩍 넘겼을 거다.”
놀라웠다.
나에게 이런 마력량이 들어 있었다니.
마나 수련을 할 때 넘치는 마나를 주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무려 펠리엇보다도 높은 수치였으니.
“이게 불의 친화력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래. 친화력이 높을수록 마력량이 높은 거란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감에 손뼉을 짝, 쳤다.
샐라임은 오히려 미끄러진 게 다행이라고 했다.
제대로 때렸을 때의 마력량을 학생들이 봤으면 그 관심을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오버 보태서 드래곤만큼 친화력이 강한 여자애가 나타났다고.”
내가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저 생각보다 엄청 강하네요?”
그러자 샐라임이 푹, 한숨을 쉬었다.
“넌 타고난 천재가 숫자도 못 배운 셈인 거야. 지금보다 몇 배는 수련해야 네 마력량의 반을 쓸까 말까 일 거다.”
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불의 친화력과 마력이 높은 것.
둘 다 내가 정령술과에 들어온 것이 옳았다고 입증해 주는 것 같았기에.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그 대화를 끝으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고, 어느새 테스트는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른 선배들은 어떻게 봤을까?
화장실에 갔다 오느라 선배들의 테스트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테스트는 전부 끝이 났고, 펠리엇이 머신을 옆으로 밀어 치웠다.
“다들 고생했다. 이제 팀을 나눠야 할 차례인데, A팀부터 G팀까지 부르는 대로 여기 서도록 해라.”
펠리엇은 체크한 종이를 가지고는 이리저리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명씩 차례차례 이름을 불렀다.
다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배정된 팀의 자리로 가기 시작했고, 나는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아나 윌리어스, G팀.”
나는 드디어 호명된 이름에 반가운 마음으로 G팀을 향했다.
누구와 같은 팀이 될까?
처음으로 같이 하는 동료인 만큼 잘 지내봐야지.
그런데 G팀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아직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 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하지만, 다른 팀들은 점점 사람이 차는 반면에 내 팀엔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 남는 건 아니겠지.
나만 덩그러니 G팀에 서 있는 가운데,
그때,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첸테 선배?”
적성 테스트 행사 때, 내 면접을 통과시키라고 했던 반장 선배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중얼거렸다.
“대단하더군. 네가 일등을 할 줄이야.”
나는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일등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선배가 이 등인가요?”
그러자 선배가 대답했다.
“아니, 삼등.”
그럼 이등은 누구지?
아마 G팀에 들어올 텐데. 내가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참이었다.
“……?”
정말로, 내가 아는 사람의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