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25)화 (25/156)
  • 24화. 펀칭 머신 테스트(1)

    나는 벙찐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죠 그게?”

    그러자 잰퓨어는 여전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는 듯, 간단한 말투로.

    “말 그대로예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다시 한번 되새김질했다.

    ‘연인 될 사람’이라고 했지 아마?

    호감도가 0%, 아니 5% 올랐다고 지금 연인 될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잰퓨어는 원래 모든 여자한테나 이러는 사람인가?

    아니면 애초에 나를 좋아하도록 설정되어 있던 건가?

    “장난치지 마세요. 저는 그쪽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될 생각 없으니까.”

    “그것참 유감이네요.”

    여전히 퀘스트가 성공했다는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친구라고 인정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잰퓨어랑 말을 하면 이상하게 대화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가 없었다.

    아, 이건 에르셈프도 해당이었다.

    에르셈프는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해 버리고 자기 할 말을 하는 편이었고,

    잰퓨어는 말꼬리를 잡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절 얼마나 봤다고 연인 운운하는 거죠? 참 쉬운 사람이네요.”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물었다.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데 말이 저절로 나왔다.

    “루나, 아무리 제가 거절을 했더라도.”

    이젠 그는 내 이름까지 줄여 부르고 있었다.

    “?”

    “친절하게 대해 줘요. 저 상처 잘 받으니까.”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그가 대답했다.

    친절은 나발이고 사람 대우나 하면 다행인 정도인데 무슨 자기가 상처를 이야기해?

    나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반응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이 더 재미있다는 듯이.

    나는 다시 한번 더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페널티: 펠리엇과 적대적 관계 형성.

    저 페널티가 계속 내 발을 붙잡았다.

    저것만 아니었어도 잰퓨어에게 시원하게 한마디 해 줄 수 있는데.

    자칫해서 사이가 틀어져 친구조차 되지 못하는 관계가 된다면 완전 낭패였다.

    나는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그러곤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는 거의 날 가지고 놀고 있었다.

    “…….”

    잰퓨어의 노련함에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단 말이다.

    그때였다.

    벌컥.

    이론 수업이 끝났는지 앞문을 열고 펠리엇이 나왔다.

    그는 우리 둘을 건조한 얼굴로 몇 번 번갈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연애는 나가서 해라.”

    “……!”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선생님, 아니, 무슨, 그런,”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잰퓨어는 예의를 차리며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고,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휩쓸리고 있었다.

    “두 번째 수업은 레벨 테스트니까 운동장으로 나오도록.”

    그러곤 펠리엇은 등을 돌려 사라졌다.

    학생들도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잰퓨어 옆에서 발을 맞춰 걸었다.

    그리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친해지고 싶다니까요. 사람 말이 잘 안 들려요?”

    “잘 들려요. 귀는 그쪽이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원래 친해지고 싶다는 사람한테 이렇게 굴어요? 마음 상하게?”

    그러자 잰퓨어가 걷던 발을 멈추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마음 상했어요? 미안해요.”

    그는 미소를 지운 채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구요, 그냥 앞으로 잘 지내봐요.”

    그러자 그는 후후, 하고 작게 웃음을 지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잰퓨어와 친구가 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사교성 좋은 성격이니 바로 친구가 될 줄 알았건만.

    “후…….”

    탄식하며 운동장으로 나가고 있는데, 지금까지 대화를 듣던 샐라임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재미없게 굴어 보는 건 어때?”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재밌었어요?”

    “아니 그냥, 반응이 귀엽잖아.”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반응 탓이라고 말하는 건가 지금?

    말이 안 되었다.

    이건 마치 초등학교 때 짝꿍이 심한 장난을 쳐 힘들어하는 여자애한테 ‘네 반응이 재밌어서 그래.’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온갖 생각을 하며 잰퓨어를 어떻게 친구로 구워삶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새 운동장에 다다랐다.

    * * *

    “오늘부터 새로운 훈련 방식에 들어간다고 했지? 다들 일렬로 서라.”

    운동장 한가운데로 학생들을 모은 펠리엇이 크게 소리쳤다.

    나는 잰퓨어에게서 멀리 떨어져 아미카 선배 무리로 섞였다.

    “루나, 쟤는 원래 아는 사이야? 완전 잘생겼는데.”

    아미카 선배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이런 미남이 정령술과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아뇨, 저도 처음 봐요.”

    “정말? 근데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해? 벌써 썸 타는 거야?”

    그녀는 괜히 장난을 치며 나에게 물어왔고, 나는 펠리엇이나 아미카 선배나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맞는 말이었다. 친구도 못 되었으니.

    펠리엇은 일렬로 줄을 선 학생들을 앞에 두고 품 안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운동장 한가운데에 일렁거리는 입구 하나가 생겨났다.

    “이곳은 아공간 필드로 들어가는 문이다. 한 명씩 들어가도록.”

    학생들이 차례로 필드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잰퓨어는 둘째 치고, 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이라니 새삼 기대가 되어 마음이 떨렸다.

    필드에 들어서자 이곳은 예전의 잔디밭 같은 필드와는 달랐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회색 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직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방이었다.

    펠리엇은 약 사십 명의 학생들 앞에 서더니, 힘차게 소리쳤다.

    “오늘은 각자의 능력치를 알아보는 레벨 테스트를 진행할 거다. 타 학교 학생들도 있으니 내가 파악할 필요가 있거든.”

    그리고 그는 구석에서 어떤 기계를 가져오더니 자신의 옆에 내려놓았다.

    “일명 ‘펀칭 머신 테스트’다.”

    그는 머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펀칭 머신 테스트?

    “룰은 간단하다. 여기 있는 펀칭 머신을 힘차게 주먹으로 때리는 거야. 그러면 위에 있는 전광판에는 무엇이 뜰까?”

    “…….”

    “너희의 마력량이 뜨지!”

    그는 이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우리는 앞으로 ‘임무 제도’라는 새로운 훈련 방식을 통해 너희들을 가르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벨에 맞는 팀을 짜야만 해.”

    그는 앞으로 삼 개월간 함께할 팀을 짜는 아주 중요한 테스트라며 열심히 임할 것을 명했다.

    펀칭 머신은 환생 전에 길거리나 오락실에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때렸을 때 힘의 수치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같았고.

    “내가 시범을 보여 주지.”

    쾅!

    펠리엇은 단숨에 주먹을 휘둘러 머신을 갈겨 버렸다.

    그러자 전광판의 숫자가 마구 올라가더니,

    ‘513783’

    이라는 숫자가 떴다.

    저 수치가 어느 정도임을 상징하는지는 모르지만,

    펠리엇이 주먹을 휘둘렀을 당시 그 파워는 실로 놀라웠다.

    머신이 고장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스피드 또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학생들은 단숨에 머신을 때려 버린 펠리엇과 전광판의 수치를 번갈아 보며 입을 벌렸다.

    하나같이 자신의 마력량을 궁금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흠.”

    그 무엇도 때려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곱고 하얀 주먹이었다.

    ‘중간만 갔으면 좋겠군.’

    나는 오히려 페널티가 없는 테스트라는 점에 감사하며 펠리엇이 가리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테스트는 펠리엇이 호명하는 대로 한 명씩 나와서 테스트를 진행하는 형태였고, 나머지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일 학년이기에 아마 순서가 가장 뒤쪽일 것이었다.

    금방 호명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려 잰퓨어의 위치를 찾았다.

    어디 있지?

    무조건 오늘 안에 친구가 되어야만 한다.

    저 앞에 서 있는 펠리엇과 척을 지고 싶진 않았으니. 아니, 그는 오히려 잘 보이고 싶은 상대였다.

    잰퓨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지 혼자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몇몇 여학생들은 테스트는 뒷전이고 잰퓨어에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타이밍을 노려 잰퓨어 가까이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자, 그럼 덴튼부터 시작할까?”

    펠리엇이 한 학생의 이름을 호명했고, 덴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초록빛 로브를 입은 것을 보니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

    그는 학생들 중 가장 처음 타자인데도 긴장한 구석이 없었다.

    천천히 머신 앞에 다가간 그는 큰 기함과 함께 주먹으로 쿠션을 때렸다.

    “하아아앗!”

    생각보다 파워가 아주 세서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쾅!

    머신은 강한 충격에 흔들흔들거렸다.

    띠리리리.

    ‘3980’

    “헉!”

    학생들은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놀라고 말았다.

    저렇게 완벽하게 주먹을 휘둘렀는데도 저 정도 숫자밖에 안 나온다고?

    펠리엇이 엄청나게 대단한 건가?

    “자, 다음 타자, 레아.”

    펠리엇은 싱긋 웃으며 쉴 틈 없이 레아를 맞이했고, 그녀는 떨리는 얼굴로 머신 앞으로 다가갔다.

    “…….”

    필드는 조용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모두 전광판에 시선이 꽂혔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수치가 나오는지 하나같이 궁금했기에.

    그녀는 떨리는 주먹으로 쿠션을 때렸고,

    퍽!

    띠리리리.

    ‘2870’

    전광판은 어림없다는 듯 여전히 네 자릿수의 숫자를 내놓았다.

    학생들은 마구 웅성거렸다.

    앞선 두 명의 수치로 보아 네 자릿수가 평균치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테스트에 임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나온 열댓 명의 학생들도 모두 비슷한 수치를 냈고, 이제 학생들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떠들어 댔다.

    나는 그 틈을 타 다시 한번 잰퓨어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 자리 그대로였다.

    나는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잰퓨어의 옆으로 향했다.

    완전 옆은 아니고, 말을 걸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둔 약간 뒷자리였다.

    “저기.”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보던 잰퓨어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을 확인한 그는 금세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태연하게 나에게 물었고,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안 끝난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어떤 걸 말하는 거죠?”

    “…….”

    그는 정말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투를 했다.

    “그…… 제가 친해지자고 했잖아요.”

    나는 눈을 불끈 감으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요?”

    그는 짧게 대꾸했고,

    “그런데요, 라뇨. 이렇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 무시해도 돼요? 아까는 저한테 계속 먼저 말 걸더니. 그쪽도 친해지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제 착각인가요?”

    말을 길게 늘어놓는 내 모습에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대답했다.

    “원하는 게 뭔데요?”

    나는 냉큼 대답했다.

    “저랑 친구 하자고요. 우정 몰라요? 한 번도 안 들어 보셨나? 친구끼리의 끈끈한 관계, 그거 저랑 쌓자고요.”

    내용과 말투가 전혀 조화롭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네’의 대답만 들으면 되었으니.

    하지만,

    그는 여전히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약간은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적극적인 자세 참 좋은데, 너무 원하니까, 해 주기가 싫어요.”

    청개구리 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정말, 열이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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