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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24)화 (24/156)
  • 23화. 제3 남자 주인공(2)

    “그러게요. 이렇게 볼 줄 몰랐는데.”

    나는 당황한 티를 숨기며, 시선은 앞에 고정한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

    그러자 계속해서 말을 걸어올 것 같던 잰퓨어는 예상 밖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꼬리를 잡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게임 플레이 당시 잰퓨어 루트를 떠올렸다.

    잰퓨어와 여주인공의 첫 만남은 지금쯤이 맞긴 하다.

    교정에서 길을 잃은 잰퓨어를 여주인공이 교문까지 데려다주며 얼굴을 알게 되니까.

    하지만 그건 거기에서 그칠 뿐, 본격적으로 인연이 시작되는 건 약 육 개월 뒤다.

    이렇게 같은 강의실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으며 싹트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퀘스트가 지시하는 대로가 아닌 정령술과에 들어갔기 때문일까?

    시스템은 나에게 떡하니 세 번째 남자 주인공과 엮이라는 양 같은 반에 잰퓨어를 넣어 주었다.

    나는 슬금슬금 왼쪽으로 붙으며 잰퓨어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잰퓨어의 미모에 반했는지 대부분이 그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집중이나 하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걸 그만두고 수업에 집중하려 펠리엇을 쳐다봤다.

    “오늘은 새로운 학생들도 있으니 레벨 테스트를 진행하겠다. 첫 수업으로 한 시간은 이론 수업을 하고, 나머지는 운동장에 나가 테스트를 볼 예정이다.”

    나는 테스트라면 이젠 질려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또 테스트를 보라니.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이번 테스트는 신변에 위협이 가지 않는 거라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가.

    펠리엇은 공지를 끝낸 후 이내 분필을 들어 이론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98페이지부터 시작한다. 제3장. 정령을 이루는 기본 물질. 고대부터 인간은 정령의 구조를 분석하려고 애썼다. 그 이유는 인간 본능적인 신성함을 향한 호기심에서 온 것이며…….”

    일 학년부터 사 학년까지 섞여 있는 이 정령술과는 자매 교류회를 해도 압도적으로 일 학년의 수가 적었다.

    아까 출석을 부르면서 일 학년의 수가 몇 명인지 파악할 수 있었는데, 나 포함 세 명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수업의 난이도가 고학년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난 이론 수업은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인간이 파악한 정령의 내부 모습이니, 인간과 정령의 함께 한 역사니, 실제 전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원론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다섯 원소에서 근본을 두고 네 개의 감정 영역까지 발을 넓힌 에테르의 범주는 고대 필리스 시대의 토네르네스가 발견했으며…….”

    그렇게 눈꺼풀이 감겨 가고 있었다.

    옆에 세 번째 남주인공이 있다는 걸 망각할 정도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젯밤 병동에 갔다 오느라 늦게 잔 탓인 것 같았다.

    속눈썹이 이렇게 무거웠나 싶을 정도로 잠이 오고 있었는데,

    “…좀…보죠.”

    “……?”

    잠에 취해 해롱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향하자 그는 작게 웃음 지었다.

    “표정 진짜 웃긴 거 알아요?”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잠이 깨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라고 했죠?”

    “책 없는데 같이 좀 보자구요.”

    “아.”

    나는 잠시, 삼 초 동안 몸이 얼었다. 머리로는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같이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남주인공이니까 딱딱하게 거절해야 하나?

    그래도 이 정도는 가능한 건가?

    같은 반 학생인데 안 보여 주면 좀 이상하겠지? 그럼 뭐라고 둘러대?

    잰퓨어는 가만히 내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이내 잠자코 책을 옆으로 밀었다.

    “고마워요.”

    안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간 오히려 새침한 인상이 각인될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강의실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람처럼 존재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 주인공과 같은 반이 된 것은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이었다.

    우연으로 마주치는 세이먼이나 에르셈프와 달리 같은 반이라면 자연스럽게 언제든지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얼굴도 볼 수 있고.

    나는 그를 등지며 턱을 괸 채 칠판을 쳐다봤다.

    “어제 어디 갔다 왔어요?”

    그때 그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강의실이 넓어 이 정도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펠리엇에게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쪽이 그게 왜 궁금하죠?”

    “특이하잖아요. 그 시간에 어딜 나다니는지.”

    “관심 꺼 주세요.”

    “원래 그렇게 까칠해요?”

    “네?”

    “모르는 사람한테 경계심이 많은 편인가?”

    “그게 무슨.”

    “그런 거면 이해할게요.”

    “……?”

    “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죄송한데 수업 좀 들을게요.”

    능구렁이처럼 대화를 이끌어 가는 잰퓨어에게 휘말리지 않으려면 똑바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최대한 칠판에 시선을 고정하며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겼다.

    그런데, 그는 아니었나 보다.

    “다음엔 저도 같이 데려가 줘요.”

    나는 그의 말에 휙,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쳐다본 뒤 상태창을 확인했다.

    호감도는 0%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다면 이게 잰퓨어의 원래 성격이라는 건데.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설정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울 줄은 몰랐다.

    “제가 문 열어 줄 테니까.”

    그는 펜으로 종이에 직사각형 모양의 문을 작게 그렸다.

    “이제 안 나갈 거예요.”

    “왜요?”

    “…갈 데도 없어요.”

    “그럼 이번엔 제가 데려갈게요.”

    “…….”

    “좋은 곳이 있거든요.”

    “…저기.”

    “어때요?”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고는 다시 떴다.

    더 이상 이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저기, 저는,”

    ‘그쪽한테 관심 없고, 이런 장난 재미없고 불쾌해요. 그리고 수업 좀 들을게요.’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루이아나?”

    그때 펠리엇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갑작스러운 호명에 깜짝 놀랐다.

    “옆의 학생은 이름이 뭐지?”

    “잰퓨어 이브입니다.”

    “아까부터 둘이 계속 떠들던데 수업이 듣기 싫으면 나가도 좋다.”

    “…죄송합니다.”

    “지금 나가라는 뜻이다.”

    펠리엇은 단호했고, 그렇게 나와 잰퓨어는 강의실 밖으로 쫓겨났다.

    * * *

    “그쪽 때문에 쫓겨났잖아요. 안 그래도 이거 두 번째 수업인데.”

    “일 학년인가 봐요?”

    “…네.”

    “학기 시작한 지 좀 되었는데 왜 두 번째 수업이죠?”

    “일이 좀 있었어요.”

    “…….”

    “저기.”

    나는 아까 하려다 못한 말을 이어서 하기 위해 입을 떼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도 날 가로막는 것이 나타났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

    # 제4 호감도 퀘스트

    제목: ‘사랑은 친구부터.’

    내용: 옆자리 학생 ‘잰퓨어 이브’와 친구가 되시오.

    주의 사항: 친구 관계가 파괴될 시 페널티 적용.

    제한 시간: 1일

    보상: 서사급 아이템

    페널티: 펠리엇과 적대적 관계 형성.

    +

    시스템은 필사적으로 잰퓨어를 밀어 내는 날 비웃기라도 하는 양 완벽한 타이밍에 퀘스트를 내려 주었다.

    이젠 퀘스트가 밉지도 않았다.

    뭐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그래, 보상은 안 받을 수 있다고 치자.

    지금 골드는 넉넉하니까.

    그런데 페널티가, 펠리엇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내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과의 담임이다.

    그리고 꼭 합격할 수 있다며 진심으로 격려해 주던 선생님이다.

    그런 사람과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된다고?

    이건 내 신념과 어긋났다.

    나는 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자들은 기필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아, 물론 다섯 남주인공들 빼고.

    대체 어쩌지, 싶어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잰퓨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대화 정말 재미없고 불쾌하다고 앞으로 말 좀 걸지 말아 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아뇨. 아무것도.”

    나는 복도 바깥 창문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혹시 불쾌해요?”

    “뭐가요?”

    “제가 이러는 거요.”

    무적의 질문이었다.

    여기서 어떤 누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리오.

    “아니요. 하나도.”

    게다가 친구가 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자 그가 은은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대체 알 수가 없었다.

    호감도도 0%인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그…… 수업은 들을 만해요?”

    나는 펠리엇과 절대 척을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고 질문을 했다.

    “질문이 이상하네요? 수업 안 듣다가 쫓겨 나온 사람한테.”

    “……아, 맞네요.”

    오히려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대화가 끊기는 것 같았다.

    “학교는 어때요?”

    ……내용이 참 구리지만 질문거리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좋아요. 엔리에타보다 교정이 더 예뻐요.”

    “그렇구나.”

    나는 또 끊긴 대화에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라는 게 원래 ‘친구 하자!’ 하고 되는 거였나? 그냥 대화하다 보면 되는 게 친구 아닌가…….

    “왜 자꾸 질문해요, 저한테?”

    “네?”

    그가 흥미로운 듯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약간은 긴 듯한 갈색 머리와 귀에 보이는 피어싱이 묘한 섹시함을 주었다.

    그리고 항상 머금고 있는 저 여유로운 미소.

    길을 걸어가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을 외모였다.

    외관으로 따지면 세이먼과 에르셈프가 더 잘생긴 편이긴 했다. 그 둘은 어딜 봐도 완벽하게 생겼으니까.

    그런데 잰퓨어는 개성이 있었다. 분위기도 한몫하고. 오히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상은 이쪽인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얼굴 감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왜 자기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냐고 물었고, 나는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내가 찾은 방법은.

    “친구 하고 싶어서요.”

    대놓고 말하는 거였다.

    내 성격에 이리저리 빙빙 돌리면서 다가가는 것은 맞지 않았다. 답답하기도 했고.

    그러자,

    “네?”

    오히려 상대 쪽이 당황했다.

    하긴 갑자기 친구 하자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친구 해요. 우리.”

    내가 다시 한번 반복했다.

    우리 친구 하자고, 우정이라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호감도가 올랐다.

    잰퓨어가 워낙 아무 감정 없는 사람한테도 말을 잘 걸어서 친구가 되는 정도로는 호감도가 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입꼬리를 당겨 웃는 미소에서 눈부시게 환한 미소로 바꿔 웃었다.

    그러고는,

    “싫어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분명 방금 ‘싫어요’라고 했지 아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구 하자는 제안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사실상 어제부터 말을 텄기에 거의 친구가 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요?”

    짧은 질문이었다.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 대체 아까부터 말은 왜 건 거야?

    의아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저는 연인 될 사람이랑 친구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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