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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23)화 (23/156)
  • 22화. 제3 남자 주인공(1)

    제3 남자 주인공.

    ‘잰퓨어 이브.’

    그는 율리우스 제국 출신으로, 엔리에타 사립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이다.

    옅은 갈색 머리에 초록빛 눈동자.

    게슴츠레한 눈빛을 하고 다니는 그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묘한 신비로움을 풍겼다.

    귀에는 피어싱이 여러 개 자리하고 있었는데, 자칫하면 격이 떨어져 보일 수 있었지만 완벽하게 어울리는 탓에 오히려 그의 자유분방함을 나타내 주었다.

    그는 묘하고 신비로움을 풍기는 얼굴에 맞게 여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남자였다. 입에는 사탕을 문 것처럼 달콤한 말들을 내뱉었고,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그를 다섯 남자 주인공들 중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았었다. 그만큼 그를 쳐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상황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나타날 타이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타난 장소가 여자 기숙사 삼 층 비상구라는 것도 이상했다.

    게임 플레이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잰퓨어……?”

    그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이름을 입 밖에 꺼내선 안 되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는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일어나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고마워요.”

    내가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상태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

    이름: 잰퓨어 이브

    나이: 17

    직위: 엔리에타 사립 아카데미 학생

    호감도: 0%

    +

    그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기숙사 명단에서 봤어요. 소일거리로 기숙사 총무직을 맡고 있거든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엔리에타 사립 아카데미에 다니는 그가 이 기숙사에 살 리는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 덕분이었다.

    ‘자매 교류회.’

    원래라면 여주인공과 이렇게 빠르게 마주치지 않는다. 게임대로라면 육 개월 후니까.

    그런데 내가 게임과 달리 행동해서인지, 미래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히아신스도, 에르셈프도, 다 예정보다 빠르게 만났으니.

    대충 둘러댄 대답에, 잰퓨어는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젠, 내가 물을 차례였다.

    “문을 왜 연 거죠?”

    “그야 사람이 안에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말했다. 안에 사람이 문을 철컥대며 못 열고 있으니 자신이 열어 준 것뿐이라고.

    나도 그것대로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잠자리가 바뀌어서 도통 잘 수가 없어서요.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기숙사 통금이 있지 않나요?”

    “뭐가 문제예요. 몰래 나오면 되는 것을.”

    그는 쿨하게 대답했다.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루나, 어서 가야 할 거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그때 샐라임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리 뒤쪽에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저기,”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이름이 어떻게 돼요?”

    “왜요?”

    그는 뜬금없이 내 이름을 물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짓더니,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언제 적 수법이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학교에서 두 번째라면 서운할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 그렇게 말한다면, 경우가 달랐다.

    “저는 안 본 것 같은데요.”

    “이름 알려 주기가 어렵나 보죠?”

    “굳이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필요해야만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그는 말꼬리를 잡으며 말을 이어 갔다. 흥미로운 눈빛을 한 채 미소를 지닌 그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그만큼 생김새부터 목소리, 행동거지까지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남자였다.

    “루이아나 윌리어스.”

    이름 하나도 못 밝히는 사람인 게 이상해 빠르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음. 그렇구나.”

    그가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밤바람에 그의 옅은 갈색빛 머리가 흩날렸고 녹안이 아름답게 빛났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루나, 어서.”

    그때 샐라임의 두 번째 재촉이 들려왔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빠르게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왔다.

    “누군데?”

    “세 번째 남자 주인공이에요.”

    “왜 그렇게 당황해?”

    “…이런 타이밍에서 만날 줄은 몰랐어서 잠시 놀랐어요.”

    잰퓨어 특유의 분위기에 잠시 홀렸다고 말하지 않으면 거짓말이었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생각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어서 빨리 병동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기숙사인 남쪽 탑에서 나와 광장을 넘어, 본관 옆에 있는 병동에 도착했다.

    늦은 밤의 병동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어 꽤 어두웠다.

    데스크에는 졸고 있는 간호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계단을 타고 503호로 향했다.

    세이먼이 제발 자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시 찾아온 이유를 말해야 할 테니까.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 큰 창에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고, 창가 바로 옆에 놓인 침대에서는 세이먼이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세이먼은 평소에 보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는 부드러운 금색 머리와 날카로운 콧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휴게실 사건을 떠올렸다.

    히아신스에게 모질게 대하며 나에게 달려오던 모습.

    나를 좋아하는 것이겠지.

    세이먼은 게임에서도 다른 남주인공들과 다르게 호감도 대비 애정 공세가 적었다.

    평소에도 다정하기 때문에 누적 호감도가 꽤 높지 않은 이상 가끔 두근거리는 대사를 말하는 정도일 뿐, 돌발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그는 게임을 여는 첫 번째 남자 주인공이자 나를 지옥 같은 저택에서 꺼내 준 조력자였고,

    모든 과에 떨어졌을 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며 먼저 손을 내민 학생회장이었으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나를 자신의 몸을 던져 살려 준 은인이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다.

    그런 그를 모질게 대해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야속하게 다가왔다.

    이런 운명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그를 도와주며 서로 힘을 합칠 수 있었을 텐데.

    “……세이먼 유리츠.”

    얌전하게 자고 있는 저 모습을 보며 그의 속마음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세이먼은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까.

    상냥한 듯하지만 누구보다 날카롭고, 내가 히아신스에게 폭언을 날릴 때 호감도가 오르는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만 갈까요.”

    호기심은 위험했다.

    영원히 엮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것이 오로지 내가 살 길이니. 억지로 인연의 실을 끊어야만 했다.

    [‘솟구치는 감정’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제공됩니다…….]

    [보상으로 ‘마술사의 군화’가 제공되었습니다!]

    나는 타이머가 종료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병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 * *

    세이먼은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줄 알았다.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충분히 밤에 찾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찾아온 사람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루나.’

    그녀는 잠시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병실을 나갔다.

    중간에 내 이름을 한 번 부른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세이먼은 루나가 지켜보는 동안, 수십 번이나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아는 척을 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찾아와 준 그녀와 마주하고 싶었고,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세이먼은 자신의 다친 팔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서류 조작을 통해 루나가 적성 테스트를 떨어지게 만든 것도,

    검법과엔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며 설득한 것도,

    두 번째 테스트 때 중급 몬스터를 부르게 만든 것도 자신이 한 짓이다.

    세이먼은 루나가 정령술과에 들어가는 것이 지독히도 싫었다.

    정령술과 특유의 가족 같고 애정 깊은 분위기에 루나를 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법과에 넣어 매일같이 마주하며,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자신의 손길만을 타며 의지하길 원했는데.

    “…….”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손아귀를 벗어났다.

    만지려고 하면 도망가 버리는 고양이처럼, 밀어 내고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단 테스트 당시 공중에서 떨어지는 루나를 필사적으로 구했던 것은, 그녀가 다치는 꼴은 죽어서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가지고 싶지만 절대 깨져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

    그 모순된 감정이 그를 휩쌌다.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

    이내 세이먼은 히아신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집착 또한 사랑이었기에.

    * * *

    나는 아이템 ‘마술사의 군화’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것은 아이템 창에 들어 있었으며, 동시에 기숙사 옷장 안에 들어 있었다.

    +

    이름: 마술사의 군화

    등급: 서사급

    내용: 종교 전쟁을 하던 세기의 마술사 ‘칼헤이니’가 신던 군화다. 이동 속도가 빨라지며 민첩성이 증가한다.

    +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롱부츠 형태의 군화는 마치 내 것이라는 양 딱 맞게 착용되었다.

    “뭔가 빨라진 것 같아요!”

    “잘 어울리네.”

    실제로 기숙사에서 가장 먼 건물인 정령술과 강의동까지 가던 시간이 약 20% 정도 감소한 것 같았다.

    그렇게 빨라진 걸음으로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잠깐 들여다본 강의실 안에는 처음 보는 갈색빛 교복의 학생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자매 교류회 시작이잖아.”

    아미카 선배가 말해 주었고, 나는 그제야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잰퓨어는 무슨 과일까?’

    게임에서는 적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질 않았기에 그의 적성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정령술과는 아니겠지. 그 마이너 과에.”

    나는 한 번 더 정령술과에 들어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최대한 남주인공들과 마주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니, 강의동도 본관과 뚝 떨어져 있는 정령술과는 어딜 봐도 제격이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없는 것 같았다.

    곧이어 펠리엇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새로 온 학생들이 있으니 출석부터 부르겠다.”

    그는 힘찬 목소리로 내뱉었고, 한 명씩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잰퓨어 이브.”

    “…….”

    “안 왔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잘 들은 게 맞나?

    동명이인인가?

    잰퓨어 이브…라는 이름이 두 명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때, 뒷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선생님, 저 결석 아닙니다.”

    나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오 마이 갓…….’

    뒷문에는,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갈색 머리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빈자리를 찾더니,

    “여기 자리 없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급하게 들어오는지라 내 얼굴을 못 본 것 같았다.

    옆에 앉은 그는 더운지 로브를 벗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그리고 펠리엇이 이내 내 이름을 호명했고,

    “루이아나 윌리어스.”

    “…네.”

    대답하자마자,

    휙.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어제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흥미롭다는 눈매.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짓는 표정.

    “여기서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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