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21)화 (21/156)

20화. 솟구치는 감정(1)

“맨몸으로 싸우다니 대단하구나.”

펠리엇은 내가 정령을 소환하지 않는 모습에 놀랐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령을 소환할 줄 모르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정식으로 정령술과에 합격한 것을 축하한다.”

이젠 당당하게 학교에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더는 학교 밖에서 날 호시탐탐 기다리는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내 몸 하나를 지킬 능력을 키울 때까지는 이 학교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실력자가 되었을 때.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 시스템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다섯 남주인공들에게서 벗어날 수도 있을 테고.

그때부터가 루이아나 삶에 진정한 자유가 찾아오는 날이다!

나는 첫 관문을 돌파했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하고 기뻤다.

테스트를 무사히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그제야 새까매진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샐라임은 아직까지도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일주일 만에 오러를 쓰는 사람은 내 생애 네가 처음이다.”

사실 전투 당시에는 기지를 발휘해 성공한 것이라 하지만 마나 운용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번 연속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나는 샐라임의 부탁에 따라 방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의 자세를 취했다.

‘마나 운용!’

마나는 자연과 가까운 곳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또한 전투를 할 당시 공간이었던 아공간 필드는 마나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정도로 마나의 흐름이 빽빽했다.

하지만 기숙사 방은 달랐다.

“흐읍…….”

푸른빛의 마나가 내 몸의 테두리를 타고 흐르다가 점점 심장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던 마나는 크게 만들어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트러졌다.

전투 당시 자연스럽게 팔을 타고 칼로 흘러가던 마나의 흐름과는 달리 심장 부근에도 크게 모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잘 안 되네요.”

“한 번 성공했으니 연습하면 수월하게 가능할 거야. 오러를 쓰는 정령술사라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고.”

샐라임은 웬일로 칭찬을 해 주었고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령술과 수업은 바로 다음 날부터 참여할 수 있었고, 나는 아침이 밝아오자 첫 수업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마나 운용법’퀘스트가 끝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퀘스트가 도착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열람’을 외쳤다.

+

# 제3 호감도 퀘스트

제목: ‘솟구치는 감정’

내용: 당신을 위해 몸을 던진 ‘세이먼 유리츠’와 병원에서 30분 이상 시간을 보내시오.

제한 시간: 하루

보상: 서사급 아이템

페널티: 정령술과 수업 참여 불가

+

“하…….”

퀘스트를 보자마자 탄식했다.

일단 ‘호감도 퀘스트’라는 점에서였고,

다음은 페널티 부분에서였다.

퀘스트 중에서도 호감도 퀘스트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호감도가 너무 쉽게 오르기도 하고,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서는 내가 억지로 다가가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페널티 부분.

정령술과 수업 참여 불가라고?

이제는 페널티가 골드 차감이 아닌 다른 형태로도 제공되기 시작했다.

기껏 정령술과에 붙었는데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점점 게임 시스템의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과연 네 맘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 같아 재수 없었다.

게다가 제한 시간이 하루였다.

그런데 병원에서 대화를 하라고?

내가 샐라임에게 말했다.

“세이먼이 병원에 있나 봐요.”

“너 받쳐 줄 때 다친 거 아냐?”

샐라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헉!”

만약 그런 것이라면 병문안에 가는 게 도리에 맞았다.

아무리 엮여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해도 나를 구해 주려다가 몸을 다친 사람이라면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수업 끝나고 가 봐야겠어요.”

* * *

“아미카 선배!”

“루나! 드디어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있게 되었구나.”

정령술과는 인원이 적어 다른 과와는 다르게 모든 학년이 합쳐서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배정받은 강의실을 찾아가니 내가 보지 못한 다양한 선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이어 담임 선생인 펠리엇이 도착했다.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등장하는 것이 묘한 실력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저번의 1학년 F반 담임과는 전혀 포스가 달랐다.

학생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동태 같은 눈동자를 가졌던 F반 담임과는 달리 그는 누가 봐도 학생을 통솔하는 지도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신입생이 있어서 소개한다. 나는 ‘펠리엇’이다. 국가 공인 중급 정령술사고, 앞으로 너희들을 가르칠 정령술과의 담임이다.”

짧게 소개한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다들 잘 알고 있다시피 곧 있으면 자매 교류회가 시작된다. 이번에 교류할 학교는 율리우스 제국의 사립 아카데미고, 약 일 년간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번에도 작년이랑 똑같이 진행되나요?”

“그래. 다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간단한 대련도 이루어지고, 친목을 위한 몇 가지 경기 또한 진행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각 나라의 뛰어난 인재들을 소개하고 또 새로운 인재를 발굴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 교류회는 나중에는 마법 협회들의 정치 싸움으로 번진다.

‘그래서 교류회가 끝날 때쯤엔 다들 협회에서 하나같이 눈에 띄었던 학생들을 스카우트해 가려 난리를 치지.’

하여튼, 이 자매 교류회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앞으로의 남은 남주인공들이 이 행사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주인공은 총 두 명.

세이먼 유리츠와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앞으로 호감도가 오르면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선방인 수준이었다.

세이먼과의 호감도는 좀 위험한 수치긴 하지만 나에겐 계획이 있었고, 에르셈프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두려운 것은 다른 남주인공들이었다.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은 셋의 남자 주인공.

이 셋의 공통점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이다.

다정하지만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잘 비추지 못하는 성격인 세이먼과, 확실히 애정 표현에 서투른 에르셈프와 달리, 남은 세 명은 애초에 콘셉트가 여자를 홀리는 타입이었다.

물론 각자 다른 콘셉트로 무장한 채 여주인공에게 다가오지만. 그만큼 대사발도 죽여 줬고, 애정 공세가 남달랐다.

‘잘할 수 있겠지.’

이상하게 벌써부터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 * *

본관 옆에는 학생들을 위한 고층 건물의 병동이 있었다.

나는 일 층 로비의 데스크로 향한 뒤 접수원에게 물었다.

“여기 세이먼 유리츠라는 환자 있나요?”

“503호로 가 보세요.”

짧은 대답을 들은 나는 계단을 올라 오 층에 다다랐다.

병문안인데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 민망했지만 호감도가 오를 걸 생각하니 그 무엇도 준비할 수 없었다.

똑똑.

503호 앞에 선 내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는 ‘세이먼 유리츠’라고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끼익.

노크를 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세이먼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뽐내며 햇살이 비치는 창가의 침대에 앉아 있는 그는 무릎에 작은 고양이를 올려놓은 채였다.

“루, 루나!”

그는 내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 상냥하거나, 진지한 모습처럼 각이 잡힌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환자복을 입은 채 무방비 상태로 있는 그를 보니 꽤 신선했다.

“다쳤다고 들어서 왔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

“누, 누가 알려 줬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태연하게 둘러댔다.

“팔을 다친 것 같다고 들어서 혹시나 하고 병원에 와 봤는데 세이먼이 있다고 해서요.”

그럴싸했던 것이 세이먼은 양팔에 모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나를 받으면서 팔을 세게 부딪힌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다리는 멀쩡해 보이는 것이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금 갔나요? 인대 손상?”

“……골절이요.”

“치료 기간은요? 한 달?”

“……두 달이지만 정말 괜찮아요, 저는.”

검을 쓰는 사람에게 팔 골절이란 엄청난 부상을 의미했다. 한 달 반이나 수업에 지장이 생길뿐더러 그 후에도 굳은 근육을 부드럽게 하는 재활 치료까지 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너무, 너무 미안해서 어쩌죠. 저 때문에 그런 것 맞죠?”

내가 울상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를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민폐를 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 그가 다치지 않았다면 내가 저 정도 부상을 당했을 것이었다.

아니 학장은 미친 거 아니야? 그 높이에서 몬스터를 없애 버리다니.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마음 쓸 필요 전혀 없어요.”

세이먼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

그리고 대화가 끝난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지만 호감도가 오를까 봐 무슨 말이든 쉽게 꺼내지 못했고,

세이먼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무언가 편하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지는 이제야 오 분이 지나고 있었다.

삼십 분 동안 시간을 보내야 하니,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것이다.

대체 어떤 말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지?

그때, 눈에 세이먼 품에 있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세이먼의 고양이인가요? 새끼인가 봐요.”

그러자 그는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학교에 사는 고양이인데, 제가 자주 챙겨 줘서 이렇게 가끔씩 데리고 있어요.”

고양이는 그의 품이 편한지 야옹, 거리며 갸르릉 대고 있었다.

“한번 만져 볼래요?”

그렇게 나는 세이먼에게 고양이를 건네받아 품에 안아 들었다.

“얌전히 있어야 해.”

물렁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의 고양이는 세이먼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아주 얌전한 자세로 나에게 안겨 있었다. 그때,

똑똑.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병실 문이 열렸다.

“식사 시간이에요.”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움직임이 불편한 세이먼을 위해 간호사가 직접 식사를 가져온 것이었다.

“어머, 오늘은 여자친구분께서 먹여 주시면 되겠네요.”

그러고는 간호사는 빙긋, 웃으며 나를 향해 말하였다.

누가 봐도 이렇게 어색한 분위긴데, 여자친구요?

그러자 세이먼이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간호사에게 말하였다.

“고마워요.”

원래는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세이먼에게 간호사가 직접 밥을 먹여 준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여자친구분이 있으니 직접 먹여 주시면 되겠다면서 간호사는 바쁜지 휙, 병실을 나가 버렸다.

“…….”

세이먼의 앞에는 식판이 놓여 있었고, 나는 그걸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며,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먹여 줘요. 루나.”

그리고 나는 재빨리 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41%

+

그랬다. 세이먼은 세이프 라인인 30%를 넘어도 한참을 넘긴 수치였다.

아까는 이상하게 상황이 불편한 것처럼 행동하더니, 이제는 금세 적응했는지 세이먼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먹여 달라고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네……?!”

내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여전히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깁스로 칭칭 감겨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몸짓.

나는 퀘스트를 위해 30분을 채워야 했고, 그는 나에게 밥을 먹여 달라고 하고 있었다.

제한 시간이 오늘 하루인지라 지금 기회가 끝나면 페널티를 받아야 했다. 무려 정령술과 수업 참여 금지라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이먼에게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누군가에게 밥을 먹여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승이나 잘 챙길 것이지, 외간 남자한테 밥이나 먹여 주고 있네.”

허리춤에서 샐라임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구요.

나는 숟가락을 든 채 수프를 한 숟갈 떠 올렸다.

세이먼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고,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루나가 먹여 주면 더 맛있을 것 같아요.”

아니,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가고 있을 때였다.

벌컥!

다시 한번 병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별 짓거리를 다 하는구나?”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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