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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9)화 (19/156)

18화. 또 한 번의 기회(2)

나와 에르셈프는 서로를 향해 인사를 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서로에게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기에.

그는 무표정하지만, 그렇다고 무신경하지도 않았다.

시작은 내가 먼저였다.

온 힘을 다해 그에게로 달려가 검을 세웠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목검으로 나를 방어했다.

탁! 탁!

숏 소드와 목검이 맞닿으며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몇 번의 합.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의 빈 부분을 노리고자 몸을 돌렸다.

빙글, 돌며 그의 목을 향하자 에르셈프가 검을 가로로 세워 다시 한번 검을 쳐냈다.

그는 여유로운 몸짓이었지만 절대 쉬이 여기는 건 아닌 듯했다.

진지하고 날카로운 눈빛.

나는 그에게 다가가 검을 겨눌 때마다 어김없이 막혔고, 그는 공격을 하지 않은 채 수비만을 이어 갔다.

탁! 탁! 탁!

공격을 일관하는 내 모습에 에르셈프는 계속해서 뒤로 발이 밀렸고, 나는 굴하지 않고 힘을 주어 그의 목을 향해 겨눴다.

그렇게 몇 번의 합이 이루어졌을까, 에르셈프는 조금 더 진지해진 모습으로 뒤로 점프하여 물러섰다.

“실력이 나쁘지 않군.”

“영광입니다.”

요 며칠간에 연습한 것이 다였다.

그래서 나에겐 일정한 공격 패턴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되는대로 쑤시고 보는 것이었다.

물론 방어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와 내가 서로 달려오며 칼을 맞부딪치자 목검이 갈라질 듯이 큰 소리를 울렸다.

하지만 어림없는 법.

그는 회색 머리를 휘날리며 나의 공격을 계속해서 받아 냈다. 그러던 도중,

“여기가 비어.”

내가 팔을 높이 들어 내려치려고 했을 당시 그가 검의 각도를 미세하게 변경하며 나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위험하겠지.”

그러고는 뒤로 물러서며 칼을 물렸다. 나는 다시 한번 입술을 꽉 깨물고는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탁! 

그와 나의 검이 맞부딪히고 이번엔 힘겨루기가 들어갔다.

숏 소드를 잡은 내가 훨씬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악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파르르르.

허공에서 검끼리 붙어 크게 진동하며 소리를 내었다.

“이럴 땐 검을 비트는 게 낫지.”

그러더니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아들은 내가 금세 칼을 비틀어 그의 목검을 빗겨 내자 그가 뒤로 물러섰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달려들었다.

이미 손에는 감각이 사라져 내가 이 칼을 들고 있는지 인지가 되지도 않았다. 본능적인 움직임뿐이었다.

내가 멀리서부터 그의 얼굴을 향해 달려가 점프를 하며 칼을 겨누자 그는 목검으로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서 막았고, 때문에 나와 그는 고개가 아주 가까워진 상태가 되었다.

코가 닿을 정도의 가까워진 상태.

그리고 그 옆으론 두 개의 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눈동자 안에 내가 비칠 정도로 짧은 거리.

나는 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살기 어린 눈동자로 그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으며 손에서 칼을 놓을 뻔했다. 악력이 거의 다 떨어진 탓이었다.

칼이 교차되고 있던 때에 한쪽 검이 힘을 잃자 에르셈프의 목검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에르셈프가 내가 목검에 다치지 않기 위해 손으로 나의 허리를 받쳐 주었다.

때문에 나는 칼을 땅으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고 그는 자신의 목검을 거꾸로 잡으며 나를 부축하는 것을 도왔다.

이미 오른손에 감각이 없었고,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런.”

에르셈프는 내 팔 안에 자신의 팔을 집어넣어 내가 움직이는 것을 도왔다.

그때,

나의 체력은 고갈됐지만 나의 머릿속은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의 보호 본능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손에 힘을 잃고 칼을 떨어뜨린 것은 우연이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 보호 본능을 일으킬 순 없었다.

성공했다면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을 테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할 수 있다. 방법이 있을 거다. 분명.

보호 본능이라고 했다.

보호 본능이라함은 즉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만드는 것.

하지만 대련 중에는 내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대했기 때문에 보호 본능을 유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검술 실력을 올리기 위한 것이 이 대련의 목표였으니까. 퀘스트는 그다음이고.

그렇다면 대련 직후에 보호 본능을 일으켜야 하는데…….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검을 쓴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나쁘지는 않아.”

그는 의외로 칭찬을 해 주었다.

칭찬 맞지?

“섬세함이 바닥이긴 하지만.”

아닌가.

하늘을 보며 바람을 쐬는 그는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공격은 전부 제가 했는데 헉헉대는 건 제 쪽이네요.”

내가 아직도 가쁜 숨을 고르며 그에게 가볍게 웃었다.

실력 좋은 상대와 대련을 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를 죽일 듯이 다가와서 안 막을 수가 없더군. 실제로 죽이기라도 하려 했나?”

“하하, 설마요. 궁으로 잡혀가는 건 사양입니다.”

그는 잔디밭 위에 나를 조심스레 앉혀 주고는, 자신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

말은 툭툭 내뱉었지만 행동에는 배려가 묻어 있었다.

“무슨 일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지?”

“입단 테스트를 봐야 해서요. 복잡한 일이 좀 있었네요.”

나는 짧지만 퉁명스럽지 않도록 유의하며 대답했다.

그때 내가 손바닥을 땅에 대며 몸을 지탱하려고 했을 때였다.

“아야!”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왔다.

바닥에 댄 오른손이 너무나도 쓰라렸다.

“어디 봐 봐.”

에르셈프가 내 손을 가져가 손바닥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온갖 상처가 짓무르고 터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런, 장갑이라도 끼고 해야 하는 걸 모르는 건가?”

“그런 게 있는 줄 모르고…….”

처참한 손을 보고 그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온 것은 하얀 붕대와 손수건.

그는 손수건으로 나의 피를 닦아 주었다. 면이 살에 닿을 때마다 아파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최대한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

“아……아…….”

그는 붕대를 풀어 내 손에 칭칭 감아 주었다.

자신의 손에 많이 해 보았는지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여자 손이 엉망진창이군.”

나는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고통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옆에서 에르셈프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보고 싶지 않은 걸 봤다는 듯 찌푸린 인상과 씁쓸한 표정.

그는 빤히 내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덧나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갈아 줘야 해.”

착각이었을까, 그의 말투가 왠지 모르게 다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하도 틱틱거리니 저런 말만 해도 괜찮아 보이는 건가.

“그런 걸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내 상처에 신경 써 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혼자 살아가기에도 벅찬데.

그러자 에르셈프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흔한 친구 한 명도 없는 건가?”

“무슨 말씀이세요, 친구가 없다뇨!”

순간적으로 친구가 없냐는 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생에서도, 이생에서도 친구 없는 거 맞는데, 진짜 확인 사살당하니 괜히 발끈하게 되는 것이다. 아픈 부분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에르셈프의 얼굴이 착 가라앉았다.

장난스럽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무거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미소가 기쁨의 미소는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가득 묻어 있는 입꼬리.

“…….”

그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나 또한 그의 반응에 말을 잃었다가, 이내 대답했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셈프에게 무어라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붕대를 감아 줄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걸요.”

“……?”

그러자 에르셈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던 회색 눈꺼풀이 걷히며 예쁜 보라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드러났다.

그가 약간은 떨리는 눈동자로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에 괜스레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왕자님이 없었더라면 전 붕대도 못 감았을 거예요.”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였다.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가 당신에게 보호 본능을 느꼈습니다.]

[‘여자의 무기’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모든 빚이 상쇄됩니다…….]

[보유 골드는 아이템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가 10% 상승했습니다!]

갑자기 시스템 음성이 연달아 울리더니 내 눈앞에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표시가 떠올랐다.

동시에 동그란 표정을 짓고 있던 에르셈프가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고는 앙칼진 고양이처럼 내뱉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감히 나랑 무슨 사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에르셈프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에르셈프가 나에게 보호 본능을 느꼈다니!

완전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잖아?

에르셈프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이라도 한 걸까.

그의 표정이 아주 묘했는데.

과거에라도 잠긴 사람처럼, 추억이라도 상기시키는 사람처럼 아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상처라도 떠올린 걸까?

게임상에서는 그가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는 설정만 나올 뿐 그 이상의 정보는 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잠깐만, 그런데 지금 호감도가 몇 퍼센트가 올랐다고 했지?

10%?!

이럴 수가, 그럼 도합 15%? 갑자기 이렇게 훌쩍 올라 버린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머리를 싸맸다.

퀘스트를 해결한 건 좋았다. 좋았는데…….

그때,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호감도가 오른 남자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바뀐다는 것.

“…루나라고 불러도 되나?”

내가 그를 쳐다보자마자 느낀 건, 그의 눈빛부터 달라져 있다는 것이었다.

호감 어린 눈동자와 나를 궁금해하는 듯한 눈빛.

사람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진심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의 유려한 보랏빛 눈이 나를 향했고, 나는 순간 그 눈길에 당황했다. 아무래도 최애였기도 했고, 이렇게 가까이서 뚫어져라 쳐다보니 몸이 얼어 버린 것이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야, 자기 얼굴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건가?’

나는 속으로 내 머리를 팡팡 때리고는 그를 향했다.

사실 나를 루나라고 부르는 것은 허락받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나를 루나라 불렀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네.”

짧게 대답하자, 에르셈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더 성큼, 다가왔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줘.”

“…….”

“에르셈프, 라고.”

그는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이 쑥스러운지 볼을 붉히며 말을 했다.

정말 매력적인 모습이어서 누가 보면 바로 사랑에 빠질 법한 그런 수줍음이었다.

물론 나는 예외지만.

“어떻게 전하의 존함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같은 학생이잖아, 우리. 불러 봐. 내 이름.”

내 반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나는 탄식했다.

하지만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 있었다.

‘호감도가 15%라는 것은 절대 애정까지는 아니라는 뜻. 30%를 세이프 라인이라고 보면 그리 안 좋은 수치는 아니야.’

나는 고작 이름 가지고 ‘못 부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 그냥 덤덤하게 내뱉어주었다.

“에르셈프.”

정말 촉촉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메말라 갈라져 버린 땅과 같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누가 들으면 상대를 싫어하느냐고 물어볼 정도의 목소리.

그런데, 에르셈프는 아니었나 보다.

내가 이름을 부르고 약 삼십 초 뒤,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이럴 수가…….’

호감도가 오른다는 음성을 들을 때마다 아주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그럼 20%?’

세이프 라인까지 열 걸음 남았다.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입술을 깨물며 그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좋으면 인상을 찌푸리는 편인가?

그는 미간을 좁힌 채, 하지만 얼굴은 붉어진 채로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에르셈프는 좋은 걸 좋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편이었지.

호감도가 오를 때마다 화를 내는 게임 속 일러스트만 보다가 이렇게 실제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감정 표현이 서툰 것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줄이야.

왕자만 아니었다면 엄청나게 괴롭히고 싶었을 거다.

그때, 에르셈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고작 이런 거에 다친다니, 다음부터 대련 같은 거는 하고 싶지 않군!”

“네……?”

뭐야, 지금까지 잘만 이야기하다가 왜 화를 내는 거지?

내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에르셈프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휘잉.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나와 그를 휘감고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나는 귀 뒤로 머리를 넘겼고, 그 모습을 에르셈프가 빤히 쳐다보고 있던 줄은 몰랐다.

“…….”

여름의 오후 다섯 시 경, 푸른 들판 위에서 맞는 바람은 상쾌하고 싱그러웠다.

에르셈프 때문인지 이곳에선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건 내 숨이 온전히 돌아오자마자였다.

뭐 하는 거야. 얼른 에르셈프를 보내야 해.

벌떡.

나는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은발이 가볍게 흔들렸고,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을 에르셈프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만 가셔야죠. 늦었습니다.”

“……그러지.”

나는 치마를 잡고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고, 그도 손을 올리며 인사를 해 주었다.

그가 떠나고, 나는 지친 눈동자로 푸른 들판을 응시했다.

“뭐 하냐?”

샐라임의 목소리였다.

“뭐가요.”

“아주 연애를 하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지금 잘생긴 남자 밀어 내는 것도 아까워 죽겠구만.”

“……잘생긴 게 그렇게 좋냐?”

“잘생긴 게 최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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