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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6)화 (16/156)
  • 15화. 제안(2)

    그 후로 샐라임과 나는 매일매일, 일 분 일 초 함께하는 운명이 되었다.

    불의 친화력이 강한 내가 옆에 있어야만 말을 할 수 있는 샐라임은 항상 내 곁에 있길 바랐고, 나 또한 검을 허리에 차고 다녀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어젯밤, 나는 샐라임에게 나의 환생과 운명에 대해서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수 없이 고민한 결과였다.

    밤새 생각했지만,

    ‘정령이 뒤통수를 때리진 않겠지.’

    게다가 나를 키워 준다고 하니 오히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가는 것에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정령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일관했다. 정령이 소환되는 것이나 인간이 환생하는 것이나 뭐가 다르냐면서.

    샐라임은 천 년이나 살아서 그런지 웬만한 일에 쿨하고 무던했다. 나는 그런 성격이 마음에 들어 그와 금세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다만 가끔씩 그가 오기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들어가기 싫다고.”

    “들어가셔야 해요. 그래야 제가 차고 다니죠.”

    칼을 검집에 넣어야 할 때였다.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억지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뒤 허리에 찼다. 그러자 검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날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무엄하다.”

    혹시라도 샐라임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까 걱정했지만, 불의 친화력이 센 나에게만 들리는 것이어서 마음을 놓았다.

    이 정령은 말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좀 하세요.”

    또한 이 정령은 상식이 조금 특이했는데,

    지나가다가 히아신스를 마주쳤을 때였다.

    그녀는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나에게로 다가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검법과에 들어가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거야.”

    “들어가라고 해도 안 들어가. 그리고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그건 모르지. 앞에선 맨날 아닌 척하다가 막상 상황이 되면 여우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치는 게 네 습관이잖아.”

    “너 좋을 대로 생각해. 나는 정령술과에 들어갔으니까.”

    “뭐?! 하하하!”

    정령술과에 들어갔다고 말하자 그녀는 배를 잡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완전 무너져 가는 초상집에 들어가는 바보가 여기 있었네? 달린 머리로 생각이란 걸 좀 해 봐.”

    “너나 달린 머리가 있으면 네 앞길이나 걱정해. 또 F반 가도 되겠어?”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아치자 그녀는 혼자 흥분해서는 씩씩댔다.

    히아신스는 내가 세이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행동거지가 잠잠해졌다.

    사실 이 정도 시비는 약과에 불과했다. 원래 게임에 나오는 히아신스의 본성을 알기에, 저런 비아냥은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아직 호감도가 낮기 때문에 저 정도의 시비만 거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히아신스를 무시하며 그녀를 지나쳐 왔을 때였다.

    “쟤 왜 저래?”

    샐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저래요.”

    그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쁜 애야?”

    나는 그의 질문에 곰곰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나쁜 쪽에 가깝…지 아마?

    “나쁘다면 나쁘고…….”

    “그럼 죽여 버려.”

    “?”

    “뭐가 문제야?”

    “…….”

    그는 ‘배고프니 밥 먹자.’와 같은 말투로 내뱉었다.

    그에게는 특이한 사고방식이 있었다. 바로 선과 악의 경계가 아주 뚜렷하다는 점이었는데, 이를테면 악한 사람은 무조건 죽여도 된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무슨 정령이 이래…….”

    정령은 좀 더 선하고, 신성한 존재인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생각보다 화끈한 그의 사고방식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금방 적응되긴 했지만.

    “여긴 죽이고 싶다고 막 죽여도 되는 곳이 아니랍니다.”

    샐라임은 입을 쩝 다시며 대답했다.

    “…재수 없던데.”

    칼에 봉인 당하기 전에는 얼마나 난리를 치고 다녔을 정령일지 안 봐도 상상이 되었다.

    전쟁터를 통째로 불태워 봉인 당했다고 하니 말 다 했지.

    그렇게 나는 샐라임과 함께 꿀 같은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덕에 학교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며 산책도 하고, 빌어먹을 퀘스트도 없는 덕에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미카 선배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루나!”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휙 돌아봤다.

    새까만 똑 단발,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렀다.

    “찾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무슨 일 있어요, 선배?”

    그러자 선배는 내 어깨를 붙잡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루나, 왜 합격자 명단에 네 이름이 없는 거야?”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서류를 제출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올해 정령술과엔 아무런 신입생이 없다고 공문이 온 거야. 폐지될 예정이라고.”

    “?”

    “합격 처리가 안 되었나 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테스트를 합격했다고 손을 잡아 주면서 축하해 주던 게 몇 분 전인 것만 같은데 내 합격 처리가 안 되었다니?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애들도 하나같이 이상하다고 얘기하던 중이었다고.”

    내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자 아미카 선배는 너무 걱정스러운 말을 했나, 싶어 나를 다독였다.

    “분명 무슨 오류가 있었을 거야. 학생회실에 가서 물어보자.”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검법과에 들어가라는 퀘스트를 무시해서 생긴 일은 아니겠지?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게임 시스템이 페널티까지 주고 끝낸 걸 억지로 바꿀 리는 없을 텐데…….

    아미카 선배는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는 든든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학생회실로 찾아갔다.

    주말이어서 아무도 없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노크를 하자 안에 사람이 있다는 반응이 들려왔다.

    벌컥.

    문을 열고 맞이해 준 사람은 세이먼이었다.

    “세이먼.”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얼굴로 문을 열어 준 그는 내 얼굴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에요, 루나?”

    아미카 선배는 대답 대신 내 손을 이끌고는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나 대신 입을 열었다.

    “루나의 정령술과 배정 처리가 잘못된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왔어.”

    선배는 세이먼과 이미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반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학생회를 자주 접한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음……. 찾아볼게.”

    세이먼은 다짜고짜 찾아와서 배정 처리에 관해 묻는 우리에게 아무런 불만도 내비치지 않았다. 여느 다른 학생들이 세이먼에게 부탁을 요구할 때처럼 상냥한 반응을 보였다.

    빼곡하게 쌓인 학생 기록부 더미를 찾아보던 세이먼이 이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루나, 네가 속한 과가 없어. 테스트를 보지 않은 거야?”

    그러자 아미카 선배가 되레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여기 찾아온 이유가 정령술과에서 본 테스트 처리가 잘 못 되어서 온 거라니까?”

    “…….”

    소리를 지르는 선배를 흘끗 쳐다본 세이먼은 그녀의 반응을 받아 주지 않았다.

    다짜고짜 화를 내는 그녀에게 한마디 할 법도 했지만 그는 여전한 얼굴로 시선을 나에게 돌릴 뿐이었다.

    “선배 말이 맞아요. 합격자 명단에 제가 없어요.”

    “좀 더 확인해 볼게.”

    그러고는 서류를 몇 번 뒤적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루나, 네 정령술과 테스트가 무효 처리되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졌다.

    “가산점 제도는 폐지된 지 오래야. 그래서 성적 미달로 탈락 처리가 되었어.”

    “그, 그게 무슨 소리지? 가산점 제도가 없어졌다니.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어.”

    그제야 세이먼은 아미카 선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쯤 감긴 눈꺼풀이 상대방을 내리깔아 보는 듯했고, 평소와 달리 포물선을 그리지 않는 입꼬리 때문인지 굉장히 딱딱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일 학년을 받은 지 오래되어서 몰랐나 보네. 사라진 지 몇 년 되었어.”

    “그럴 수가……!”

    나와 아미카 선배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이런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려 준다는 상황을 참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세이먼,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배정받은 과가 아무 곳도 없다면……!”

    “상황이 너무 유감스럽지만…… 보통 학교에서 퇴출을 당해요.”

    그의 말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퇴출이라고?

    학교에서 퇴출을 당한다면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돈도 없기에 길거리에 나앉아야만 하는 신세가 될 것이었다.

    게다가 나를 쫓는 밀리센트 가문을 막아 줄 수단도 없었다.

    지금은 학교 안이어서 내가 학생 신분으로 보호를 받는다지만, 그게 아니라면 난 머지않아 그들의 손아귀에 잡힐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타국의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인가?

    “루나…….”

    세이먼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미안하다는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법은 없어. 내가 항의해 볼게.”

    아미카 선배는 미간을 있는 대로 잔뜩 찌푸리며 세이먼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에게 잘못이 있는 것 같다는 시선이었다.

    “이리 와, 루나. 교무실로 가 보자.”

    그러고는 나에게 이리 오라며 밖으로 나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운명이 코웃음을 치듯,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선배는 세이먼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도 선배를 따라서 문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세이먼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소용없을 거예요, 루나.”

    “…….”

    우뚝, 발걸음을 멈춘 내가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한 번 탈락한 테스트는 그걸로 끝이니까. 한 번도 번복된 사례를 본 적이 없어요.”

    그의 말은 야속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 보겠다는 아미카 선배와는 달리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말을 주절거렸기 때문이다.

    “…그럼 이대로 학교를 나가라는 말인가요?”

    나는 대답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한다. 분명 답이 있을 거다, 답이…….

    “…검법과에 들어오는 건 어때요?”

    “…네?”

    “내가 자리 하나는 마련해 줄 수 있어요. 검법과라면.”

    나는 문을 바라본 채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검법과라니.

    무조건 피하고 싶은 미래였지만 퇴출보다는 나았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최선일까?

    혼란스러웠다.

    세이먼의 말도, 퀘스트도 전부 나를 검법과로 이끌어 가려 했다. 그래서,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말은 고맙지만, 일단 해 볼 수 있는 걸 해 볼게요.”

    그러자 세이먼은 나를 몇 초 정도 응시했다.

    “……알겠어요.”

    나는 아미카 선배를 따라 문밖으로 나갔다.

    선배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덥석 잡고는 교무실에 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는 학생회실에서 멀어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수상해.”

    “뭐가요?”

    “세이먼 유리츠 말이야.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수상하기 짝이 없다고.”

    그녀는 손톱을 깨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이 상황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세이먼이라고 했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어.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아미카 선배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이먼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환생한 뒤로 항상 도움을 주던 사람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매번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하던 사람.

    “…….”

    나는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잠자코 생각에 몰두했다.

    그러고는 교무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번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단다. 행사가 이틀씩이나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고.”

    단호한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가산점 제도에 대해서 몰랐던 너희들이 잘못이라는 선생의 말에 선배는 이건 말도 안 된다며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터덜터덜 교무실을 나온 우리는 둘 다 축 처진 몸으로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선배는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내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학장실……?’

    정면으로 보이는 복도 끝에 학장실이 보였다.

    교무실과는 달리 양각이 화려하게 새겨져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선배, 어쩌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대꾸를 하지 않은 채 학장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학장과 나는…….

    “기다려 봐요.”

    거래한 것이 있었다.

    그걸 잘 활용하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는 아미카 선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를 반겨 주는 선배들을 향해, 당당하게 반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똑똑.

    두꺼운 학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들어와.”

    짧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나는 떨리는 동시에 은근한 자신감으로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오랜만에 보이는 풍경.

    묘하게 세이먼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필립 유리츠가 책상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를 갖춰 인사를 가볍게 한 뒤, 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제 배정이 무효 처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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