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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5)화 (15/156)

14화. 제안(1)

에르셈프는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거처인 동궁으로 돌아왔다.

“전하, 목욕물을 준비해 놓을까요?”

왕궁에 도착한 그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

에르셈프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뛰어난 무예 능력을 타고난 남자였다.

다른 형제들보다 현저하게 높은 수준을 보였고, 열 살이나 더 많은 궁정 기사들보다 더 뛰어났다. 총기사단장이 혀를 내두르며 몇백 년 만에 나올 인재라고 칭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칭찬을 들으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에겐, 왕실 기사단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친위대를 만들 수 있는 자격도 없었다.

바로 오 년 전 베라일 공국의 침입 사건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 때문에 에르셈프의 인생은 꼬여 버렸다.

“에르셈프, 못난 네놈 때문에 내 아내가 죽었다.”

왕은 자신의 아내가 에르셈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왕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왕실의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

아버지가 이 년 만에 그에게 얼굴을 보자고 하였다.

자신을 미워하는 아버지에게 증오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애정을 바랐던 에르셈프는 떨리지만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께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차갑게 식은 얼굴로 동궁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자랄수록 네가 죽인 내 부인을 더 닮아 가는구나. 앞으로는 내 눈에 띄지 말고 살거라. 쥐 죽은 듯이 살다가 혼기가 되면 타국으로 나가.”

다시는 얼굴을 내비치지 말라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고.

오해라고, 또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들어 주지 않았다.

“전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직접 옷을 차례차례 벗었다. 그를 도와주는 시종들은 차고 넘쳤지만 그가 다 무른 탓이었다.

그는 재킷을 벗던 도중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

손수건이었다.

루이아나라는 아이가 준 손수건.

면 소재로 된 그것은 실크에 비해 아주 거칠고 수수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손수건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그가 한 나라의 왕자라는 사실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는 금세 탈의를 하고는 시종이 준비해 둔 목욕물 안으로 들어갔다.

팔에는 여전히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꿰맸지만 또다시 터져 버린 그곳.

두 번째 형인 팔렌티움이 낸 상처다.

“가족을 죽인 살인자인 네가 왜 아직도 왕궁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막강한 힘을 가진 자신이 혹시나 왕권을 노릴까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 뻔했다.

다짜고짜 칼을 들이밀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형은 발끈하는 자신에게 긴 칼자국을 남긴 채 사라졌다.

“에르셈프? 그런 공기보다 못한 놈이 내 동생이었던가?”

왕세자인 레비온은 에르셈프를 없는 사람 취급한 지 오래였다.

에르셈프는 그 누구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다. 이보다 더 초라한 것이 있을까.

돈도, 명예도 모두 가졌지만 자신은 날개가 부러져 거친 땅바닥에 처박힌 새 같았다.

“…….”

그는 자신의 상처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손수건을 건네주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별 볼 일 없는 작은 아이였지만 당찬 몸짓으로 자신을 막아 주던 모습. 계란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을 대하던 모습. 피 흐르는 상처를 매만져 주던 모습 모두.

그에겐 신기하게 다가왔다.

태어나서 받은 취급이라고는 모두 다 무늬만 좋은 제3 왕자 대우뿐이었다. 그 어떤 정치 세력에도 가담할 수 없는 아무 힘 없는 빛 좋은 개살구.

배경과 외관을 보고 그저 환심을 사서 왕족의 피를 이어받겠다는 사람들만이 다가오곤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루나를 떠올렸다.

타인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호기심이 갔다.

“여봐라.”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시종장을 불렀다. 그러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를 찾아보아라.”

* * *

“악!”

기숙사로 돌아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검의 기운에 허리에 찬 검을 침대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이것 때문에 허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계속해서 자신을 표출하는 듯이 강한 기운을 내뿜는 검 때문에 테스트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대체 뭐지?”

침대에 내려놓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기운이 느껴졌다. 검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듯한 큰 공명.

나는 이리저리 쳐다보며 대체 이 평범하게 생긴 검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있었다.

당최 감이 오지 않는 탓에 끙 소리를 내며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검이 계속해서 난리를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어… 달라는 건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었다.

그러자,

“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악!!”

검이 말을 하는 까닭에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검은 이제야 좀 낫다는 듯 아까부터 공기를 통해 진동을 보내던 것을 멈추었다.

그나마 나아진 상황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검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 갑갑한 껍데기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냐?!”

“말… 말을 해… 검이…….”

“아까부터 계속 신호를 보냈건만, 알아듣지도 못하고. 인간 주제에.”

그는 마치 아주 불만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놓여 있는 검이었지만 마구 날뛰는 소년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게 그 유명한 에고 소드라는 건가……? 검이 말을 한다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어……?’

나는 너무 놀라운 마음에 검을 집으려고 했다. 손에 쥐어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앗 뜨거워!!”

검은 엄청나게 높은 고온으로, 손에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뭐야!! 왜 이렇게 뜨거워!”

“함부로 손대지 말아라, 인간.”

나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주인인 줄도 모르고 인간, 뭐, 뭐?

검은 마치 아주 도도한 여우처럼 흥, 하고는 등을 돌리는 것 같았다. 물론 다 내 상상이다. 검은 아까부터 침대에 가만히 올려져 있었다.

“왜… 왜 말을 하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입이 있으니까 말을 하지.”

검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삼백 년 만에 드디어 나왔네. 아주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삼백… 년?”

이 낡고 평범한 검이 삼백 년이나 된 검이었다니, 무기점에서 별생각 없이 고른 검인데 엄청나게 대박인 아이템을 골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 성격 꼬락서니를 봐서는 잘 고른 게 맞나 의문이긴 한데.

“내 이름은 샐라임이다. 불의 상급 정령이지. 보다시피 불행하게도 이 낡은 검에 갇혀 있다.”

검은 자신을 불의 정령이라고 소개했다.

아까 정령술과에 가서 시험을 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어쩌다 갇힌 건데요?”

왠지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삼백 년 동안 갇혀 있었다니. 그럼 적어도 삼백 살 이상이라는 거잖아.

“삼백 년 전에 전쟁터에서 나라 하나를 불태웠다가 칼에 봉인을 당했지. 그리고 이 검이 돌고 돌아 너에게까지 들어오게 된 거다.”

“그럼 삼백 년 동안 아무도 못 만난 거예요? 너무 낡아 빠져서?”

그러자, 검이 다시 한번 발끈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지.”

나는 갑작스러운 에고 소드의 등장과 그의 말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잠시 미쳐서 무생물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를 팡팡 내리쳐 봐도 꿈은 아니었다.

“…뭐 하냐?”

“꿈인가 해서요.”

그러자 검이 비웃었다. 검 주제에 웃음을 지을 줄도 알다니.

“방금 내가 웃은 거에 놀랐지?”

“히익, 어떻게 알았어요?”

“야, 삼백 년 짬밥이면 지나가던 개 속마음도 알아채는 법이다, 꼬마야.”

“…으. 꼰대.”

“뭐? 그게 뭔데?”

나는 그의 질문에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았고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그럼 아까 과에서 테스트할 때 왜 그렇게 진동한 거예요?”

“허접 정령 무리들이 내 앞에 있으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은 거다! 아까 네 주위를 배회하던 정령도 나랑 한번 대화하더니 바로 꼬리 내리고 너한테로 안기던 걸 못 봤냐?”

검은 아주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태도를 일관했다. 자신을 그런 나부랭이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듯이, 그리고 자신을 만난 걸 영광이라고 여기라는 듯이.

“그런데 왜 삼백 년 만에 말을 한 거예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면서요.”

“…….”

그러자 아까부터 말을 쉴 새 없이 나불대던 검의 입이 귀신같게도 다물렸다.

“딱 까놓고 말하마, 꼬마야. 너처럼 불의 친화력이 강한 사람은 내 천 년 인생 평생 두 번째다.”

“……?”

검의 외관을 유심히 살피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의 친화력이 뭐 어쨌다고요?

“원래 정령은 한 번 봉인당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웬걸, 친화력이 오버 보태서 드래곤 만큼 강한 여자애가 나타났지 뭐야.”

“……그래서요?”

“그래서 얼른 날 잡아가라고 소리쳤지. 무기점에서. 날 얻으라고! 그럼 넌 인생 핀다고!”

검은 마치 주위를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아이처럼 신나서는 대답했다.

“나도 운이 좋았지. 네가 불의 친화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서 나도 에고를 표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런 인간을 또 만나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낡아 빠진 검에서 삼백 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군. 뭐, 그러니 내 입장에서도 너를 만난 게 다…행, 아니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거다.”

나는 나불나불 중얼거리는 샐라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뜨거워서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무슨 다행이라는 거예요.”

“다행이라고 한 적 없다! 그리고 네가 나 같은 몸을 함부로 손대려 하니까 거부한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러자 샐라임은 잠시 입을 멈추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꼬마야, 나와 계약을 하나 하자.”

나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대꾸하지 않은 채 가만히 검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샐라임이라는 존재가 이 검 안에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숏 소드인데.

“아까 보니까 네 능력이 아주 참담하더구나.”

“네?! 아…….”

아까 정령술과의 테스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카 선배의 말대로 불의 자질이 세다고 하고, 샐라임의 말대로 불의 친화력이 세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무슨 계약인데요?”

그러자 샐라임은 마치 자신이 호의를 베푼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마. 대신 넌 날 돕는 거야. 내가 이 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

“물심양면으로.”

그러곤 그는 마치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양 입을 다물었다.

“음…… 싫다면요.”

그러자 검은 길길이 날뛰었다.

“너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알아! 다른 사람들은 원해도 못 하는 거야! 네가 가진 능력을 이대로 썩힐 셈이냐!”

“…….”

나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혹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정령의 말이니 거짓을 말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말대로 내가 그렇게 불의 친화력이 세다면, 그것을 개발해 앞으로 살아 나가는 법을 터득할 수도 있을 터.

“……알았어요.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나와 같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해 주면 돼.”

조건은 간단했다.

나는 그를 돕고, 그는 나를 돕고.

“그럼 내가 키워 주마.”

“…….”

“세계 최고의 정령술사로 말이야.”

그렇게, 우리의 계약은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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