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2)화 (12/156)
  • 11화. 제2 남자 주인공(3)

    무기점을 나오자 벌써 해가 져 있었다. 나는 또다시 밀리센트가의 추적에 쫓길까 두려워 발걸음을 빨리했다.

    학교로 돌아가는 와중에, 마음 어딘가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건 바로 에르셈프의 등장 타이밍 때문이었다.

    게임에서도 지금쯤 에르셈프가 등장하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로 마주한다. 게임이랑 비슷하긴 한데, 그런데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에르셈프는 곧 있으면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들어오게 된다. 학업을 증진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 에르셈프의 적성을 유추해 본다고 쳤을 때,

    검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는 점. 그리고 무기 상점에서 인연이 엮였다는 점.

    ‘검법과일 가능성이 커.’

    왠지 검법과에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과연 검법과에 들어가는 것이 맞는가?’

    세이먼도 검법과, 에르셈프도 검법과다. 거기에 나도 검법과에 들어간다면 셋이서 엮일 가능성이 계속해서 커질 터였다.

    ‘에르셈프가 최애라고는 하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싹수없는 에르셈프지만 나중에는 분명 애정 어린 에르셈프가 될 거다.

    세이먼과 마찬가지로 그와도 엮여선 절대 안 된다는 것.

    이번엔 스케일이 어마무시하게 크다. 세이먼 루트를 탈 경우엔 히아신스에게 독살을 당하지만, 에르셈프 루트를 탈 경우엔……

    ‘전쟁이 일어나지.’

    무려 율리우스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인질로 붙잡히게 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게임 장면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설명으로만 제공이 되었을 뿐이지만, 인질로서 당하는 수모가 잔인해서 경악을 했던 탓에 잊을 수 없는 엔딩이었다. 그리고 막상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고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절대, 절대 에르셈프와도 엮이면 안 돼.”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밀어 내야 한다니. 어찌 보면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 때문에 내 생명을 맞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엿 같은 게임 시스템에 지고 싶지 않아.’

    그래도 다행인 점은 에르셈프가 세이먼처럼 친절하게 다가오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이먼은 원래부터 다정한 성격이었기에 나를 챙겨 준다거나 의미심장한 말을 해서 나를 당황시키곤 했다.

    하지만 에르셈프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사람을 전혀 믿지 않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남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그나마 밀어 내기엔 수월할 것이었다.

    ‘잊지 마, 루나. 내 목표는 절대 남주인공들과 이어지면 안 된다는 거야.’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능력을 키워서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서 빠져나가는 게 이번 생의 목표라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검법과에 들어가는 것이 의문이었다.

    게다가 대놓고 ‘검법F반에 들어가시오.’라는 퀘스트의 내용.

    마치 ‘제 발로 죽음으로 들어가시오.’와 같은 의미인 것 같았다.

    ‘젠장… 어쩌라는 거야.’

    하지만 생각을 지속할수록 검법과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는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장치다. 나는 퀘스트의 의도와 반대로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미래를 위한 계획이 수없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아침에 일어난 나는 당장 교무실에 가 볼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과를 바꿀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퀘스트를 실패할 경우 오천 골드 차감이었다. 보상이 서사급 아이템이라니 궁금할 법도 하지만…….

    혹하는 보상을 보여 주며 이리로 오라는 듯한 검은 손짓처럼 보였다.

    그래서 든 생각은,

    검법과에 들어가서 퀘스트만 성공한 뒤 과를 바꾸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도에 과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단다.”

    단호한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이렇게 큰 행사를 통해서 결정하는 과인데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과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인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교무실을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 끝에 있는 학장실에서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다.

    “……!”

    ‘이렇게 금방?!’

    멀리서 봐도 차갑게 느껴지는 회색빛 머리칼의 사내. 장신을 뽐내며 문을 닫고 나오고 있는 남자는 에르셈프였다.

    이렇게 금방 마주치게 된다니, 에르셈프를 막을 방편을 미리 계획해 놓은 상황이 아니라서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나는 그가 보지 못하게 난간 뒤로 등을 돌렸다.

    ‘벌써 아카데미에 들어오려는 건가? 이렇게 빨리? 원래는 첫 만남을 하고 한 달 정도 뒤에 들어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바로 다음 날이라니. 너무 빠르잖아!’

    자주 마주치면 그만큼 각인이 잘 된다. 그렇게 되면 호감도가 쉽게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때,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카데미 학생이었나.”

    뜬금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부여잡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쫓아온 것은 아닐 테고.”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예의를 갖추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왕자님. 여기서 뵐 줄은 몰라서 잠시 놀랐습니다.”

    좀 있으면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 되어 장벽 없이 지낸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한 나라의 왕자였다. 게다가 나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던 왕자.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거다.

    내가 검을 내밀며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사 주신 검은 정말 잘 쓰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했었는데, 이렇게라도 뵈어서 다행입니다.”

    “…….”

    에르셈프는 잠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특유의 내려다보는 눈빛은 마치 잘못한 게 없는데도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괜히 움츠러들게 되는 것이다.

    “……!”

    그러자 에르셈프가 내가 내민 검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자기를 구하고 얻은 대가가 대체 무엇인지 확인해 보려는 심산 같았다.

    칼을 찬찬히 살펴본 그는 짧게 내뱉었다.

    “취향 한번 단출하군.”

    “저는 왕자님처럼 힘이 세지 않아서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더니 그의 눈빛이 무시무시해졌다. 어디 감히 자신의 말에 대꾸를 하냐는 표정.

    나는 움츠러든 몸짓으로 다시 에르셈프에게서 검을 받아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 에르, 전하, 팔이……!”

    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른팔에서 새빨간 선혈이 셔츠 위로 묻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셔츠를 입어 맨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주 깊고 기다란 상처가 팔에 나 있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피가 흘러나오며 셔츠를 적시자 에르셈프가 별것 아니라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분간 조심하라고 했는데, 봉합한 곳이 터졌나 보군.”

    나는 붉은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급하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았다.

    나는 손수건을 그의 팔에 대고 꾹꾹 눌러 가며 피를 닦았다.

    “읏……!”

    하얀 손수건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고, 작은 손수건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신 거예요. 피가 많이 흐릅니다!”

    감히 왕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피를 보자마자 놀란 탓이었다.

    피라도 닦아 주고 손수건이라도 쥐여 주고 싶은 마음에 그의 팔을 덥석 잡아 버리고 만 것이다.

    “헉, 저것 봐. 무슨 일이 났나 본데?”

    “뭐야, 3왕자잖아? 여긴 웬일이지?”

    “신경 쓰지 마. 괜히 끼어들었다가 욕만 먹는다고. 성격 더럽잖아.”

    “하긴, 알아서 해결하겠지.”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에르셈프의 모습을 보고서는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다행히 학장실이 있는 꼭대기 층이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

    에르셈프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꽉 쥐고 계세요!”

    나는 에르셈프가 남자 주인공이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그에게 말했다.

    남들이 더 외면하니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내가 그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줄 때까지 에르셈프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손가락에 힘도 주지 않았다. 나의 손길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다.

    “전하……?”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보자 그가 그제야 표정을 바꾸었다.

    약간 놀란 것 같았는데.

    에르셈프는 다시금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놓아라,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러지 않았다.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나는 시스템의 음성을 들으며 아차, 싶었지만 다시 그 상황이 와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피를 흘리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나는 하나도 죄송하지 않았지만 일단 죄송하다고 내뱉었다. 왕자가 벼슬이지 뭐.

    그리고 에르셈프가 한마디 하려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오히려 내가 준 손수건으로 지혈하며 상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까는 뭐 내 손길을 시답잖게 여기는 것 같더니 지금은 또 얌전하게 내가 준 손수건을 꼬옥 쥐고 있었다.

    크, 이게 싹수없는 캐릭터의 매력이다.

    매일같이 짜증 나게 굴어도 한 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면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다.

    “수행원은요?”

    “건물 앞에 있어.”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달리 에르셈프는 모든 걸 다 포기한 사람의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됐어. 내가 가면 돼.”

    “그래도…….”

    “요란스럽게 굴지 마, 별일 아니니까.”

    나와 그는 계단을 내려가 건물 앞에 다다랐다.

    “전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닥쳐, 시끄러워.”

    에르셈프의 수행원은 그의 모습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부축해 데려갔다.

    “뭔 일인 걸까…….”

    나는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에르셈프와 수행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갑작스럽게 에르셈프가 피를 쏟는 바람에 정신이 다 팔렸었지만 하나 얻은 정보가 있었다.

    나는 피가 묻은 옷을 털며 중얼거렸다.

    “검법A반 소속…….”

    에르셈프와 같이 계단을 내려오며, 그가 들고 있던 종이에 그가 소속된 과가 적혀 있던 걸 볼 수 있었다.

    어젯밤에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이어졌다.

    세이먼과 에르셈프 모두 다 검법과라면 나는 절대 검법과에 들어가선 안 되었다.

    다른 반이라고 해도 대련하는 과정에서 계속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다른 과로 가야 해.’

    역시 게임 시스템은 나를 어떻게든 남주인공들이랑 엮으려는 심산인 거야.

    그렇다면 검법과를 제외하고 골라야 하는데…….

    나는 곧장 운동장으로 향했다.

    “자신의 적성을 테스트하세요!”

    여기저기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검도 준비했고, 모든 상황이 나를 검법과에 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지만……

    “검법과가 아니라면…….”

    내가 갈 곳은 따로 있었다.

    밤새 고민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 게임 시스템에 엿을 한번 먹여야 하니까.

    나는 거침없이 줄지은 부스들을 제치고 걸어가,

    “아, 안녕하세요.”

    정령술과의 부스 막을 걷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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