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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화 (11/156)
  • 10화. 제2 남자 주인공(2)

    나는 작은 몸집으로 사람들 사이를 쏙쏙 피하며 도망쳤다.

    남자는 키가 19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구로, 나처럼 민첩하게 움직이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또 다른 수행원이 있을까 싶어 로브를 더욱 뒤집어쓰고 시야를 거의 차단하다시피 모자를 눌러 썼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며 한참을 뛰다 보니,

    “뭐야. 또 여기로 왔잖아.”

    아까 할머니를 보았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온데간데없고 늘어놓았던 과일만이 남아 있었다.

    와중에도 남자는 나를 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이리저리를 둘러보는데, 사람들 무리가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는 인파를 보았다.

    ‘뭐지?’

    나는 인파를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자,

    “……!”

    아까 사과를 주었던 할머니가 길바닥에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왕자님… 왕자님… 제발 저희 좀 살려 주십쇼… 세금이 너무 올라 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집에 밥이 거덜 난 지 벌써 이 주째입니다…….”

    그러고는 키가 큰 한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인파 속 남자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입을 열었다.

    “……저리 비켜.”

    고작 한마디였지만 그의 말은 얼음장처럼 서늘했고, 마치 길가의 개미를 보듯 백성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할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수행원에게 벗어나려 마구 몸을 버둥거렸다.

    남자와 할머니를 둘러싼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치가 너무 심해서 그렇지 뭐.”

    “왕권이 바뀌어야 할 텐데…….”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저택에 있을 때에 신문과 가십지를 보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파악해 두었으니까.

    사람들은 현재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속하는 비젠티아 왕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세금은 날이 갈수록 올라가고, 왕실과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지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생길 법도 하지.

    그때였다.

    “에잇!”

    큰 소리에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본 광경은…….

    “이거나 받아라!”

    옆에 있던 붉은 머리의 사내가 날계란을 손에 쥐고는 저 멀리 휘두르려는 장면이었다.

    휘익!

    왕권을 향한 원한을 품은 날계란은 빠르게 인파 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동시에.

    “드디어 찾았군.”

    내 뒤를 쫓던 괴한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인파 속으로 뛰어든 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 * *

    나는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괴한의 손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피하긴 했다. 하지만 붉은 머리 사내가 날린 계란을 내가 대신 맞은 것은 아주 대단한 우연이었다.

    “읏!”

    날계란이라고는 하지만 팔이 얼얼했다.

    계란은 와장창 터져 내 팔뚝을 타고 흘렀고, 나는 어쩌다 보니 왕자를 온몸으로 막아 준 셈이 되어 버렸다.

    큰 키와 다부지고 넓은 어깨. 누가 봐도 덩치가 큰 사내인 그를 마르고 여린 여자가 몸을 날려 구했다.

    “어머, 저 여자 좀 봐. 몸을 아주 던졌는데?”

    “대단하다……. 우호 세력인가?”

    제삼자에게 이것은 눈물겨운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붉은 머리 사내는 내가 대신 맞은 것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왕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는 자리에 선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았다.

    그러자, 아주 그리울 정도로 익숙하던 일러스트의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이름: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나이: 18

    직위: 비젠티아 왕실의 제3 왕자

    호감도: 0%

    +

    그였다. 에르셈프.

    내가 게임에서 지겹도록 죽으면서 루트를 달성하고자 했던 그 남자.

    회색빛이 도는 머리에 가르마를 탄 부드러운 머리. 눈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칼과 그림 같게도 잘 어울리는 보랏빛 눈동자.

    반쯤 감겨 있는 그의 시선은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았고, 실제로 보니 더한 차가운 인상에 나도 모르게 몸이 서늘해졌다.

    “왕, 왕자님을 뵙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이자 지독히도 완벽한 이 남자는,

    ‘미쳤다…….’

    내 최애였다.

    * * *

    원래 게임에서는 길거리에서 에르셈프가 흘린 인장을 주워 주며 우연히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스토리였다.

    그런데 계란을 대신 맞아 주면서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스토리가 변하긴 해도 우연이라든가 하는 전체적인 틀은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에르셈프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시답지도 않군.”

    그는 날계란을 날렸던 붉은 머리의 사내를 눈으로 흘기며 내뱉었다.

    왕실에 대한 원한을 품든, 그걸 온몸으로 표현하든, 계란을 날리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당장 체포해. 기분이 더러워졌어.”

    에르셈프는 수행원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았는데, 하늘같이 고고한 눈빛을 품은 채였다.

    원래도 에르셈프는 이런 성격이었다.

    차가운 인상에 높은 자존심, 사람을 전혀 믿지 않는 스타일까지.

    그런 남자가 점점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연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어 몇 번이고 죽으면서 루트를 깨게끔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내가 게임에서 알던 에르셈프와는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바라는 게 있나?”

    아주 경멸스러운 눈빛을 한 채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내가 무슨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생각으로 자신을 구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게임에서 내가 인장을 주워 주었을 때는 친근하게 대하진 않았지만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시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에게 우호적으로 다가올 줄 알았는데, 에르셈프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으로서는 내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게임에서와 달리 현실의 그는 훨씬 냉정하고, 꼬여 있는 인간이었다.

    구해 준 사람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 바라는 게 있냐는 거야?

    “없습니다, 전하. 저도 뜻하지 않게…….”

    내가 대답을 하고 있을 참이었다.

    에르셈프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겨 버렸다.

    “…….”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그냥 날 쌩으로 무시한 거잖아!?

    저렇게 싹수가 없는 인간이었단 말이야?

    나는 팔에 흐르는 날계란을 손으로 훔치며 씩씩댔다.

    우연이긴 하지만 구해 준 사람한테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냐!

    에르셈프의 수행원 중 한 명은 계란을 던졌던 사내를 제압하여 팔을 묶어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갔다.

    “천하기 짝이 없군.”

    에르셈프는 약간의 조소를 입에 머금은 채 천천히 걸어갔고, 그에 따라 동그랗게 둘러싼 인파는 해체되었다.

    나는 어이없는 마음은 제쳐 두고, 인파에 몸을 담아 재빨리 다른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아까의 괴한이 또 쫓아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골목에 숨어, 아까 보았던 에르셈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잠깐 보았지만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만큼 충격을 주는 외모니까.

    일러스트보다 백만 배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세이먼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잘생긴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회색 머리와 보랏빛 눈동자는 마치 한 마리의 늑대를 연상시켰다.

    옆에서 보는 턱선은 날카로웠지만 남성스러움을 가지고 있었고, 코 또한 높고 오뚝했다. 게다가 저 도톰한 입술까지도.

    괜히 내 최애가 아니었어. 이렇게 성격이 개차반일 줄은 몰랐지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에르셈프의 얼굴을 지웠다.

    남주인공이고 뭐고, 일단 나는 안전하게 무기를 사서 적성 테스트를 빠르게 보는 것이 중요해.

    그렇게 나는 또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얼어붙은 쇠몽둥이’의 장소를 물어 가며 그곳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감격스러운 얼굴로 나는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촤르륵.

    불과 쇠를 다루는 곳답게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가득했으며 이리저리 불에 그을린 곳이 보였다.

    그런데.

    “?!”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에, 에르.”

    나는 입을 헙, 하고 막았다.

    “왕자님?”

    그러자 에르셈프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벽에 걸린 검을 차례대로 보고 있던 그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뭐, 뭐가 저렇게 불만이 많은 거야?

    “무슨 일이지?”

    그가 나를 향해 내뱉었다.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에르셈프의 취미는 검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전설적인 기사의 검부터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화려한 검까지, 그는 자신만의 무기고를 만들어 진열해 놓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도 이 무기점에 방문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에르셈프를 찾아온 게 아니니 말이다.

    나도 쇼핑을 하러 온 거라고.

    ‘얼어붙은 쇠몽둥이’의 주인장은 금세 창고로 들어가 큰 검집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곤 자신에 찬 얼굴로 에르셈프에게 내보였다.

    “이놈입니다. 삼백 년 동안 전설의 화공이 쓰다가 원한이 맺혀 성질이…….”

    “그만.”

    에르셈프가 단호한 목소리로 주인장의 말을 저지했다.

    주인장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에르셈프는 자신의 수행원 중 가장 앞에 있는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수행원이 그에게 다가갔고, 에르셈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나는 그들을 힐끗 쳐다보며 가판대 쪽으로 가서 무기를 구경하려 했다.

    인도식 단검부터 숏 소드가 있는 쪽으로 가서는 유심히 살펴보는 중이었단 말이다.

    그때, 에르셈프의 수행원이 나에게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냐?”

    “?!”

    나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슨 소리야, 내 행선지가 바로 여기였다고.

    그런데 에르셈프와 수행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왕자님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뭘 주면 만족할 거지? 전하께서 특별히 적선하는 거니까 빠르게 말하도록 해라.”

    뭐? 적선?

    나는 에르셈프에게 그 무엇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데 자기들 혼자 오해하고선 나를 거지 취급하고 있는 거다.

    그때 벽 쪽에 있던 에르셈프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칼 하나 쥐여 주고 내보내거라.”

    “예, 알겠습니다. 전하.”

    “혼자 구경하고 싶군.”

    졸지에 나는 그의 쇼핑을 망쳐 버린 방해꾼이 된 거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그것이 아니라며 나름대로 뜻을 표현했지만 에르셈프는 관심도 없었고, 수행원은 듣지도 않는 듯했다.

    수행원은 내 귀에 입을 대고는 중얼거렸다.

    “빠르게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전하는 참을성이 없으시니까.”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호위 기사라서 그런 건지, 에르셈프가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쫄 내가 아니지. 그래, 사 준다니 곱게 받아 주마.

    나는 가판대 앞으로 가 검을 쭉 훑어보았다.

    크기별로 나열된 진열대의 왼편에는 발키리 소드, 바스타드 소드, 글라디우스 등 휘황찬란한 검들이 검신을 뽐내듯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쪽이 맞는 것 같은데…….’

    가장 오른쪽으로 갔다. 비교적 짧은 검신의 것들이었다.

    “이게… 나으려나?”

    당장이라도 빠르게 고르지 않으면 목을 쳐 버리겠다는 수행원의 무시무시한 눈빛 때문에 제대로 고를 수가 없었다.

    에르셈프 또한 내가 있을 때까지는 검을 구경하지 않을 셈인지 팔짱을 끼고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할게요.”

    나는 결국 가장 평범하게 생긴, 손잡이 모양이 네모난 숏 소드 하나를 골랐다.

    급하게 고르긴 했지만 적당한 무게와 길이인 것 같았다.

    “이걸로 주시오.”

    수행원이 값을 지불하려 하자 주인장은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곁눈질로 에르셈프를 바라보자 그의 높다란 콧대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값 하네 정말.

    까탈스럽긴 엄청 까탈스러워.

    “너는 운이 좋구나. 전하 마음 변하시기 전에 당장 이것을 갖고 나가거라.”

    수행원은 나를 향해 지껄였고,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무기점을 나섰다.

    낯선 칼을 손에 꽉 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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