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화 (10/156)
  • 9화. 제2 남자 주인공(1)

    세이먼은 감쪽같게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모습과 아까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다.

    둘 다 웃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도 하나는 싱그러운 들꽃 같은 미소, 또 하나는 남을 비웃는 뱀 같은 미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면…….

    “제가 있는 검법과로 들어와요. 어차피 루나는 적성에 큰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 딱히 상관없잖아요? 힘들지 않도록 제가 옆에서 챙겨 줄게요.”

    나를 향한 세이먼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까까지는 분명 전학생을 챙겨 주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자신이 있는 검법과에 들어오라고 대놓고 권유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빛도 변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일단 고려는 해 볼게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이 세계에서 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긴 했다.

    그래서 고민이 되긴 했지만… 그 상대가 남주인공이라는 게 문제다.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있었고, 고작 몇 분 만에 적성을 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기에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퀘스트도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때 세이먼이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루나.”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올라왔다.

    둘만 있는 학생회실 안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에게는 긴장감을 형성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뿐인데, 지그시 바라볼 뿐인데 괜스레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까 일은 내가 사과할게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내뱉는 그.

    아마 히아신스가 내게 했던 말을 사과한다는 것 같았다.

    세이먼이 나에게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사과를 해도 히아신스가 해야지.

    “괜찮아요.”

    하지만 나는 딱히 따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군소리하지 않았다.

    그는 한쪽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며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눈빛은 정말 위험해.

    약간은 위로 올라간 눈매, 그리고 부드럽게 접히는 속 쌍꺼풀까지. 가까이서 보니 새삼 정말 잘생겼다는 게 느껴졌다.

    “저는 루나가 그렇게 쳐다볼 때가 가장 좋아요.”

    “……!”

    “샅샅이 훑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거든요.”

    나는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빤히 쳐다봤는지도 몰랐을뿐더러 그가 그걸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기에.

    하지만 세이먼은 뭐 어떠냐는 듯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나를 쳐다보았다.

    “이만 가 볼게요.”

    나는 급하게 가방을 챙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있다 가요.”

    세이먼이 팔을 올려 벽에 기댄 뒤 비스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 그 자세도 위험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게 문제였다.

    조금만 가까워도 내가 그의 품에 안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몸을 뒤로 물러서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그리고 뒤를 돌아 학생회실을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자 세이먼이 한마디 내뱉었다.

    “잘 가요.”

    “…….”

    “또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또 어제와 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이런, 젠장.”

    확실하다. 나를 대하는 세이먼의 태도가 변했다.

    이건 마치 관심 있는 여자를 대할 때 하는 말이잖아.

    불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이대로만 가면 세이먼은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아.”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애정 공세를 받으니 당황한 것뿐이었다.

    ‘이건 반칙이야. 나만 또 당했잖아.’

    히아신스와 대화만 했을 뿐인데 호감도가 올라가 버렸고 괜히 세이먼의 얼굴에 홀려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아 버렸다.

    왠지 밤에 생각날 법한 얼굴…….

    떠올리기만 해도 머릿속에 각인된 듯이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젠장.”

    나는 학생회실을 나오고 나서도 세이먼의 바다 같은 눈동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학교에 온 지 두 번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한 해 중 가장 중요하다는 적성 테스트 행사의 막이 열렸다.

    아침부터 분주한지 기숙사 창문 너머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으며 바깥 하늘에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반짝거리는 마법 폭죽이 아름답게 터지고 있었다.

    ‘마치 학교 축제 같네.’

    운동장에는 여러 색깔의 부스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각자 하나씩 자신의 반을 소개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고학년들이 준비하는 이 행사는 앞으로의 반 실적을 결정하기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고학년들이 분주하게 부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들떠 있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마냥 설렐 수만은 없었다.

    적성 테스트 행사인데, 내 적성을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게임에서는 적성이나 과에 관해서는 전혀 관련 스토리가 등장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교정에서 마주치거나 호감도를 쌓아 올려 따로 데이트를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무슨 과를 선택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졸려.”

    어젯밤 내내 잠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나한테 무슨 능력이 있을지, 무슨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을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블린이 설명해 준 정보와, 세이먼이 건네준 책자에 의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자고로 게임이란 치고받고 칼로 쑤시는 게 최곤데…….’

    한국에서 게임을 할 당시 항상 탱커 역할을 도맡아 했던 나다.

    그래서 매번 괴물같이 큰 덩치의 몬스터형 캐릭터를 선택하거나, 인간이 아닌 이종족을 선택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내 취향이 그것이었으니 현재의 모습으로는 아무것도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어쩌란 말인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상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차라리 누가 딱 내 적성은 무엇이다, 라고 알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때,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퀘스트가 도착했다.

    퀘스트는 항상 알 수 없는 타이밍에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시스템의 음성과 눈앞에 보이는 글자들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열람.’

    +

    # 제1 스토리 퀘스트

    제목: ‘검법F반’

    내용: 적성을 고민하고 있는 당신, ‘검법F반’의 테스트에 통과하시오.

    제한 시간: 없음

    보상: 서사급 아이템

    페널티: 5000골드 차감

    +

    열람할 때마다 아주 심장이 쫄깃했다.

    또 얼마나 괴상한 퀘스트가 나와서 나를 들들 볶을지 아주 기대가 되었기 때문에.

    ‘검법F반에 들어가라고?’

    그냥 검법과에 들어가라는 소리잖아?

    누가 적성 좀 정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내려온 퀘스트였다.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어찌 알았는지 귀신 같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

    무언가 찝찝했다.

    저렇게 대놓고 검법과에 들어가라니. 검법과에 들어가지 않을 시 오천 골드 차감이라는 것도.

    퀘스트창을 닫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큰 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이라…….’

    잘 상상되지 않았다.

    새파란 검신으로 상대방의 목을 노리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나뭇가지……같아.’

    전생에 헬스를 했던 터라 현재 자신의 팔은 참을 수 없이 볼품없었다.

    자고로 헬스인이라면 튼튼한 전완근이 최고였다.

    하지만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얇고 햇빛 한번 못 받아 봤다는 듯 하얀 팔.

    ‘생각보다 악력은 있었지만…….’

    어제 남자아이의 멱살을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생각한 것보다는 힘이 있어서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후… 과연 검을 들 수나 있을까?

    나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밀리센트 가문은 분명 날 가만두지 않을 거다.

    꽁꽁 숨겨 왔던 집안의 치부가 홀랑 도망가 버렸으니 어떻게든 다시 집어넣으려 하겠지.

    가문의 위협을 피하려면 일단 스스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 몸 하나는 지켜야 할 능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죽음이라는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게임의 시스템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관련된 정보를 알기 위해 이곳저곳을 발로 뛰어다닐 필요가 있겠지.

    그렇다면 모험가라는 직업이 현재로선 가장 적합하다는 건데.

    ‘아무래도 모험가들은 검사를 가장 선호할 거야.’

    최전방에 서서 괴물을 처치하는 검사의 역할.

    단단한 갑옷을 입은 채 공격력과 방어력을 둘 다 겸비해야 하는 하이브리드형 전사.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부터라도 몸을 키워 봐?’

    하지만 생각은 잠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고는 퀘스트의 내용을 제외한 채, 무슨 수가 앞으로의 나의 운명에 가장 좋을지 계산해 보았다.

    몇 분이나 잠자코 고민했을까.

    나는 이내,

    ‘일단 테스트를 하러 가 보자.’

    부스에 가 보기로 결정했다.

    * * *

    중앙 광장에 다다랐을 때, 생각보다 더 큰 규모의 행사에 입이 벌어졌다.

    “1학년은 이쪽으로.”

    안내에 따라 운동장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는 <적성을 향해 오신 1학년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크게 붙어 있었다.

    운동장에 들어가려고 하자 괜히 마음이 떨렸다.

    내가 진짜 이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앞쪽에 있는 검법A반 부스를 발견했다.

    부스 앞에는 커다란 기사 형상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오른손엔 칼을, 왼손엔 방패를 든 채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형상은 마치 A반 학생들이 검술에 대해 얼마큼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여긴 패스.”

    A반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학생들만 가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갈 리는 없을 터.

    그렇게 걸어 F반에 다다라 막을 열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저 테스트하러 왔는데요.”

    “이쪽으로 와. 특성 측정부터 해야 하니까.”

    나는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뭐야. 너 검이 없잖아? 그러면 테스트에 응할 수 없어.”

    “네?!”

    “미리 공지한 사실인데. 검이 있어야 네가 자질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정보였다.

    나는 다음에 오겠다며 후다닥 부스를 나왔다.

    다행히도 퀘스트에 실패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제한 시간이 없는 만큼 행사가 끝나기 전까지만 들어가면 된다는 것 같았다.

    ‘당장 검을 구입해야겠어.’

    수중에는 대략 이천 골드 정도가 있었다. 이 정도면 뭐라도 사겠지, 싶은 생각으로 험버트 시장으로 향했다.

    물론 혹시라도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어 교복이 아닌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나갔다.

    학교 밖을 나간다는 건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가의 표적이 될 경우, 꼼짝없이 잡혀가야 했다.

    그렇게 시장을 돌기 시작한 지 30분 후.

    눈에 보이는 온갖 무기 상점에 가 보아도 이천 골드로 살 수 있는 검은 없었다.

    고작 해 봐야 목검 정도였고, 그런 검으로는 테스트에 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가씨, 이천 골드로 뭘 살려고 그래.”

    “정 돈이 없으면 저쪽에 있는 대장간에 가 봐.”

    그렇게 안내받은 곳은 ‘얼어붙은 쇠몽둥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점이었다.

    오늘까지 할인 행사를 한다며 소개를 시켜 준 곳이었다.

    나는 거리에 과일을 늘어놓고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향해 물었다.

    “할머니. 혹시 ‘얼어붙은 쇠몽둥이’가 어딘지 아세요?”

    “뭐? 어렸을 때부터 뭘 했다고?”

    “아뇨, 할머니. ‘얼어붙은 쇠몽둥이’요.”

    “어렸을 때부터 술을 먹었다고? 그럼 못써, 아가씨. 건강 나빠져.”

    “…….”

    “됐고 이거 사과라도 하나 먹어. 건강 챙겨야지.”

    귀가 안 좋으신 것 같았다.

    내 손에 사과 하나를 쥐여 주신 할머니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사과를 받았고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흠. 좀 젊은 사람한테 물어봐야 하나.’

    왠지 남자가 잘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무기 상점이니.

    그래서 이번엔 천천히 대화를 하며 걸어가는 남자 무리에게 가서 물었다.

    “저기, 혹시 ‘얼어붙은 쇠몽둥이’라고 아세요?”

    “저희 사이비 종교 안 믿어요.”

    하고 휙,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 꽤 어렵네?’

    나는 어이없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을 물색하는 동시에 상점에 쓰인 가게 이름들을 살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쫓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를 힐끗 쳐다보니 위아래를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사내가 휙, 기둥 뒤로 숨는 게 보였다.

    내가 가는 길에 맞춰서 따라오는 것 같은데…….

    나는 숨을 죽이고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남자는 나에 맞추어 똑같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가 뜀박질을 하자 그 남자도 똑같이 달려오는 게 아닌가.

    “…이런.”

    나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나를 쫓을 만한 사람은 사실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곳은……

    밀리센트가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이야.

    가문에서는 내가 일 분이라도 빨리 처치해 버려야 할 폭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집에서 튀었을지 모르며, 공작가에 대한 소문을 가십지에라도 뿌리게 되면 밀리센트의 자제들은 사교계에서 거의 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진짜 나는 공작가에서 이틀밖에 지내지 않아서 조금 억울하긴 하다.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믿어 줄 것도 아니니, 잡히면 끝장이다.

    잡히게 되면 학교든 퀘스트든 뭐든 간에 다 소용없이 망하는 거였다.

    그냥 타국에 팔려 나가 노예 노릇을 하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젠장, 젠장.”

    저절로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절대 틈을 주어선 안 되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며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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