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화 (9/156)
  • 8화. 히아신스(2)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억울하게 선생님에게 한마디를 들어야 했고, 쉬는 시간이 끝나는 동시에 겨우 반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묘했다.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사로운 것에 감정 쓸 필요 전혀 없으니.

    그리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히아신스의 바로 옆자리인 그곳에.

    “똑바로 말해. 너 세이먼이랑 뭐 있어?”

    히아신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책상이라도 뒤엎을 만한 목소리였다. 자칫해서 뭐라도 있다고 했다간 그녀의 눈이 돌아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없어.”

    “그런데 네까짓 게 어떻게 세이먼의 관심을 샀어? 몸으로 유혹이라도 했어?”

    펜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거 없어.”

    최대한 무시하며 대답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일에 하나하나 반응해 봤자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그것에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히아신스는 말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각해 봐. 짐승만 봐도 강자끼리 결합을 한다고. 순수한 혈통일수록 더 고귀하고 모든 능력이 뛰어난 게 사실이니, 순수한 혈통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건 본능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너 같은 평민에게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잖아?”

    “…….”

    “이 거지야?”

    이번 건 좀 빡쳤다. 그놈의 계급이 뭐라고, 귀족이면 이렇게 평민을 무시해도 되는 건가?

    아무리 계급 사회라고 한들 이렇게 조롱을 하는 것은 격이 떨어지는 짓이었다. 히아신스는, 완연하게 나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집중 좀 하지.”

    나는 칠판을 향해 얼굴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 스스로 먹잇감을 제공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자 히아신스는 재미가 없어졌다는 듯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내일부터 적성 테스트에 들어간다. 기존에 제출했던 계획서대로 부스에 찾아가면 되고. 아, 여기 전학생이 한 명 있었지?”

    “네. 저요.”

    “너는 제출한 계획서가 없으니 끝나고 반장한테 설명 들어라. 이블린? 할 수 있지?”

    그러자 반장처럼 보이는 아이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나는 이블린이라는 아이에게 대충 설명을 들었다.

    적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타고난 자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카데미에 오는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고유 스킬을 타고나지 못하고 가능성 정도만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발현을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적성을 정확히 알기 위해 반을 나누어 수업을 듣고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나를 향해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그녀는 티 없이 맑았고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서는 다른 톱니바퀴가 굴러가고 있었다.

    적성 테스트고 나발이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세이먼과 단둘이 학생회실에 있으려면 방과 후여야 했고 제한 시간이 하루인지라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가방을 챙겨 후다닥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이먼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세이먼의 상태창을 켜 나이에 있던 나이를 기억해 내고, 3학년 층으로 갔다.

    “혹시 세이먼 유리츠라고 어디 있는지 아세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자 그는 A반에 가 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게 A반에 가자, 방과 후여서 텅 빈 교실에서 한 여자와 둘이서 문제를 풀고 있는 세이먼이 있었다.

    세이먼이 그녀에게 알려 주는 것처럼 무어라 중얼거리며 종이에 펜을 써 내려가고 있었으며 여자는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나는 둘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세이먼이 교실에서 나오기까지 뒷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발견하자마자,

    “루나! 무슨 일이죠? 3학년 층까지 올라왔네요?”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이런.’

    반을 찾아와 기다렸다는 것만으로도 호감도가 상승하다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적성 테스트 계획서 작성에 대해 잘 모르겠어서요. 물어볼 사람이 세이먼밖에 없고.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세이먼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계속해서 손에 든 계획서 종이를 보고 있었고, 세이먼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이죠. 여기서 할까요? 아무도 없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반을 가리켰다.

    “아, 아무래도 3학년 층에 있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그러면 1학년 층?”

    “1학년 층에는 아까 일이 있었어서…….”

    “그럼 학생회실로 갈까요?”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나는 끝내 원하는 대답이 나와 기분이 좋아 활짝 웃었다.

    그러자 세이먼은 내가 웃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따라 웃었다.

    미소가 참 예쁜 사람……

    아니, 아니지. 그만. 정신 차려!

    그렇게 나와 세이먼은 학생회실로 갈 수 있었고, 그는 텅 비어 있는 넓은 공간으로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

    뭔가 닫힌 공간에 둘이 있으니 분위기가 묘한 것 같았다.

    숨소리도 크게 들리고 발을 움직이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하지만 세이먼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비젠티아 왕립 아카데미에는 총 네 개의 과가 있어요. 검법, 마법, 암술, 정령술. 크게 네 과로 나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또 세부적으로 나뉜답니다.”

    그는 친절한 얼굴로 말을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혼자 손으로 제스처를 하며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는 모습을, 나는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진지하게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약간의 날카로움이 묻어 나왔다. 왠지 공부를 굉장히 잘할 것만 같은 느낌.

    “아무튼 1학년은 자신이 정한 적성이 실제로 자신과 부합하는지 시험하고, 또 해당하는 반에 정식으로 들어가는 절차를 밟아요. 그리고 그 적성 테스트를 치르는 행사가 바로 내일이구요.”

    “헉, 내일이라구요?”

    ‘그래서 다들 이렇게 애매한 시기에 전학을 왔다고 했던 거구나.’

    “어젯밤에 말해 줄걸 그랬나요. 너무 갑작스럽죠?”

    그는 달력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그의 달력에는 학교 행사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정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저는 아는 게 없어서 큰일이네요.”

    내 말을 들은 세이먼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아마 선생님이 편의를 봐주실 거예요. 딱히 능력이 없다면 검법과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가요…….”

    내가 세이먼이 준 안내서를 보며 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던 참이었다.

    벌컥!

    둘만 있던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세이먼은 놀라지 않았는지 여전한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을 맞이했다.

    “히아신스.”

    * * *

    ‘그런데 왜 퀘스트가 해결되었다는 말이 안 나오지? 분명 히아신스가 등장하기 전에 단둘이 있었잖아!’

    아마도 둘이 있는 시간이 일정 시간 지나야 하는 것 같았다. 고작 십 분 정도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세이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히아신스에게로 다가갔다.

    이 둘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구두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아주 오래된 친구이자 예비 연인이다.

    “무슨 일이야? 말도 없이 찾아오고.”

    “세이먼. 쟤랑 아는 사이야?”

    히아신스는 대놓고 물었다. 세이먼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응. 문제라도 있어?”

    그가 짧게 대답하자 히아신스는 반응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눈치 있으면 좀 나가지?”

    그러곤 나에게 내뱉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누구보고 나가래?

    그러자 세이먼이 대답했다.

    “루나에게 적성에 관해서 알려 주고 있던 참이었어. 오늘 전학 와서 모르길래.”

    “반장이 알려 준다고 하지 않았나? 일부러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이러면 곤란하지.”

    그녀는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분명 이블린이 말해 주긴 했지. 하지만 난 지금 퀘스트를 깨러 온 거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세이먼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을 받은 것 같아 속이 답답했다.

    “난 세이먼이랑 그런 사이 아니야. 사적인 감정 있는 관계 아니라고. 그러니 입 좀 조심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책상에 앉은 채로 나지막이 내뱉었다.

    옆에 세이먼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거짓말도 아니었고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그러자 히아신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너. 아까부터 말투가 맘에 안 드네?”

    “뭐?”

    “어디 평민 딸 주제에 나한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분명 학장님한테 학교에서는 계급 상관없이 다들 평등하게 지낸다고 들었다. 물론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라서 거의 다 귀족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내가 스치듯이 세이먼의 얼굴을 바라본 건 우연이었다.

    “……?”

    그의 얼굴은 마치…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눈꼬리가 휘어져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고, 입꼬리는 위를 향해 솟아 있었는데, 평소에 보던 온화한 미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하여튼, 나는 이 싹수없는 여자에게 한마디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야. 너 나한테 열등감 있니?”

    “뭐?”

    “아니 그렇잖아. 오늘 온 전학생을 이렇게 견제하는 것도 그렇고, 세이먼에 대해 계속 묻는 것도 그렇고.”

    “…말 다 했어?”

    “아니? 너 내가 세이먼이랑 단둘이 있으니 불안하지?”

    그가 옆에 있든,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뭐?”

    “혹시라도 날 좋아할까 봐?”

    “…….”

    “무서워?”

    내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금세 새빨개진 얼굴을 했다.

    “이, 이게…….”

    그러곤 꽉 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나를 뚫릴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몸싸움이라도 날 기세였다. 그녀가 나에게로 다가올 때였다.

    말도 안 되는 시스템 음성이 들렸다.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호감도가 3% 상승하였습니다!]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뭔 상황이라고 호감도가 올라가는 거지?

    그제야 나는 세이먼의 얼굴을 휙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착각인가 할 정도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상냥하고 남을 챙겨 주던 세이먼은 온데간데없는 것 같았다.

    그때 히아신스가 내 앞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나 나이츠 가문 딸이야. 네까짓 거 우리 아빠한테 말하면 언제든 무너뜨려 줄 수 있어.”

    그녀는 분노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나를 자신 앞에 꿇리려고 하는 눈빛.

    ‘나 참 내가 공작 딸인 걸 말할 수도 없고…….’

    아까웠다.

    직위로 찍어 눌러 줄 수 없다는 게.

    “그렇게 귀하신 백작 가문 따님께서 평민 집안 딸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꼴이라니. 네 인생도 불쌍하기 짝이 없구나.”

    [호감도가 8% 상승하였습니다!]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또였다. 내가 히아신스에게 독설을 날릴 때마다 나를 향한 세이먼의 호감도가 계속해서 상승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공작 딸이란 걸 알아서 저렇게 웃음을 참고 있는 건가?

    그런데 아까는 히아신스에게 엄청 다정하게 대해 줬잖아?

    그때, 세이먼이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만들 해요. 싸우지 말고. 히아신스, 나 루나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싱그러운 들꽃처럼 따스한 목소리였다. 마치 자신의 연인에게 불안감을 잠재워 주려는 것 같았다.

    분명 작중에서는 둘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단지 부모님들끼리 정략결혼을 약속했기에, 또 히아신스가 세이먼을 너무나도 좋아하기에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설정이었다.

    ‘히아신스를 잠재우려는 건가.’

    그가 히아신스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엄청 노련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히아신스를 바라보는 세이먼.

    그러자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등을 돌렸다.

    쾅!

    그러고는 학생회실의 문을 거세게 닫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둘만의 시간’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제공됩니다…….]

    [2000골드가 제공되었습니다. 보유 골드는 아이템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거 완전 RPG 게임이다.

    그나저나, 나는 세이먼 쪽으로 몸을 향하며 그의 상태창을 켰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37%

    +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호감도가 30%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세이먼이랑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나와 히아신스의 대화에서 저렇게 호감도가 오를 수 있지?

    게다가 세이먼이 여주인공에게 반하는 장면은 교정 내의 정원에서다. 그때 호감도를 30% 이상으로 넘기며 본격적으로 세이먼과의 루트가 시작되었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내가 여주인공과 다르게 행동하니까 스토리도 변화하는 건가?

    도저히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젠장, 호감도를 내려도 모자랄 판에 아주 한 무더기를 쌓아 버렸네.’

    그때 세이먼이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새삼스럽게도 훌쩍 큰 키와 다부진 몸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세이먼은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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