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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7)화 (7/156)

6화. 1학년 F반

거대한 성과 같은 형태의 아카데미. 이곳의 꼭대기 층에는 학장실이 있다.

필립 유리츠.

그는 세이먼의 형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 신사였다.

세이먼의 금발과는 달리 짙은 빛을 띠는 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올린 그는 당차게 들어온 나를 건조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내 아들은 살면서 무언갈 부탁해 본 적이 없지.”

“…그렇군요.”

원목 소재의 큰 테이블에 앉은 그는 짧은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어젯밤에 찾아와서 부탁을 하더라고. 어떤 여자애의 입학을 허가해 달라고 말이야. 지금 같은 시즌에.”

“…번거롭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네 잘못은 아니야. 내 아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도 다 네 능력이니까.”

“…….”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말도 없거니와, 그의 말대로 부탁을 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윌리어스가라고? 처음 들어 보는 곳인데,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지?”

“작게 상단을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짧게 손을 들어 저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몸짓이었다.

“학장의 입장에서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시험도 보지 않은 학생이 들어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거든.”

말을 끝으로 그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내 앞에 다가와 서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재미있어.”

세이먼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였지만 눈빛만은 비슷했다.

나른하고 게슴츠레한 눈빛.

고개를 삐딱하게 틀은 그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나를 훑었다.

마치 고혹스러워진 세이먼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세이먼이 싱그러운 들꽃 같다면 이 남자는 마치 뱀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란다, 아이야. 이곳은 분기마다 수많은 입학금과 지참금을 가지고 오는 부모들이 한가득이거든. 성적이 졸업 후의 방향을 결정하는 만큼 경쟁이 아주 치열해. 다들 하나같이 자기 자식들을 세기의 실력자로 키우려는 사람들이지. 그러니, 네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잠시 호흡을 끊은 그가 손을 들어 과감한 자세를 취했다.

손가락으로 내 턱 끝을 잡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거래를 하자는 말씀이신 겁니까?”

그제야 싱긋 미소를 짓는 필립.

그는 턱을 부여잡은 손가락에 힘을 더욱 실으며 입을 열었다.

“말이 제법 통하는 아이구나.”

* * *

“F반, 네 소속이다.”

짧은 한마디를 듣고 내가 가야 할 곳은 1층에 위치한 복도 끝에 있는 교실이었다.

1층 홀에 도착해 알파벳 순서로 된 길을 걸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금빛 머리칼의 사내가 보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비추어 밝게 빛나는 것이 멀리서 보아도 눈에 한 번에 들어왔다.

그는 여러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자, 남자 불문하고 세이먼을 둘러싼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세이먼은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지.’

따뜻하고 다정한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공부까지 잘하고 능력까지 좋으니 무릇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여학생들에겐 첫사랑 선배.

남학생들에겐 친해지고 싶은 쿨하고 멋진 남자로.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특이한 다른 남주인공들에 비해 성격 묘사에 대한 비중이 적은 편이었다.

착하고 다정하다, 정도로 표현되는 게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인기를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실제로 보니 엄친아 같은 느낌이 확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쟤랑 엮이면 죽는다는 거잖아.’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죽는 상상으로 연상이 되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다가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바로 어제, 나는 탈출하기 전까지 세이먼의 정보통 역할을 해 준다는 거래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뜻밖으로 공작 부인이 들이닥쳐 그날 바로 탈출해 버린 탓에, 난 공작 가문의 정보를 더 캐낼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주는 조건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혹시라도 거래 취소라면서 날 쫓아내면 어쩌지?

세이먼이 이를 기억하고 추궁할까 봐 겁이 났다.

“하…….”

일단 최대한 조용히, 조심히 다니는 거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다독이며 괜히 세이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숙이고 복도 끝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갔다.

“이거 계획서 작성 좀 도와줄 수 있어, 세이먼?”

“학생회장님, 이거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시간도 부족하고.”

“그걸 대체 어디서 잃어버렸더라? 알아봐 줄 수 있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세이먼에게 어떤 도움이나 부탁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는 그런 많은 요구에도 환하게 웃으며 전혀 불평을 하거나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최대한 숨을 죽이고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레이디?”

세이먼이 기가 막히게 나를 알아보고 소리 내어 부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건만 걸린 탓에 입술을 꼭 깨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이먼을 둘러싼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고,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학교는 어떤가요? 문제없죠?”

그는 마치 완벽한 학생회장의 역할을 하듯 전학생인 나를 챙겨 주었다.

학교와 학생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네. 아무것도.”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이렇게 챙겨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어차피 나는 세이먼을 피해야 하는 처지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자 세이먼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내가 바라보는 시선 쪽으로 몸을 옮겼다.

“혹시 루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고는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왔다.

게임 캐릭터였던 세이먼과의 실제 대화가 나에겐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에 불쑥불쑥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별것 아닌 말도 애정 표현으로 들린다고 해야 하나?

미연시 게임 속 캐릭터여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말했다.

“그럼요. 상관없어요.”

“고마워요, 루나.”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에는 세이먼의 성격이 평범하다고 느껴져 크게 매력을 못 느꼈던 남주인공이었는데, 실제로 당하니까 나도 모르게 빠져들 것만 같았다.

물론, 얼굴이 팔십 퍼센트는 다 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항상 나를 올곧게 바라봤다. 대화를 할 때도, 내가 혼자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을 때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그런 눈빛으로 나에게 저런 멘트를 날리니 내가 힘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세이먼이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내 귀 옆에 입을 대고는 작게 속삭였다.

“아버지는 잘 뵈었나요?”

“…….”

“아버지는 교묘한 사람이어서 자칫하면 나도 모르게 걸려들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

의미심장한 말을 한 그가 눈꼬리를 휘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몸을 뒤로 무르며 다시 거리를 두었다.

“반은 어디로 배정되었어요?”

그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F반이라고 하던데요.”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금세 풀어지며 그가 말했다.

“역시 학장님 취향답네요.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면 말해 줘요.”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내 눈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세이먼은 짧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몇 번 대화해 보니 알 수 있었다.

호감도 10%가 이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일단 나에 대한 사적인 관심은 없고, 학생회장이 눈에 띄는 학생을 약간 챙겨 주는 정도의 친밀도였다.

좋았어. 이대로만 하는 거야.

이 정도로 유지한다면 첫 번째 남자 주인공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세이먼이 갑자기 특이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디 보자…….”

나는 복도를 지나쳐 F반 앞에 다다랐다.

곧 담임 선생님이 도착했고, 나는 담임 선생님이 부르기 전까지 교실 문밖에 서 있었다.

관심이 지지리도 없어 보이네.

세상에서 가장 무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양 굴었다.

“자, 자. 조용. 전학생이 왔다.”

앞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응은 빠르게 돌아왔다. 전학생이 주는 신비함 때문일 터다.

“와, 얼굴 하난 반반한 전학생이 왔네.”

“누구지? 저런 애가 수도에서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이런 시즌에 전학을 왜 와? 너무 애매하잖아.”

“F반이면 말 다 했지, 뭐. 얼굴만 예쁜 텅텅이일걸?”

내가 앞에 있든 말든, 자신의 말이 들리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수군거렸다.

“인사해라.”

“루이아나 윌리어스입니다.”

학장실에서 했던 것같이 가명으로 소개했다.

“자 보자…… 어디 앉아야 할까.”

담임 선생님은 한번 자리를 휙 훑더니,

“저 오른쪽 맨 끝에 빈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리고 난 담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왜, 왜, 벌써.’

옆자리에는 갈색 머리를 한 채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적인 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모습.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게임 속 일러스트가 퍼뜩 떠올랐다.

‘히, 히아신스…….’

그녀는 세이먼을 지독히도 사랑하던 여자이자, 나를 독살했던 악녀였다.

* * *

이번에는 그녀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세이먼과 이어질 일도 없겠지만, 쟤는 상상 이상으로 악독했다. 뒤에서 행동할 줄도 모르고 대놓고 앞에서 일을 벌이기 때문에 잡혀가는 엔딩도 허다했다.

“하…….”

담임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는 나를 뒤로한 채 미련 없이 교실 밖을 나갔다.

“수업 준비 잘하고, 전학생 잘 반겨 줘라.”

“네!”

활발하게 인사하는 아이들.

‘선생님. 오, 제발…….’

나는 억지웃음을 띠며 히아신스의 옆자리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 막아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어서 알 수 없는 힘이 날 가두는 것과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고, 그때,

“아, 귀찮은데.”

남자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겹쳐지며,

내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악!”

단말마의 비명이 나왔다.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치 허공에 누가 못으로 박아 놓은 느낌이었다.

못에 매달려 발버둥을 치자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F반에 들어와서 네 맘대로 움직이려고 했어? 아무리 반반해도 그건 허용이 안 돼.”

내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왔대? 여기는 전학생이 일주일을 못 버티는 곳이거든.”

“네 적성이 뭔지부터 말해 봐. 특별한 거면 다시 봐 줄 생각도 있으니까.”

“야, 얼굴도 이쁜데 그냥 놔두자. 보기 좋잖냐. 눈 호강도 되고.”

아무런 지지대 없이 허공에 매달린 기분이란 참으로 거지 같은 감각이었다.

‘이 미친 새끼들…….’

속으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나는 분명 조용히 살고 싶었다. 성인까지 남은 4년 동안 내가 스스로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시시덕거릴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 짓도 안 한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 괴롭힌다고? 열이 부글부글 끓다가 머리 위로 뻗치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쟤 머리가 왜 저래?”

“은발 머리만 보면 완전 공작가 같은데? 그 집안사람들 머리색 다 저렇잖아.”

“확실히 그렇네. 그런데 쟤 가문이 뭐랬지? 윌리어스? 거기가 어디야?”

“나도 처음 들어 봐. 시답잖은 곳이겠지, 뭐. 귀족 행세하기엔 좋겠네.”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관찰하면서 다들 한마디씩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깔고 입을 열었다.

“당장 안 내려놔?”

그러자 나를 손가락으로 조종하고 있던 한 남자아이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런 전학생은 없었다는 듯이.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 내가 울기라도 할 것 같았나?

뭐 겉모습으로 보면 충분히 그래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녀린 이미지니까.

하지만 남자아이는 오기가 생겼는지 더욱더 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왕립 아카데미라더니 마법을 배워서 이런 데다 쓰는구나.

나는 속으로 탄식이 나왔다.

학장님.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 만든 학교에서 애들이 이러고 논답니다.

나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도 있는 것처럼 당당한 태도가 포인트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내려놔.”

깔깔대며 웃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웃음을 멈췄고, 자기들끼리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일 테지.

“야, 쟤 뭐라도 있는 거 아냐?”

“일단 놔두자, 괜히 건드렸다가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그러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나이대 애들은 뻔했다.

좀만 있는 척을 하면 홀랑 넘어가 버리곤 하니까.

여론은 그만하자는 쪽으로 바뀌었고, 반 분위기는 금세 싸해졌다. 이 장난을 재미있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듯했다.

나를 조종하던 남자아이가 손가락을 거두려고 할 참이었다. 그때,

“왜, 재밌는데. 더 해 봐.”

익숙한 일러스트 속 모습과 처음 듣는 목소리.

히아신스가 입을 연 건 착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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