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3)화 (3/156)

2화. 말도 안 되는 게임(2)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

# 튜토리얼 퀘스트

제목: ‘나만의 기사님’

내용: 당신을 구하러 온 ‘세이먼 유리츠’의 호감도를 10%까지 올리시오.

제한 시간: 3일

보상: ???

페널티: 저택 감금

+

“……?”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뻐끔거렸다.

호감도를 10%까지 올리라고?

성공을 못 하면 페널티까지 있단 말이야?

이거 진짜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거잖아!

말로만 듣던 환생이란 걸 해 버리다니.

그것도 내가 플레이했던 미연시 게임, 아니, 망겜 속으로.

나에게도 이런 일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어찌 되었든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가 그 망겜 ‘가이즈 인 러브’의 세계라는 걸 인식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럴 거면 왜 환생시킨 거냐!

일단 나는 뜬금없이 내려온 상태창, 퀘스트창, 그리고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악녀 무리는 세이먼의 몇 마디에 ‘실례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등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세이먼 유리츠입니다. 늦지 않게 도와드려 다행입니다.”

세이먼 유리츠.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남자 주인공이다.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게임 속에서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

그의 주변에는 나비가 날아다닐 것처럼 상냥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는 비스듬한 각도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턱선과 곱게 세워진 콧날, 하얀 피부, 그리고 영롱함을 주는 바다같이 파란 눈동자.

마지막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백금발의 머리칼까지.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남자 주인공으로서는 손색없는 완벽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난 한 달 전에 플레이한 게임 스토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엔딩만 제외하고는 꽤 재미있었던 수작이어서, 모든 루트를 다 돌 정도로 꼼꼼히 플레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었다.

퀘스트고 나발이고, 일단 이 남자랑 엮이면 얘를 좋아하는 악녀한테 독살당한다.

그 극악무도한 스토리에 경악을 했었기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

전생에도, 새로운 생에도 잘생긴 남자는 못 만날 운명인가…….

나는 일단 내 이름이 ‘루이아나 밀리센트’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고 나니 이제야 악녀들이 말하던 배경 스토리를 알 수 있었다.

루이아나 밀리센트는 왕국에서 몇 안 되는 공작가 집안의 딸이다. 하지만 진짜 딸이 아니고, 밀리센트 공작이 술집에 가서 하룻밤의 정으로 낳은 사생아다. 루이아나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려졌다. 운이 좋게도 그녀는 한순간에 생긴 밀리센트 공작의 동정심 덕분에 거두어졌지만, 집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면치는 못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숨겨진 딸이었다. 가문의 수치이기에.

매일같이 집에 갇혀 살고, 메이드가 방으로 갖다 주는 볼품없는 식사를 하며, 외출도 제한된 횟수로만 나갈 수 있는 운명.

이렇게 핍박받는 아이가 라인하르트 왕국의 비젠티아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는 것까지가 이 게임의 배경 스토리다.

“어서 타시지요.”

금세 마차를 잡은 그가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공작 가문의 저택인지라 위치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세이먼이 데려다주는 동안 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이즈 인 러브’는 당시 한국에서 몇 없는 여성향 시뮬레이션 장르로 히트를 쳤던 게임이다. 그리고 거지 같은 사실 하나가 존재했다.

“하아…….”

머리를 부여잡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세게 인상을 썼다.

이 게임의 엔딩은 바로, 무슨 짓을 해도 마지막엔 여자 주인공이 사망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남자 주인공과 이어져도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엔딩!

전쟁 때문에 죽고, 실족사로 죽고, 악녀에게 죽고, 아주 뷔페처럼 다양하게 죽었던 것 같은데.

그 때문에 게임 이용자들의 원성을 샀지만 게임 회사는 후속작을 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무책임한 대답을 내놓았었다.

세계관은 그대로 이끌어 가되 새로운 여자 주인공을 만들려는 개발자의 생각이라며.

그리고 2탄은 처참히 망했었지…….

‘왜 하필 들어와도 망겜에…….’

그러니까 나는 지금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운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게임 속 캐릭터는 엔딩까지 미성년자였으니까, 성인이 되기 전에 무조건 죽는다는 거겠지.

마차 옆자리에 타고 있던 세이먼은 혼자 생각에 잠겨 미동도 않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나는 그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3%

+

호감도가 3% 올랐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호감도가 오르다니.

무슨 일이지? 혹시 내 가문을 듣고 생긴 관심인가?

알던 거랑 다르게 속물 아냐 이 남자?

공작 가문이 워낙 세긴 하니까…… 권력 욕심이 있는 건가.

대체 어디서 호감 포인트를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호감도가 오른 것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단지 길거리에서 곤경에 처한 어린 여자를 에스코트해 주는 기사의 모습.

잘생긴 얼굴 탓에 다른 여자들이라면 쉽게 사랑에 빠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습니다.”

나조차도 놀라울 만큼 사무적인 말투.

이 남자와 엮여서는 안 된다. 기필코. 반드시.

* * *

해가 지고 있는 터라 노을이 옅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함께했던 불안한 기운과 동시에 내 집에 거의 도착하고 있음을 느꼈다.

“감사했습니다.”

세이먼은 무릎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한 뒤, 등을 돌렸다.

나 또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저택의 문 앞에 섰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떨리는 마음으로 저택의 문을 열었다.

뭐 이리 문이 무거운 거야.

“루이아나!!”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발을 들이밈과 동시에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쿵.

거센 발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오는 한 여자.

어머니다.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들어오는 거야!”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이 여자는 밀리센트 공작의 부인이다.

외출을 한 번 한 게 이렇게 혼날 일일까 싶을 수 있지만,

“죄송해요, 어머니.”

이 여자는 나를 죽도록 싫어한다.

짝!

순식간이었다.

어머니는 손을 날려 내 뺨을 후려쳤다.

거센 손길에 고개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나는 너무나도 당황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가 돌아간 그대로 얼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네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 가문이 무슨 피해를 입을지 아직도 감이 안 와? 얼굴은 제대로 가리고 다녔겠지? 공작님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한 달에 한 번 외출은 꿈도 못 꿨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네 방으로 들어가! 오늘 저녁은 이미 끝났으니 없는 거로 알아라.”

여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집안에서 구박을 받는 여주인공이라는 배경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간단하게 몇 줄로 설명되던 탓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겪으니 어머니는 만만치 않게 악독한 여자였다.

“밖에서 사람들 양기나 빨아먹고 다녔으니 배고플 틈도 없겠지, 더러운 년.”

어머니는 어머니라 불릴 수도 없을 만큼의 폭언을 날렸다.

나는 일단 방으로 들어가는 게 수라고 생각하고 복도로 향했다.

‘이런 젠장…….’

하지만, 나는 뒤돌아서 여자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 방이 어디였죠……?”

* * *

등을 떠밀려 복도 구석의 작은 다락방으로 내몰린 나는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답답했던 로브를 벗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아까 슬쩍 본 얼굴이 다였기에 제대로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모자 속에 가려져 있던 머리가 허리까지 길게 늘어지며 찰랑 내려앉았다.

“기가 막히게 예쁘군.”

윤기 나는 흰 은발의 머리는 누가 봐도 부러울 만큼 탐스러웠다. 창백하다 못해 흰 피부와 마치 천사처럼 잘 어울렸고, 옅은 분홍빛 눈동자가 화룡점정이었다.

‘이게 이 캐릭터의 특징이었지.’

분홍빛을 띠는 눈동자는 시선을 돌릴 때마다 반짝거리며 신비로움을 더해 주었고, 남들의 시선을 붙잡을 만큼 개성을 주었다.

“이거 때문에 온갖 핍박을 받았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예쁘네.”

아까 홀에서 어머니에게 깨지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형제자매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새까만 흑안이었다. 오직 나만 눈동자의 색이 다른 것이다.

“이래서 머리색이 같은데도 배다른 자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진 거지.”

나는 잠옷으로 보이는 옷을 대충 걸친 뒤 탁자에 앉았다.

앞으로 살아남아야 할 세상인 만큼, 까먹지 않게 최대한 아는 정보를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여자 주인공 ‘루이아나 밀리센트’는 줄여서 ‘루나’라고 불렸지.

그리고 여기는 ‘라인하르트 왕국’의 ‘테일러’ 마을.

“하…….”

한숨이 나왔다.

나는 밀리센트가의 버러지만도 못한 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핍박받고 불쌍한 여주인공이 왕자님 같은 남자들에게 구원받는 이야기였다.

요즘 세상에 완전 시대착오적인 콘셉트이긴 하지만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이 소소한 재미를 줘서 나름 마이너층에게 인기를 끌었다.

개발자의 엔딩 변경만 아니었어도 망겜이 될 일은 없었겠지…….

“웃기는군, 정말. 차라리 악녀로 빙의하게 해 주지.”

요새 트렌드는 악녀에게 빙의하는 거였다. 주인공은 뻔하디뻔한 엔딩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엔딩이 난 죽음인 거고!

“하하…….”

불안함이 올라온 나머지 나는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푸시업을 할 생각이었다.

정신 집중에는 푸시업만 한 게 없지.

그런데…….

“끄응.”

평소에는 밥 먹듯이 가능했던 푸시업이 한 개도 가능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팔이 사시나무 흔들리듯 파르르 떨리는 것이다.

“이런 미친……. 몸을 처음부터 키워야 하는 건가.”

나는 방바닥에 발라당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낯선 내 방의 갈색빛 천장을 바라보자 금세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죽음뿐인 엔딩이라…….

휙휙.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그렇게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아 펜대를 잡았다.

“남자 주인공은 총 다섯이야. 어떻게 만나게 되었더라? 일단 한 명은 만났고, 얜 되게 다정한 성격이었어.”

그렇게 한 달 전 플레이했던 게임 속 정보들을 기억을 더듬으며 써 내려갔다.

방 안에는 깃펜이 종이에 마찰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밖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써 내려갔을까.

“게임에는 퀘스트라는 게 없었는데.”

의문이 들었다.

게임은 단지 남주인공들과의 썸, 데이트 같은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여느 미연시 게임과 같았다.

미간을 좁힌 채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퀘스트는 원활한 스토리 진행을 위해 부여됩니다.]

또다시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튜토리얼 퀘스트를 깨지 못하면 저택에 감금당한다.

그러면 남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는 아카데미에 못 가게 된다.

“그냥 무조건 깨라는 거잖아?”

퀘스트는 게임의 전개대로 나를 이끌고 가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게임 스토리 대로 가게 된다는 거고.”

그러면 결국 죽음이라는 엔딩으로 귀결된다.

“하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남주인공들과 엮이지 않고 나 혼자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한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고개를 푹 떨궜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밖으로 연결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절대 두드릴 수 없는 창문이다.

잠겨 있을뿐더러, 이 방 안엔 나밖에 없고,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다.

주춤거리는 몸짓으로 일어나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닫혀 있던 커튼을 젖히자 키가 높은 반투명 창문이 드러났고, 나는 조심스레 귀를 갖다 대었다.

“…….”

아무 소리 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고난 시작인가?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난무했다.

그래, 일단 없는 척하자.

창문에 비치지 않도록 몸을 숨긴 나는 혹여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숨을 죽였다.

그때, 익숙한 고운 미성이 들렸다.

“접니다, 세이먼 유리츠.”

눈을 가늘게 뜬 채 상황을 의심하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아니, 이 남자는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내 방이 이만큼 쉽게 침입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다고?

새삼 버려진 자식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느끼는 찰나였다.

문을 열자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어째서 여기 있는 겁니까?”

그리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세이먼이 새파란 단도를 손에 쥐고는 내 목에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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