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2)화 (2/156)
  • 1화. 말도 안 되는 게임(1)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

    자전거를 탄 사내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북적거리는 시장통.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약 1분 전, 나는 시끌벅적한 시장의 한 골목 안에서 정신이 문득 들었다.

    “분명 난 헬스장에서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었는데…….”

    아득했다.

    모든 건 기필코 무게를 올려 보겠다며 무리하게 원판을 꽂은 탓이었다.

    그렇다. 무거운 바벨에 깔려 버리고 만 것이다.

    창피함도 잠시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깔아뭉갠 바벨에 갈비뼈가 부러져 사망해 버렸다.

    “…….”

    말도 안 돼. 진짜 벤치 프레스를 하다가 죽은 사람이 나라고?

    그렇게 스물두 살 여자로서의 삶을 어이없게 끝내는 건가 싶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눈을 떠 보니 이상한 세계였다.

    바퀴가 큰 마차들이 지나가고, 드레스를 입은 고풍스러운 차림새의 여자들과 튜닉에 조악한 외투를 걸친 남자들이 즐비한 곳.

    그러니까, 나는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거다.

    아니, 하필 환생해도 길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으로 환생을 해?

    보통 집이나 자기 방에서 깨어나던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길거리 행인에게 영혼이 들어가 버리다니.

    그럼 이 몸의 주인은 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알 수 없었다.

    당장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원래 몸의 주인이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아,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 지웠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그걸 들킬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다. 아, 이미 죽었지.

    “아버지는 어떡하지?”

    아마 헬스장에서 죽은 딸의 장례식 준비를 하고 계시겠지. 무슨 기분이실까. 슬퍼하긴 하시려나.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났어요.

    나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흰 로브를 머리까지 걸친 게, 누가 봐도 수상하게 몸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현상 수배범이라도 되는 거야? 왜 이렇게 싸매고 있어?”

    나는 머리끝까지 쓰고 있는 모자를 슬쩍 벗으며 내 얼굴을 확인했다.

    새하얀 은발에 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유리에 비쳤다.

    큰 눈망울에 약간 올라간 듯한 눈매가 새초롬한 인상을 주었다.

    “완전 예쁘잖아!”

    얼굴만 빼꼼 내밀었음에도 풍기는 아우라에 나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누구라도 쳐다볼 법한 외모를 가진 소녀였다.

    “범죄자는 아닌 것 같고. 답답한데 벗으면 안 되나?”

    거의 눈만 내놓고 다니는 격인 지금 내 모습에 답답함을 느껴 모자를 벗고 싶었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일단은 계속 모자를 쓰고 다니기로 했다.

    무기 상점, 과일 가게, 마법 상점, 식료품 가게…….

    여긴 누가 봐도 중세 유럽풍 판타지 세계였다.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고, 일단 이곳을 파악해야 하는데. 대체 여기가 어디야?”

    생각보다 적응은 빨랐다.

    전생에 헬스와 게임에 미쳐 있던 나는 이세계에 떨어진 상황에 쉽게 적응해 버렸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약간 사회 부적응자 같은 기질이 있었지만, 웬만한 게임은 랭킹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였다.

    RPG 게임, FPS 게임, PSP 게임, 심지어 미연시 게임까지도 섭렵한 나였다.

    규율을 중시하는 엄격한 군인 아버지 때문에 내가 좀 빗나간 경향이 있었지…….

    하지만 항상 체력을 중요시했던 아버지의 말씀에 헬스장은 꼬박꼬박 나갔더니, 결국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버린 것이다.

    “좀 있으면 생일 이벤트 받을 수 있었는데!”

    즐겨 하던 게임에서 생일에만 나오는 유니크 아이템을 받으려 일 년을 꼬박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것도 죽었으니 무용지물.

    전생에 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자.

    나는 새로운 세계에서 적응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빠르게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였다.

    굵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환생하고 나서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눈만 내놓은 채 뒤를 돌아보니, 덩치가 아주 큰 거구의 사내가 험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어찌나 큰지 저절로 그림자가 졌다.

    “보아하니 타국에서 온 모양인데 거리라도 구경시켜 줄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했다. 뭔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린데, 착각이겠지?

    “에이, 무슨 소리야. 딱 봐도 아까부터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친절히 모셔줄게. 어때?”

    “괜찮다니까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아가씨. 혼자 있는 게 안쓰러워 보여서 그래.”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 같았다.

    얼굴은 깡패마냥 험악하게 생겼는데 호감이라도 얻고 싶은지 요상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사이비 종교인을 만났을 때처럼 꾸벅 사과의 인사를 하며 자리를 피했다.

    이런 건 무시가 답,

    “그럼 거절의 의미로 딱 이천 골드만 받을게. 괜찮지?”

    인 줄 알았는데,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지리를 잘 모르는 외국인을 이용해 삥을 뜯으려는 속셈이었던 것.

    나는 내가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때,

    [보유 골드는 아이템창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음?

    이상한 시스템 음성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보유? 골드? 아이템?

    그때 나는 무언가가 머리를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게임 속으로 환생?!’

    난 조용하게 읊조렸다.

    “아이템창.”

    그러자 눈앞에 정말 게임 화면처럼 직사각형의 아이템창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왼쪽 아래에 써 있었다.

    ‘보유 골드: 100’

    백 골드?

    누가 봐도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플레이어에게 주는 기본 골드인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천 골드 따윈 없었다.

    “저 돈 없어요. 삥 뜯으실 거면 다른 분 알아보세요.”

    난 태생적으로 겁이 없었다.

    게다가 후천적으로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인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사람한테 겁을 먹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때였다.

    “메리텔?”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이 메리텔인가? 어딘가 익숙한데…….

    돌아보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셋이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아는 사람인가?

    이런,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나를 삥 뜯던 거구의 사내는 누가 봐도 귀족 아가씨 같은 여자들이 다가오자, 당황하더니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메리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골렘 같은 애한테 돈이나 뜯기고.”

    “…….”

    나는 눈만 내놓은 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친구인 것 같은데……!

    “뭐야, 메리텔이 아니잖아?”

    친구가 아니었다.

    운 좋게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 내 신원 좀 확인하려고 했건만.

    “너 누구야? 처음 보는데. 왜 이렇게 메리텔이랑 닮았지?”

    세 명의 여자들 중 가운데에 있는 여자는 강력하게 악녀의 포스를 풀풀 풍겼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반말을 하며 다가오는 모습, 인상을 쓴 채 네가 누구냐고 예의 없이 묻는 모습까지.

    인성 참 더러워 보이는군.

    “설마…….”

    “얘 걔 아니야? 메리텔 동생?”

    “걔가 동생이 있었어?”

    “왜, 있잖아. 메리텔이 매일같이 욕하던 이복동생.”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는 가운데 있는 여자가 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이리 와 봐.”

    그러고는 내 손목을 덥석 잡고 복잡한 시장통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죄송한데 저 바빠요. 애기가 기다려요. 돈을 원하시면 백 골드라도 드릴게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려 온갖 말을 다 해 보았지만,

    “웃기는 애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나를 벽으로 밀쳤다.

    팍!

    여자가 밀자마자 내 몸은 힘아리 하나 없는 나뭇가지마냥 벽으로 팍, 밀쳐졌다.

    전생의 몸이었으면 꿈쩍도 안 했을 텐데, 또 처음부터 몸을 키워야 하는 거야?

    “그 낯짝으로 어딜 돌아다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칭칭 가리긴 했네.”

    지금 얘네들이 뭐라는 거야.

    내가 뭔 짓을 했다고?

    아무 짓도 안 하고 있었는데 두 번이나 시비에 걸리다니, 운도 지지리 없었다.

    이번에는 돈이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듣자 하니 내가 메리텔이라는 여자의 이복동생인 것 같은데.

    “나는 밀리센트 가문이 기세등등하게 구는 게 정말 꼴 보기가 싫단 말이야. 이렇게 뒤에서 가문의 수치를 숨겨 놓고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내가 환생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도 가문의 수치라는 말을 듣는 것은 불쾌했다.

    “얼굴 좀 보여 줘 봐. 사생아인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공작님을 꼭 빼닮았다던데.”

    그러고는 그녀가 내 모자를 휙, 벗겼다.

    너무 빠른 손짓이라 내가 어떻게 제지할 타이밍도 없었다.

    “저랑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너랑 아는 사이? 이 세상에 너랑 아는 사이가 있긴 하니? 맨날 집에만 갇혀 사는 주제에!”

    “나 같으면 진작에 죽어 버렸을 거야.”

    “맞아, 너 같은 인생이 살아서 뭐 해? 인생 참 기구하다!”

    “…….”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정보 처리를 하는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밀리센트 가문의 자식인데 어머니가 다른 사생아고, 이복 언니로 메리텔이 있으며, 맨날 갇혀 산다고?

    지금 나는 내가 환생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에… 크게 놀랐다.

    ‘왜 하필 환생해도 인생 기구한 애한테 환생한 거야…….’

    속으로 탄식하며 슬퍼해도 모자랄 참이었다.

    그런데 나를 이렇게 대하는 여자들은 뭐가 잘났길래 사람을 괴롭혀?

    “말이 좀 심하시네.”

    원래 같았으면 폭언을 날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게임 덕후에게 욕이란 그냥 기본적으로 탑재된 능력 같은 거였다.

    하루가 멀게 키보드 배틀을 떠야 하는데 내 할 말 못 하는 성격이면 속 터져 죽는다.

    사람 다섯이 모이면 또라이는 꼭 한 명이 있다고, 사이코들을 한두 번 만난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여자애들은 겁나는 정도도 아니었지만,

    이상했다.

    아까부터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입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몸도 무언가 묶여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뭐지?

    이것도 게임 시스템의 일종인 건가?

    여자들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자기들끼리 욕을 해 대고 있었고, 나는 그걸 들으며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움직이질 않으니.

    짜증 난다.

    지금 내가 이 골목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귀족 집 딸이라면서 날 모시는 수행원 하나 없단 말이야?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좀 여기서 꺼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때였다.

    “거기, 뭐 하는 거지?”

    클리셰 가득한 소설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금발에 청아한 벽안을 가진 한 기사였다.

    그는 허리춤에 칼을 찬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것이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만큼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뜻이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그리고 이상한 기시감은 또다시 찾아왔다.

    “별일 아니에요. 지나가셔도 됩니다.”

    여자는 당황한 티를 감추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를 향해 물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까?”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 또한 그를 쳐다보기 위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일렁거림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는 글자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0%

    +

    “……?!”

    마치 게임 상태창처럼 남자의 옆에 나타난 정사각형 틀 안에 뜨는 정보들은 이 남자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런데 세이먼 유리츠라는 이름, 왠지 엄청나게 익숙한데……?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분명 들어 본 이름이다.

    NPC였나?

    최종 보스?

    겜친이었나?

    그때 나는 머리에서 전파가 탁 터지는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 미연시 게임!’

    한 달 정도 전에 잠깐 했던 게임이었다.

    ‘가이즈 인 러브…….’

    친구가 애원을 하면서 하도 해 보라고 하길래 열심히 플레이하긴 했는데, 되게 허무했던 게임으로 기억한다.

    왜냐면…….

    이 게임은 엔딩이 똥 같았기 때문이다.

    ‘미친… 이거 욕 개처먹었던 게임이잖아.’

    이어서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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