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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85화 (외전 완결) (85/85)
  • 외전 7화

    연서가 옅게 웃자 태헌이 그녀 손을 살짝 당겼다. 그만 가자는 얘기였다. 연서는 피로한 눈을 내리며 살짝 인사했다.

    “그럼 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금방 올 거예요.”

    연서가 태헌을 따라 홀 입구로 나서기 전, 뒤를 살짝 돌아보자 센터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씁쓸한 쾌거랄까. 하지만 태헌의 얼굴까지 먹칠할 순 없으니 참는 것도 이만하면 되었다.

    연서는 발을 동동 구르는 직원들의 반응을 보고 내일부터 더 시끄러워지겠구나, 예감했다.

    “어?”

    홀 입구로 나서다가 트로피처럼 줄지은 화환에서 선예와 이혁의 이름을 발견했다. 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머님 아버님? 이런 걸 언제 보내셨지?”

    “티 내고 싶어 안달 나셨거든.”

    “티?”

    연서가 태헌을 올려보았다.

    “한연서가 며느리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 같은데,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할까. 양심이 있으니 뒤에서 몰래몰래 이러는 거지.”

    태헌이 소리 없이 콧방귀를 꼈다. 그간의 경험으로 시부모님이 제게 호의를 품었단 걸 알았다. 그래도 자랑이라니…….

    태헌이 괜한 말을 할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은호와 막역하게 지내는 건 별개로 연서와의 사이엔 커다란 벽이 존재했다.

    그래도 감사하단 말은 해야 할 터였다. 연서는 잠시 핸드폰을 꺼내 화환을 촬영했다.

    “그런 게 좋아?”

    “그냥, 첫 자선회이기도 하고 해서 기념하려고요.”

    “온실을 만들어줄까.”

    화환에서 온실까지. 태헌은 가끔 급하게 직진하는 경우가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하지 말아요.”

    연서와 태헌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얘기해요. 마무리는 하고 퇴근해야 해요.”

    태헌이 말없이 그녀를 보더니 한번 꽉 안았다가 몸을 떼어냈다. 그것만으로 연서에겐 휴식이었다.

    “그럼 다녀와. 기다릴 테니까.”

    연서가 입꼬리에 힘주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말을 함축하고 대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전부 사랑한단 표현이었다.

    *

    일이 끝나기 무섭게 태헌이 빠르게 연서를 차에 태웠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가겠다는 듯 굴었다.

    연서도 정리하는 내내 기다리고 있을 태헌 생각에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모른다. 달칵, 안전벨트를 꼽자마자 연서는 준비했던 말을 냅다 꺼냈다.

    “오늘은 차에서 해도 돼요.”

    “이제 돼?”

    태헌이 핸들을 매끄럽게 감으며 피식거렸다. 연서는 제 어깨에 두른 태헌의 재킷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헌 씨가 원한다면 해도 돼.”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함부로 던지면 못 쓰는데.”

    “그래도 태헌 씨가 원하는 거면 다 좋아요.”

    “그런 건 집에 도착해서 말했어야지. 심란하게 그만하고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여.”

    “…응.”

    “수고 많았어. 파티 괜찮았어.”

    연서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태헌의 입에서 나온 칭찬이라 더 달게 느껴졌다. 입발림은 못 하는 사람이니 진정성 있는 평가였다.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단 생각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두 사람을 태운 어두운 도로를 막힘 없이 달렸다. 집까지 가는 동안 꼭 잡은 손을 한 번씩 놓은 것 말고는 별다른 행동과 말은 없었다.

    차고에 주차를 마친 태헌이 에어컨 바람 세기를 높이고 차고 조명을 소등했다. 사위가 검은 물에 잠긴 것처럼 고요해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열기에 잠긴 호흡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정말 나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간, 또 나쁜 놈이니 뭐니 하면서 물고 할퀴고 때릴 것 같은데.”

    “그거야 태헌 씨가 한 번 하고도 잘 안 놔주니까.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러지.”

    “은호 깬다고 밀어내는 게 누구야. 기회가 있을 때 열과 성을 다해야지.”

    “그런데 정말 여기서 할 거예요?”

    연서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밖을 살피며 소곤거리자 태헌이 곧장 시트를 넘어오며 조수석을 뒤로 밀었다.

    쿵. 태헌의 머리가 천장에 부딪혔다.

    “쯧, 좁아.”

    “…언제부터 이랬던 거예요?”

    연서가 그의 벨트에 손을 대다 말고 머뭇댔다. 이미 준비를 마친 그의 신체가 놀랍고도 신기하고, 또 기분 좋았다.

    “너 데리러 갈 생각했을 때부터?”

    “…힘들었겠다.”

    연서가 손을 꾸물대면서도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편해질래요?”

    그러니 이만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고. 사랑하는 만큼 섞이고 싶다고. 연서가 살랑살랑 그를 자극했다.

    서로가 한 공간에 있는 순간부터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전희는 필요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젖은 터라 하나가 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필요한 부분만 노출하고 몸을 결합했다. 태헌은 오늘 좀처럼 여유가 없었다. 어제도 연서를 안았으면서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조급하게 삐걱삐걱, 시트를 밀어 올렸다.

    홀린 듯 행위에 열중하는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허리 근육이 단단히 조여들었다가 풀리길, 빠른 속도로 반복했다.

    창문에 습기가 가득 서렸다. 낮은 호흡이 차 시트까지 달라붙어 찌걱댔다. 연서는 핏줄이 돋은 태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허공에서 흐느적대는 두 다리를 보다 비명을 질렀다.

    먼저 도달한 건 연서였다.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깊게 입을 맞추는 통에 힘없는 애원이 태헌의 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번의 정사를 마친 태헌이 대충 옷을 갈무리한 뒤 연서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 복도를 비추는 미등을 제외하곤 거실은 암전이었다.

    소파에 연서를 눕히며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어두운 곳에서 서로만이 불빛이었다. 혹여 놓칠세라 손끝으로 붙들고 입술로 그를 차지했다.

    연서가 목놓아 그를 불렀다. 길게 울며 바둥대다가 소파 헤드레스트에 발목이 걸렸다. 반대편 다리는 한껏 접혀 무릎이 턱에 닿을 듯했다.

    “더 열어줘.”

    연서는 고개를 저으며 잔인한 쾌감에 헐떡였다. 내리막길 후에 또 내리막길이었다. 쿵쿵. 몸을 내리찍는 강한 쾌락 후에 그보다 더 강렬한 전율이 관통했다.

    기어서 도망가려는 연서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가 카펫에 연서의 무릎을 대게 했다. 뒤에서 몸을 겹치며 욕심껏 달려왔다.

    이런 그는 버거웠다.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접점이 데일 듯 뜨거웠다.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의심할 리 없는 사랑이라서.

    연서의 몸이 카펫으로 온전히 끌려 내려갔다. 그의 복부를 짚고 원하는 만큼 나부끼다가 고개를 젓자 태헌이 잘했다는 듯 입을 맞추었다.

    얼굴 곳곳에 닿는 감촉이 눈물 날만큼 애틋했다. 그러나 태헌의 하반신은 여우 같았다. 유연하게 달래다가 불시에 혼을 빼놓기 일쑤였기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거꾸로 겹쳐 누워 서로의 흔적을 조금은 적나라하게 마주 보았다. 이번에도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연서였다.

    몇 번이나 울었을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혼몽한 상태가 된 연서가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힘없이 숨만 몰아쉬었다.

    소파 아래로 내려간 태헌이 그녀의 발목을 손에 감싸 쥐며 입을 맞췄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지치면 어떻게 하지.”

    “안돼. 읏……더는 못 해요.”

    “그럼 일단 씻을까.”

    “아니. 그 말에 얼마나 속았는데…….”

    “씻을 힘 없으면서 어쩌려고. 씻겨 줄게. 그러고 싶어.”

    연서가 뒹굴던 카펫에 그가 두 무릎을 대고 앉아 있었다. 연서의 피부를 조심조심 닦아내며, 태헌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많이 힘든가.”

    “그걸 말이라고…….”

    “그만하려고 했는데, 조절이 안 됐어.”

    안 돼. 저 눈빛에,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돼.

    “연서야.”

    마치 으슥한 곳에 함께 놀러 가보자고 유혹하는 목소리 같았다.

    “같이 씻어. 욕실에선 참아 볼게.”

    “참아 볼게는 뭐예요? 참으면 참는 거지. 그리고 욕실에서만 참을 거야?”

    연서가 원망의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가 너무 예쁘니까. 그래서 장담이 안 돼.”

    눈가를 찡그리며 태헌이 가슴을 들썩였다. 예쁘다는데 날 선 말이 안 나왔다. 참 나.

    힘없이 누워 있던 연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지켜볼 거예요.”

    태헌이 곧장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는 평소보다 느긋하게 걸으며 여전히 흉흉한 열감을 누그러뜨려 보려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복도를 장식한 전면 거울 앞에서 흑심을 들키고 말았다. 연서가 정말 너무한다고 칭얼거리며 태헌의 쇄골에 이마를 비볐다.

    “더 해봐.”

    “응?”

    연서의 동그란 눈동자가 가까이에 있었다. 욕실 불이 켜지자 훤해진 빛 덕에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갈색 눈동자가 제 크기를 찾았다. 그 안에 태헌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심장에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연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는 평생 이런 사랑을 할 터다.

    누그러뜨려 애쓰고 참고 삼키는 사랑을.

    마음을 졸이며 아내를 뒤쫓는 사랑을.

    “그냥 뭐든 해 봐.”

    “그게 뭐야.”

    연서가 웃었다. 그러자 맑은 호수에 태헌이 덩그러니 담겼다. 그녀는 항상 태헌을 양지로 이끌어주었다.

    그가 너무 어둡지 않게 외롭지 않게, 그녀로 가득 차게 햇살 같은 따뜻함으로 품어주었다.

    “다 좋으니까 어떤 거든 나한테 해줘.”

    또 연서를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태헌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혔다.

    연서가 몸을 묻은 태헌의 숲이 완전해졌다.

    서로를 향해 깃든 마음에서 도망할 리 없는 온전한 세계. 그 안에서 영원히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도망 비서』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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