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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84화 (84/85)
  • 외전 6화

    은호를 키울수록 세상을 뜬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하나라도 더 입에 넣어주고 싶고, 예쁜 세상을 보여주고 싶고, 뭐든 다 해주고 싶었겠지.

    그리고 이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부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잘못된 사람이었다.

    -다음엔 엄마가 은호 기다릴 거지요?

    “그러엄, 엄마는 항상 은호 만나는 시간만 기다리는데?”

    은호가 까르륵까르륵 웃었다. 귓속으로 흘러드는 맑은 목소리에 피로가 싹 가셨다.

    -엄마, 엄마 너무 보고 싶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도 좋으니까 하루 자고 갈게요.

    일찍 철이 든 건지, 원체 밝은 성격 때문인지 은호는 투정을 잘 부리지 않았다.

    “그럼 엄마가 내일 아빠랑 같이 은호 데리러 갈게.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네. 엄마 사랑해요! 쪽쪽.

    “엄마도 은호 사랑해.”

    연서는 핸드폰에 대고 연거푸 뽀뽀했다. 통화가 종료된 후에도 미소가 쉽게 떠나지 않았다.

    어서 일을 마치고 태헌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또 오늘 하루 열심히 일했을 그를 도닥여주며 은호를 보러 가고 싶었다.

    무릎을 펴고 계단에 앉았던 몸을 폈다. 슬랙스에 물빛 블라우스를 단정히 매만지고 행사 홀로 돌아갔다.

    *

    연신 밀려드는 손님을 접객하는 것만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초대장을 찍어 발부할 때까지만 해도 이 인원이 정말 다 올까 싶었는데, 상상 이상의 손님이 밀려들었다.

    심지어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정치인이나 상류계 귀빈들이 찾아와 모두가 당황했다. 그들은 세원 자동차에서 발부된 초대장을 들고 찾아왔다.

    연서가 사태를 이해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헌이 발부한 초대장일 터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도움이 얼떨떨한 동시에 몹시도 고마웠다.

    왜 태헌이 누군갈 억압하고 다치게 하는 방법으로만 지금의 자신을 도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걸까. 연서는 그에게 가졌던 편견을 깨닫고 씁쓸해졌다.

    처음부터 전부 말할걸. 진작 기댈걸. 앞으론 꼭 그래야지.

    태헌을 온전히 믿어주지 못했단 걸 깨닫고 어깨가 축 내려갔다. 하지만 후회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음식이 동나 급하게 추가 주문을 넣고, 테이블 세팅을 몇 개 더했다. 손님을 응대하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행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센터장이 연서를 호출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연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센터장이 기다리고 있는 파티홀 구석 자리 커튼 뒤로 향했다.

    역시나 센터장은 연서를 보자마자 호통부터 쳤다.

    “한 팀장, 인원수도 제대로 못 세어?”

    “…….”

    “이게 다 무슨 난리야? 세원 자동차에서 들어온 협력을 왜 우리가 몰라?”

    “죄송합니다.”

    사실 바로 대응했기에 문제 된 건 없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받은 기부금을 차출해 그야말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센터장은 주변에 다른 팀장들이 모여 있든 말든 연서를 물어뜯기에 열을 올렸다.

    “사람이 몰린다고 넋 놓을 게 아니라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할 것 아니야?”

    얼굴이 벌게진 센터장은 약간 취한 것도 같았다. 어디서 술을 진탕 마시느라 연서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걸 보지 못한 건지 시비는 계속되었다.

    “꼴에 팀장이라고 어깨에 힘만 들어갔어. 어?”

    “센터장님, 이게 그만 하세요. 손님들 들으시겠어요.”

    보다 못한 윤 팀장이 말리려 들었다.

    “아, 그만하길 뭘 그만해! 솔직히 여기서 한 팀장이 한 게 뭐야. 다 멍석 깔아놓으니까 뒤늦게 들어와서 숟가락 얹은 거지!”

    “…….”

    “딱 우리 센터가 승승장구하려는 순간 들어와서 공이나 가로채겠다는 심보겠지. 한 팀장, 나 그렇게 호락호락 안 해. 일개 간병인 출신 주제에 팀장부터 달았으면 알아서 기어야 할 것 아니야?”

    주위가 조용해진 것도 모르고 센터장은 침을 튀기며 연서를 헐뜯었다.

    “아 왜 대답이 없어!”

    삿대질까지 하며 고성을 지르자, 잠자코 듣던 연서가 옅게 웃었다.

    “센터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잠깐 휴게실에서 쉬는 게 어떨까요?”

    “뭐? 이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더 실수하실 것 같아서요.”

    “실수?”

    감히 네가 그런 소릴 지껄였냐는 듯, 센터장의 눈이 더욱 험상궂어졌다. 그러나 연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네. 지금 실수 많이 하셨어요.”

    연서가 담담히 그를 바라보았다. 티 없는 피부와 커다란 눈은 센터장의 잘못을 그대로 비추듯 투명했다. 그러자 더 배알이 꼴린 센터장이 비웃음을 내비쳤다.

    “이게 어디서 윗사람한테 훈계야?”

    “그럼, 상사가 아래 직원에게 폭언을 퍼붓는 건 괜찮은 겁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커튼 너머에서 태헌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 있던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연서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남편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태헌 씨? 태헌 씨가 왜?

    그를 발견한 센터장이 허둥지둥 뛰어가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연서의 눈에 느리게 비추었다.

    “아이고, 전무님. 오셨다는 말씀을 못 들었는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와 봐야죠.”

    “모두 인사드리세요. 이번 행사에 큰 도움을 주신 세원 자동차 우태헌 전무님이십니다.”

    센터장이 벌게진 얼굴을 손등으로 누르며 팀장들에게 태헌을 인사시켰다.

    그나저나 큰 도움이라니. 꼭 연서가 모르는 일이 있었던 눈치다.

    설마 세원 자동차에서 나왔단 직원이 태헌이었던 걸까? 장난 아니게 잘생겼다고 숙덕이던 목소리가 떠오르자 정리가 되는 듯했다.

    그날은 정신이 없어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태헌이 직접 왔다면 그렇게 큰 소란이 인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직원이라고 해서 생각을 못 했다. 임원이라고 했다면 단번에 태헌인 걸 알아차렸을 텐데. 또 알 게 모르게 그의 그늘에서 보호받았다.

    온다는 말 없었잖아요. 눈으로 묻자 연서만 아는 정도의 시선이 돌아왔다.

    괜히 부담가질까 봐 말 안 했구나. 그래도 말 좀 해주지. 이런 모습 보이는 건 정말 싫은데.

    태헌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를 만날 수 있단 기쁨과 별개로 연서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한창 센터장에게 깨지고 있던 터라, 태헌을 보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후원자로 참여한 태헌을 물리적으로 내칠 방도는 없었다.

    모두가 앞다투어 태헌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연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센터장이 또 등에 불씨라도 떨어진 사람처럼 성을 냈다.

    “한 팀장, 한 팀장은 인사 안 해? 전무님, 죄송합니다. 한 팀장이 신입이라서 뭘 잘 모릅니다. 허허.”

    센터장이 허리를 굽신거리더니 연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얼른 와서 인사하란 눈치였다.

    연서가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겼다. 센터장은 도를 넘었다. 그리고 이제 행사도 잘 끝마쳐가고 있었다. 그러니 연서가 더 참을 연유는 없었다.

    연서의 고민을 읽은 것처럼 태헌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재킷을 벗어 연서의 어깨에 가볍게 둘렀다.

    “에어컨 바람 오래 쐬면 감기 걸리면서, 옷을 얇게 입었어.”

    그야 유니폼이니 다른 걸 걸칠 수 없었다. 연서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태헌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네.”

    “그럼 한 팀장은 이만 퇴근해도 됩니까?”

    태헌이 묻자, 센터장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키웠다.

    “예?”

    “어차피 숟가락만 얹었는데 일찍 빠진다고 티 나겠어요?”

    “전무님, 그게 무슨…….”

    “아니면, 좀 더 실수해볼 겁니까.”

    “무, 무슨…… 말씀인지.”

    “어디까지 무례할지 궁금하긴 한데, 더 두고 보긴 어렵겠고.”

    태헌이 고개를 까딱이며 센터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영문을 모르고 센터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조금 전에 하던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한 팀장이 잘못한 게 있어서 약간 꾸지람을 했습니다.”

    “약간 꾸지람이 아니던데.”

    “저, 전무님?”

    센터장이 목이 졸린 것처럼 쉰 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윤 팀장이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곤 연서에게 손짓했다.

    “한 팀장, 어 그래요. 그럼 지금 들어가요. 한 팀장 파트는 다 마무리됐잖아? 정리는 우리가 할게요.”

    행사가 끝나가고 있다곤 하나 마무리는 아직이었고, 이렇게 나가는 건 또 다른 불씨만 키우는 꼴이었다.

    그 순간 센터장이 두 눈을 흔들며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연서와 태헌을 손가락질했다.

    “그그, 설마. 한 팀장 낙하산 태워준 분이……!”

    제 말에 제가 놀랐는지, 센터장이 입을 크게 벌린 아귀처럼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그가 수초 뒤에야 삐끗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두 분이 무슨 사이시길래…….”

    “어떻게 해줄까.”

    센터장의 행태를 느긋하게 지켜보던 태헌이 잔잔하게 물어왔다. 연서는 작게 심호흡했다.

    실은 태헌의 도움이 싫지 않았다.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언제나 그의 그늘은 아늑했고 포근했다. 혼자 하는 데까지 했으므로, 더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무엇보다 태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를 부정할 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연서가 눈을 감았다 뜬 뒤에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모두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우태헌 전무님이 제 남편이에요.”

    연서의 폭탄 발언에 주변이 침묵에 휩싸였다. 뒤늦게 이쪽으로 향하던 김다예 대리과 오미현 주임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게 보였다.

    “우, 우 전무님이 한 팀장 남편이라고?”

    윤 팀장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네. 맞아요. 기회가 없기도 했고, 아무래도 놀라실 것 같아서 말씀 못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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