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83화 (83/85)
  • 외전 5화

    태헌은 손쉽게 센터장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연서의 능력으로 앉은 자리가 아니었기에 태헌의 힘이 아닌 업무 성과로 인정받고 싶은 것뿐이었다.

    “오래 못 기다리는 거 알지. 부탁인데, 나 외엔 다른 일로 울지 마.”

    그가 아깝다는 듯 연서의 눈물을 손끝으로 훔쳤다.

    “센터장님 때문에 운 거 아니야. 태헌 씨가 나 사랑한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니까, 그래서 좋아서…….”

    태헌이 연서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다가 고개를 살짝 내렸다.

    “나한테 하듯이, 다른 인간들도 이렇게 여우처럼 요리해 먹어. 그럼 네가 다 이기지 않을까 싶은데.”

    “싫어. 태헌 씨한테만 이럴 거예요.”

    태헌이 한숨과 욕설 비슷한 걸 흘리더니 참지 못하겠다는 연서의 입술로 다가왔다.

    “으음…!”

    조바심이 묻어난 걸음으로 거리를 좁히고 허리를 휘감았다. 들뜬 숨이 뒤섞이고 입술이 엇갈려 포개졌다.

    그가 열 오른 목울대를 느리게 움직이며 입맞춤에 긴장한 연서의 뺨을 내려다보았다. 옅게 흔들리는 속눈썹이 꼭 연서처럼 가냘팠다.

    요 몇 달간 태헌은 입을 꾹 닫고 점점 피곤함에 잠겨가는 연서를 보며 심장이 바짝바짝 야위어갔다.

    야윈다는 말이 딱이었다. 그의 영혼은 연서로 인해 살쪘다가 야위길 반복했으니까. 그래서 요즘은 혹한기가 된 것 같았다.

    연서는 어렸을 적에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꿈을 접었고, 코피 터져가며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해 겨우겨우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은호가 유치원에 간 시간 사이, 서재에서 의학 서적을 뒤적이던 연서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공부하고 싶어요.」

    「공부?」

    「조금 창피하지만, 의대…… 가보고 싶어요.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스리슬쩍 눈치를 보며 묻던 그녀를 떠올리면 흉통이 일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불행한 어린 시절을 어떻게 해서든 바꿔주고 싶었으나, 우습게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 태헌은 시간을 주무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고, 어릴 때조차 하지 않던 공상까지 하고 말았다.

    의사가 되고 싶단 연서에게 병원을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태헌은 지체하지 않고 연서가 해봄 직한 일을 추려 의사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을 제안했다. 세상에 쉽기만 한 일은 없을 테지만 연서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싶어 고심한 자리들이었다.

    그러자 연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복지재단을 택했다. 착하고 또 착한 여자는 강 여사를 아직도 마음에 묻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직책을 마다했고 태헌은 간곡히 설득했다. 제발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곳에 있어 달라고. 마음이 여린 연서는 결국 그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반쯤 받아들여 노인복지센터의 신설 팀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낙하산이란 소문이 돈다는 건 연서가 센터에서 주목받는단 소리였다. 싱그럽고 맑은 사람. 일머리가 있고 상냥함이 몸에 밴 연서의 존재에 지대한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태헌도 한 번 시선을 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그녀를 눈에 담게 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 눈에 예쁘지 않을까.

    연서는 동네만 나가도 숱한 관심을 받았다. 스스로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태헌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처럼 속 탈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센터장이 뭐 같이 구는 걸 보면 연서에게 열등감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낙하산이라고 대놓고 헐뜯는 자의 기저엔 질투와 저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패배감이 존재할 터였다.

    어쨌든 태헌이 원하는 건 연서가 마음에 담아 둔 말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거면 됐다.

    그는 그녀의 안식처가 되고 너른 숲이 되어 쉴 곳을 마련해주는 남편이 되고 싶었다.

    태헌에게 센터장이든 누구든 치워달라 부탁하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연서는 그럴 성격이 못 되었다.

    “…태헌 씨.”

    재차 짓쳐 드는 갈급한 입맞춤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서가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타액에 달큼하게 절은 작은 혀를 세차게 빨며 뿌리까지 긁자 연서의 다리가 휘청였다.

    잘록한 허리를 받치며 걸어가 벽에 기대게 했다. 차가운 욕실 타일에 놀라 움찔거리는 연서가 깨질까, 부서질까. 염려되면서도 치미는 격정이 폭풍 같아서 조절하기 어려웠다.

    널 너무 사랑해서. 너의 고행까지 질투하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질린다는 듯 보지 않으려나.

    실은 애타는 마음에 연서의 주변에 사람을 심고 싶었으나 인내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은 이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음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천히…! 읏!”

    연서가 애원해도 급류 같은 감정이 그도 버거워서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울다 젖은 눈을 볼 때면 지켜주고 싶다가 부숴버리고 싶기도 하고, 비어버린 그녀를 채워주고 싶다가 반대로 삼켜버리고 싶기도 했다. 온통 엉망이었다.

    “아……!”

    “다 젖었네. 씻어야겠어. 씻겨 줄게.”

    태헌이 한층 낮게 속삭이며 연서를 샤워부스로 데려갔다. 능숙하게 옷을 벗기고 피부를 어루만지고, 떨리는 살갗에 원하는 만큼 흔적을 새겨넣었다.

    문신처럼 깊게 스미길, 그래서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네가 되길.

    태헌은 이뤄지지 않을 바람을 불어넣으며 연서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손아귀에 가득 찬 연서에게서 빠른 박동이 느껴지자 피가 몰렸다. 뜨거운 물이 지면에 부딪혀 수증기가 자욱해졌다.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밟는 것만 같았다. 연서가 아까완 다른 자세로 축축해진 벽에 기대어 좀 더 힘겹게 울었다. 안개 숲에 갇힌 것처럼, 단둘이 된 것 같은 밀폐감에 아랫배가 수축하며 지끈댔다.

    “고개 내려 봐.”

    우리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보라고 종용했다. 눈을 내리뜬 연서가 몸을 조이며 화답했다. 짙은 음영이 깔린 복부 밑으로 날것의 감정이 선정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다.

    질리지 않는 행위였다. 거듭할수록 점점 중독되었고 쾌감이 누적되기라도 하는 듯 미칠 것만 같았다.

    서로를 찾으며, 서로를 부르며 끊임없이 확인했다. 연결되어 있음에도 그리웠다. 그래서 조금 더 파고들며 그녀의 심장에 닿길 소원했다.

    깊게 박혀 결코 떨어지지 않을, 다시는 놓치지 않을 관계가 되고 싶어서 태헌은 늘 허기졌다.

    사랑이란 말로 부족한 감정이 푸른 불꽃처럼 아프게 터졌다. 연서를 품은 심장이 욱신댔다.

    갈증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달리 대체할 단어가 없어서 마음을 담기엔 한없이 가볍기만 한 단어로, 갈급히 고백했다.

    “사랑해.”

    화답하듯 턱을 들어 올린 연서가 젖은 얼굴로 흐느꼈다. 충만감이 차올랐다.

    *

    수개월에 걸쳐 준비한 자선 파티가 열리는 날이 드디어 오늘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연서는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은호는 시가에서 맡아주기로 해서 아이 걱정은 덜었다.

    선예가 신혼집으로 찾아와 태헌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한 게 벌써 1년 전이었다.

    선예는 은호가 커가는 걸 멀리서 바라보며 여러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은호에게서 어린 태헌을 투영했다고 했던가. 얌전하게 굴 땐 태헌의 차분한 모습을 빼닮은 은호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티 없고 맑게, 행복하게 커가는 걸 바라보며 선예는 제 잘못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곤 태헌에게 미안하다 사과했다. 널 사랑해주지 못했노라, 고백했다. 모친의 사죄를 받은 태헌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잠한 눈으로 선예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후 세 사람은 종종 태헌의 본가를 찾았다. 태헌이 어떤 집에서 나고 자랐는지 궁금한 연서가 먼저 가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누굴 닮았는지 뛰어난 친화력의 소유자 우은호는, 순식간에 조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갖 재롱으로 시가 어른들을 쩔쩔매게 했다.

    가족들은 은호가 태헌의 명석한 두뇌와 연서의 다정함을 물려받았다고 입 모아 칭찬했다. 모나지 않고 상냥한 은호는 누구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서는 은호가 혹여 버릇없이 자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은호를 조심시키려고 하면, 선예와 이혁은 그냥 두라며 은호를 두둔했다.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그저 손주가 다 잘했다며 웃음꽃을 피우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이혁이 직접 은호를 데리고 출근해 무릎에 앉혀놓고 회의를 진행한 일도 있었다. 태헌이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한숨을 토해냈다. 태헌도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물론 태헌은 제 무릎에 은호보단 연서를 앉히는 걸 더 좋아했다. 그런 뒤엔 맛있는 걸 먹이고 입을 맞추고…….

    “휴우…….”

    상념에서 깨어난 연서는 어느덧 자선회 준비를 마친 파티 홀을 둘러보았다. 야근과 밤샘, 특근의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클래식 선율, 고급 음식, 풍성한 꽃과 질 좋은 카펫까지. 자선 파티치곤 호화로웠다. 손님을 최고로 대우해야 기부자의 마음이 여유로워질 거란 게 센터의 생각이었다.

    행사장 홀에서 빠져나온 연서는 한숨 돌릴 겸 비상계단을 찾았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은호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신호가 두 번도 채 흐르기 전에 은호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우리 은호 전화 빨리 받았네?”

    -네. 밥 다 먹으면 엄마가 전화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랬어? 기다려줘서 고마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였다. 제 피와 살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태헌과의 결실이었고, 그래서 더 귀했다. 은호가 주는 행복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찬란했다.

    가슴에 우주를 품은 것처럼 벅차고 감명받는 삶의 연속이었다. 이런 기쁨을 알게 한 은호의 존재가 너무도 감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