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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82화 (82/85)
  • 외전 4화

    연서는 침착하게 목을 축이곤, 다시 거둬가 깔끔하게 생수를 비우는 태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센터장님 전화예요. 내일 조금 일찍 나오래.”

    “왜?”

    “그건 잘 모르겠는데……. 자선회 문제 아닐까요? 정확한 건 가봐야 알 것 같아요.”

    태헌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서를 바라보았다. 연서는 괜히 웃었다. 센터장이 제게 혹독하단 걸 그는 몰랐으면 했다.

    태헌은 전처럼 그녀를 감시하거나 경호를 핑계로 사람을 붙이지 않았다. 연서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않은 이상, 자세한 상황은 모를 터였다.

    그러나 태헌은 눈치가 빨랐다. 혹시 센터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태헌이 지나가는 말로 한연서에 대해 묻기라도 한다면…… 떠도는 소문에 대해 듣게 되겠지.

    연서에게 대단한 백이 있다든가 스폰을 받는 거 아니냐는 말에 이어 애써 해명하고 싶지 않은 더러운 말들까지 그의 귀에 들어가는 건 원치 않았다.

    센터장의 자잘한 괴롭힘이야 혹독한 사회 경험이 있는 연서에겐 그다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상황을 태헌만은 몰랐으면 하니 괜히 쪼그라드는 것이다.

    연서는 거실 액자에 걸린 은호를 보며 답답함을 환기했다. 은호의 천사 같은 미소를 마주하면 어떤 산도 넘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음, 우선 씻을까요? 와인 마시고 그리고 자요.”

    “어떻게 잘까.”

    알면서 꼭 묻는다. 그를 원한다는 말을 듣는 걸 태헌은 아주 좋아했다. 아마 그런 걸 바라는 거겠지.

    “태헌 씨 원하는 대로…….”

    태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빈 생수통을 내려놓은 뒤 넥타이를 가볍게 끌어 내렸다.

    “말 안 할 거지.”

    다시 원점이었다. 잘 무마시키는가 했는데 센터장의 전화로 그의 의심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아무 일 없어요.”

    “확실해?”

    “그렇게 추궁하는 거 싫어요.”

    연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풀었다. 피곤하단 핑계도 한두 번이지 표정에서 티가 날 터다. 준비하고 있는 자선 파티만 끝나면 그간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도움을 요청한다기보단 그냥 하소연 정도로.

    “이런 게 싫으면,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숨기지 마. 그게 어려워?”

    “그렇게 말하는 것도 별로야. 싫어.”

    싫다는 단어에서 그의 동작이 멈추었다. 날카롭게 제련된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니. 태헌 씨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단호하게 싫다고 한 것 같아 연서가 말끝을 늘였다. 얼른 손을 뻗어 태헌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뗐다.

    “오늘 너무 피곤했나 봐. 태헌 씨랑 이런 실랑이 하면서 귀한 시간 망치고 싶지 않아. 먼저 씻고 올게요.”

    “한연서, 누가 너더러. 하…….”

    태헌이 말을 삼키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연서는 그제야 태헌에게 깃든 초조함을 읽었다.

    연서에게 어려움이 있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는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민하고 연서에 대해서라면 뭐든 달달 외우고 있는 남자니까.

    하지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니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거다. 연서의 마음이 다칠까 화조차 내지 못하면서.

    숨을 누른 태헌의 목울대가 사납게 들썩였다.

    “내가 너한테 뭘까, 싶을 때가 있어.”

    “그게 무슨…….”

    “꼭꼭 숨기고 진짜는 안 보여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정말 아니었냐고, 그가 배고픈 시선으로 물었다.

    태헌이 기회를 마련해 주었으니 앞으로 나가는 건 연서의 몫이었다.

    다만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서. 이렇게 한연서밖에 안 보인다는 듯, 속을 알려달라 원해주는 남자에게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까 두려웠다.

    낙하산이란 타이틀이 쇳덩이처럼 연서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물론 태헌은 그런 걸 바라지 않겠지만……. 연서도 그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그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미안해. 근데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또 나중이야?”

    태헌이 건조하게 되물었다.

    “응. 미안해. 먼저 씻을게요.”

    연서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혹시 몰라 잠금 버튼을 누르자,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열어.”

    “…….”

    “말싸움하려던 거 아니야. 미안해. 몰아붙이는 게 아니었는데.”

    태헌의 목소리에 후회가 깃들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너에 대한 건 전부 알고 싶어서 욕심낸 거야. 네가 싫다면 캐물어선 안 됐는데.”

    태헌의 말끝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음 상한 거 알아.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문 열어줘.”

    연서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연서에 한해 자존심을 챙기려 들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연서는 가난한 영혼을 포장해 보겠다고 태헌에게 비밀을 만들었다. 초조해할 남자를 알면서 벽을 만들고 밀어내고 걱정하게 만들었다.

    바보처럼. 그는 어떤 모습이든 다 사랑해줄 텐데. 연서는 입술을 씹다가 조심히 문을 열었다.

    태헌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찡그린 얼굴이 못내 가슴 아렸다. 한 뼘 정도 열린 문을 열며 그가 서서히 욕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행동이 마치 도망갈 시간을 주겠단 뜻처럼 느껴졌으나 연서는 피하지 않았다.

    “혼자 우는 것 같아서, 문을 열지 않으면 바로 부수려고 했어.”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열어달라면 열 거예요.”

    연서는 손을 뻗어 태헌의 뺨을 감쌌다. 온기를 느끼다가 뒤꿈치를 들고 두 팔로 태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귓가에 태헌의 박동이 요동쳤다. 저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태헌의 심장이 느껴져 더는 감추는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바보 같아. 바보 같은 건 태헌이 아니었다.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좋은 모습에 안달한 그녀가 어리석었다.

    연서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조금 힘들었어요.”

    “어떤 점이.”

    “업무 익히는 건 그럭저럭 할 만한데…….”

    “넌 잘했을 거야.”

    당연하다는 듯 태헌이 말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일을 시작하고 난 후, 잘했단 칭찬을 그에게서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마음을 내보일 용기가 조금 더 샘솟았다.

    “내가 떳떳하지 못해서 힘들어요.”

    “떳떳?”

    “나 낙하산이잖아. 센터에 소문 다 났대요.”

    태헌이 힘주어 연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좀 더 말해보라는 듯 뜨거운 숨결이 연서의 뺨에 닿았다.

    “태헌 씨 아니면 가당치 않은 자리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갑자기 한 팀을 이끌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더 염려했어야 하는 건데…….”

    “그게 네 능력이라곤 생각 안 해?”

    “…….”

    “네가 쥔 패가 나야. 그걸 썩히는 건 낭비고.”

    태헌다운 대답에 연서는 잠시 멍해졌다.

    “내가 가진 건, 전부 네 거야.”

    “…….”

    “내가 너 없으면 안 되는데, 그래도 거저 얻은 것 같아?”

    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자, 연서는 그런 것도 같아졌다. 그냥 그의 말을 전부 들어주고 싶어졌다. 마음이 아리고 또 벅차서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연서야.”

    “……응.”

    “아직도 도움받는 게 어려워?”

    습관처럼 고개를 저으려다가, 사실은 그랬던 것 같아 주저했다.

    “나도 태헌 씨한테 좋은 걸 주고 싶은데 매일매일 받기만 하잖아.”

    결국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한심해도 자꾸만 그의 앞에선 약해졌다.

    “넌 받아도 돼. 너는, 해도 돼.”

    “정말 될까….”

    “뭐든 주고 싶어. 좋은 것만, 예쁜 것만 모아서 안겨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아. 널 방해하는 걸 전부 치우고 싶어져.”

    너를 웃게 하고 싶어. 태헌의 중얼거림이 연서의 마음을 두드렸다.

    마음 한구석에 평생 짐처럼 자리할 뻔한 하찮은 자격지심을, 태헌은 진심 어린 말로 물거품처럼 쫓아냈다.

    “네 표정이 나날이 어두워지는 게 더 힘들어.”

    태헌의 목소리가 사뭇 무거웠다. 연서는 손을 풀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어느덧 뺨을 적신 물기를 그가 손끝으로 더듬어 지웠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참는 건 독이란 걸 알아야지.”

    그의 말을 듣고 있을수록 어리광을 부렸단 사실이 선명해졌다. 연서는 가슴을 들썩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큰일이야. 자꾸만 울어서.

    슬퍼 우는 건 아니었다. 태헌의 위로에 단단히 독기를 품으려던 마음이 제멋대로 무너진 것뿐이었다.

    “나는, 너무 철이 없는 것 같아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철없이 이것저것 요구해봐. 그럼 춤이라도 추겠어.”

    춤추는 태헌을 상상했다가 영 그림이 안 나와 웃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태헌 씨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건 싫어요. 나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게 편치 않아요.”

    연서가 질문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눈썹을 찌푸린 그가 연서의 뺨을 뜨거운 혀로 훔쳤다.

    “네가 싫어하는 짓 안 한 지 꽤 되지 않았나. 아직도 신임이 없어? 왜, 너 괴롭히는 인간들 죄다 갈아버릴까 걱정이야?”

    “조금? 그리고 괴롭히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에요.”

    “누가 있긴 있단 소리지. 누구, 센터장?”

    유도 심문이었어. 연서가 아차 싶어 눈을 부릅떴다.

    “방금도 전화 받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지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항상 너만 눈으로 좇고 있는데.”

    어떻게 모를까.

    “…아직은 참을 만해요.”

    “내가 어떻게 해줄까.”

    뭐든 다 해줄 것처럼 태헌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마음을 털어놓은 것만으로 강대한 아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해주지 않아도 돼요. 조만간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예요.”

    당신이 내 남편이란 사실. 한연서가 우태헌의 사랑을 몽땅 받고 있단 사실을 알면 센터장은 함부로 대하지 못할 터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센터장이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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