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8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부터 불볕더위의 기미가 보였다. 운전대를 잡은 연서는 출근길에 올랐다.
고작 30분 거리를 달려 출근했을 뿐인데 기력을 전부 소진한 까닭은 출근하는 동안 연거푸 전화해대는 센터장 때문이었다. 언제 출근하는지 연신 닦달하는 통에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태헌이 올해 여섯 살인 은호의 등원을 도맡지 않았다면 연서의 아침은 더욱 바빴을 터였다.
사무실에 도착한 연서가 가방을 내려놓기 전에 센터장의 전화가 또다시 울렸다. 이쯤 되니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연서가 입꼬리에 힘을 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센터장님. 지금 도착했습니다.”
-어디야. 사무실?
“네.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왔으면 바로 이리로 와야지. 사무실을 가긴 왜 가?
걸걸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골이 지끈거렸다.
“금방 가겠습니다.”
연서가 전화를 끊고 가방을 한쪽으로 치우자 맞은편 자리에 앉은 김다예 대리가 속닥거렸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연서는 빙긋 웃어 보였다.
“네. 김 대리님은 박 이사님 쪽에 일정 확인 한번 해주세요. 8시 이후는 어렵고 6시까진 오셔야 한다고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전화번호 딱 눌러놓고 대기 중입니다.”
김다예 대리가 눈을 찡긋했다.
연서가 세원 그룹 산하의 재단인 노인복지센터에 들어온 지 어느덧 3개월째였다. 신설인 지원2팀의 팀장을 맡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제 업무가 좀 손에 익어가는 차였다.
몇 달 전, 공부를 시작해 보려는데 태헌이 재단 일을 권유했다. 그가 추천한 국한 병원의 중책을 맡는 자리를 마다하고 고심 끝에 택한 게 노인복지였다.
아직도 종종 강 여사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곤 했고, 그녀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베풀 수 있다면 값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생이 아름다운 건 죽음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위해 작은 도움이나마 건네고 싶은 게 최근의 심정이었다.
그렇게 연서는 두 달 정도 태헌이 붙여준 선생님과 공부를 한 뒤에 재단에 들어왔다. 함께 일할 직원들이 불편하지 않게 세원 그룹 오너가 사람이란 것은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을 이용해 센터장 사무실로 이동했다.
똑똑똑.
연서가 노크하자 센터장이 들어오라 대꾸했다. 그녀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속으로 한숨 쉬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쪼아댈까.
“좋은 아침입니다, 센터장님.”
“한 팀장 요새 점점 출근이 좀 늦네?”
9시가 되기 10분 전이지만 센터장은 꼬투리를 잡았다. 그는 어떻게든 연서를 못살게 굴려고 혈안이 된 사람이었다.
가운데가 휑한 머리에 두둑한 배, 흘러내린 벨트까지.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지만 탐욕 가득한 눈두덩과 기름진 입술을 보고 있으면 미약한 거부감이 들었다.
무슨 말이든 저 좋을 대로 해석하는 꼬인 심사까지 더하면 화룡점정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이골이 난 터라 연서가 체념하며 거짓 웃음을 빙긋 지어 보였다.
“길이 좀 막혀서요.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아 뭐 해? 왔으면 앉아야지.”
의자에서 일어난 센터장이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를 추켜 올리며 말했다.
정체불명의 낙하산. 그는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연서를 이렇게 표현했다. 경력 없는 연서가 팀장 자리에 앉았으니 누군가 찔러준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내비친 것이다.
신생팀을 맡게 된 연서의 입사 과정이 명확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연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을 거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니 함부로 대할 순 없고, 묵인하자니 불편하고.
연서는 센터장의 배가 책상에 걸려 휘청이는 모습을 보곤 얼른 시선을 내려 자리에 앉았다. 그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30분 안으로 윤 여사님이 방문한다는데 이렇게 늦어서야 돼?”
“윤 여사님이요? 오늘 10시 방문으로 알고 있는데, 변동된 건가요?”
“한 팀장, 스케줄 파악 제대로 안 해?”
센터장이 소파에 앉으며 눈을 부라렸다.
“죄송합니다. 전달이 늦었나 봅니다.”
어제 퇴근 전, 윤 여사의 방문을 오늘 오전 10시로 보고 받았기에 갑자기 바뀐 시간이 의문이었지만 우선 고개를 숙였다.
본건물의 1층엔 자선 사업의 일부인 소규모 갤러리가 있었다. 문화재단과 협력한 사업으로 그 수익금은 재단의 운영비가 되었기에 기부자의 대우를 소홀히 할 순 없었다.
지원2팀 업무는 직접적으로 봉사에 참여하기보단 센터의 운영을 돕는 역할이었다.
오늘 방문할 윤 여사는 후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는 이였으니 센터장은 그녀가 방문할 때마다 예민해졌다. 연서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전처럼 윤 여사 심기 거스르게 하지 말고 잘하란 말이야. 알아들어? 빠릿빠릿하게 원하는 걸 캐치 해야지.”
“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말고 제대로 해. 요즘 것들은 노력이란 말이면 단 줄 안다니까?”
연서가 입매를 굳히며 나갈 채비를 했다. 더 있어 봐야 잔소리만 길어질 터다.
“그럼 이만 나가서 준비하겠습니다.”
“그그, 이번에 자선 파티 얘기도 꺼내고, 기부품 없는지 살살 구슬리란 말이야.”
한 달 뒤 자선 파티가 있었다. 고가의 예술품이나 의류를 기부받아 그 수익금을 재기부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기부 물품을 적립하는 건 센터장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까탈스러운 윤 여사에게 그 얘길 꺼내려니 입이 안 떨어지는 걸 터다. 연서가 총대를 메란 소리였다.
“그리고 그그, 점심께에 세원 자동차에서 사람 하나 온다고 연락이 왔어.”
“세원 자동차요?”
세원 자동차라면 태헌이 있는 곳이었다. 익숙한 이름에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그래. 이번 자선 파티 운영을 크게 도우실 것 같은데, 그때 한 팀장도 와. 얼굴마담 해야지.”
얼굴마담이라니. 하는 말마다 어쩜 이렇게 껄끄러울 수 있을까. 번번이 비호감인 것도 재주였다.
연서의 위아래를 훑는 센터장의 낯에 못마땅한 빛이 서렸다.
“그런 옷은 대체 얼마야?”
“네?”
“한 팀장 그 똥차를 보면 잘사는 것 같진 않고, 주소 보니까 집도 원룸이던데. 가만 보면 옷이랑 가방은 명품 같아? 한 팀장, 진짜 누가 뒤봐주는 사람 있어?”
두툼한 주둥이가 자꾸만 못된 말을 지껄였다. 태헌도 지옥의 말솜씨를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센터장은 그보다 더했다. 훨씬 더 저렴했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센터장님!”
재차 문을 두드린 누군가 다급하게 센터장을 불렀다.
“왜요, 무슨 일이야?”
센터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연서도 몇 번 본 적 있는 직원이 안으로 상체만 반쯤 내밀었다.
“큰일 났습니다. 진 원장님 남편분이 오셨는데…. 일주일 전에 아내분이 구입한 작품을 환불해 달라고 난리셔요.”
센터장이 해결하라는 듯 연서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연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
오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아침에 찾아온 진 원장의 남편을 달래느라 총력을 다했다고 봐야 했다. 그는 센터의 로비에서 그림이 위조품이라며 우겼고 사기를 당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센터 내엔 윤 여사를 비롯해 다른 후원자와 손님도 있었기에 소동을 빠르게 잠재워야만 했다. 원하는 대로 그림을 환불한 그가 씩씩대며 돌아가자, 센터장이 뒤늦게 나타나 요령 없다며 연서를 타박했다.
「그거 한 팀장, 연봉으로도 못 사는 그림이야. 환불을 해주긴 왜 해줘? 엉?」
마음 같아선 빈 금액을 채워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 여사의 유산 말고도 태헌이 선물이랍시고 증여한 주식과 부동산이 꽤 되어 하루하루 불어나는 자산을 확인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이래저래 센터장에게 시달린 연서는 점심을 먹을 힘이 없어 휴게실에 앉아 커피만 홀짝였다. 휴게실은 오늘 오전에 방문했다는 세원 자동차 직원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연서는 사고를 수습하느라 그 직원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떠들썩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세원 자동차라면 태헌이 있는 곳이기에 귀가 자꾸만 쫑긋거렸다.
“그렇게 잘생겼다면서요?”
“네. 저는 걸어 다니는 화보인 줄. 진짜 여태 헛살았다 싶더라니까요. 이 좋은 걸 처음 보다니.”
“왜 오신 거래요?”
“기부도 하시고 임직원 봉사 활동 때문이라던데?”
센터는 정치인과 기업인의 봉사 활동을 연계하기도 했다. 봉사자와 수혜자의 시간을 조율하고 만남을 돕는 것도 연서의 일이었다.
잘생겼다는 그 남자가 아무리 잘나 봐야 태헌만 하지 못할 거다. 정말 장담하는데 태헌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의 근사한 모습을 그려보던 연서의 귓가가 남몰래 붉어졌다.
은호가 여섯 살이 되었으니 함께 보낸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그가 좋았고 볼 때마다 설�으며, 사랑이 마르지 않고 샘솟았다. 태헌과 아이를 생각하면 서글픈 일을 당해도 금방 행복해지곤 했다.
오늘 아침에도 은호가 보는 앞에서 굳이 굳이 무릎에 앉혀서 밥을 먹여주는데……. 어휴 참.
그는 기어코 드레스룸에 따라 들어와 옷을 입혀 주겠다고 끈질기게 굴더니 전부 벗겨놓곤 이곳저곳 입을 맞춰댔다.
그러다 밖에서 은호가 불러 얼마나 놀랐는지. 태헌은 뻔뻔하게 엄마랑 있으니까 이따 오라고 말하며 연서의 몸에 묻은 입술을 뗄 생각을 안 했다.
겨우겨우 태헌을 밀어냈을 땐, 연서의 두 뺨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후였다.
후엔 은근한 목소리로 출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삭이던 남편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