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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78화 (완결) (78/85)
  • 78화

    차에서 내려 연서를 안고 차고를 벗어나는 태헌의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병원으로 바로 가는 게 어때.”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 배 뭉침이 잦았다. 아직 출산 예정일이 남은 터라 진통은 아닌 것 같은데 싸한 통증이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집이 코앞인지라 우선 집에서 휴식을 취한 뒤, 그래도 낫지 않으면 병원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증상이 있었고 그때마다 가진통이란 진단을 받았기에 헛수고를 아끼고 싶었다.

    차고에서 거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너른 정원이 보이는 커다란 거실은 갤러리처럼 넓고 깨끗했다.

    태헌에게 안겨 들어오던 연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은 거실을 한편에 종이가방과 상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어떻게 안 써요?”

    “내일 돌려보낼 거야. 잠깐 둔 것뿐이고.”

    아마도 육아용품일 것이다. 이미 아이 방과 창고에 선물 받은 육아용품이 한가득했다.

    대부분이 세원 그룹과 관련된 인사들이 선물로 보내온 것이었다. 쉬지 않고 들어오는 선물에 지친 연서가 어느 날 더는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번엔 누구예요? 설마 한 곳에서 온 건 아니죠?”

    “아버지야.”

    “아버님이요?”

    이혁이라니, 연서는 조금 얼떨떨했다. 선예와 태선에게서 선물을 받은 지 좀 되었다.

    선예는 아기 침대와 가구를 제작해 선물했고, 태선은 유모차와 이불을 선물했다. 태헌이 그대로 돌려보내려던 걸, 그래도 반짝이를 위해 직접 제작한 걸 거절하는 건 너무한 것 같아 받아들인 것이다.

    선예는 요즘 종종 태헌의 사무실을 찾았다. 신 비서를 통해 공적인 스케줄을 만들어 지금이라도 틀어진 아들과의 관계를 잡아보려 애썼다.

    그런 선예의 노력에 연서는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고착된 관계가 변하기란 쉽지 않은데. 물론 용서하고 말고는 태헌의 몫이기에 연서는 필요 이상으로 나서지 않을 터였다.

    “후계자로 점찍은 건지도 모르지.”

    “우리 반짝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알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태헌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보고 고르란 뜻이겠지.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아주머니께 다시 일러둘게.”

    아이가 태어날 때가 다가와 일하는 이모님을 한 분 더 들였다. 이모님은 선물의 출처가 세원 홀딩스 부사장이자 태헌의 부친이니, 의심 없이 받았겠지.

    “이모님께서 잘 모르셨을 거예요.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태헌의 냉정함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지독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기본 사항을 숙지하지 않은 이모님을 추궁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할게. 일단 누워.”

    태헌이 커다란 소파에 연서를 눕혔다. 사람 둘이 뒹굴어도 떨어지지 않을 넓은 소파는 임신한 연서를 위해 태헌이 특별히 사들인 것이었다.

    소파 앞 TV와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 손 뻗으면 닿을 냉장고까지. 구조가 어찌나 편리한지 이곳에 누우면 일어나기가 싫었다.

    연서는 왼쪽으로 누워 쌕쌕 숨을 내쉬었다. 만삭이 되니 숨 쉬는 것도 어려웠다. 태헌이 무릎을 굽혀 앉아 연서의 허리를 주물렀다.

    “배는 어때. 신 교수 부를까.”

    “아니. 좀 쉬면 나아질 거야.”

    “목욕물 받을 테니까 좀 쉬고 있어.”

    “응.”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과 넥타이를 아무 데나 벗어두고 욕실로 가는 뒷모습을 보며 연서가 돌아누웠을 때였다. 배 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 다리 안쪽으로 축축한 게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양수?

    “…헌 씨.”

    연서가 하얗게 질려 중얼거렸다.

    이게 뭐지? 정말 양수인가?

    “태헌…….”

    주르륵. 아까보다 많은 양의 액체가 흘렀다. 사색이 된 연서가 온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태헌 씨!”

    그 소리를 듣고 복도 끝에 있던 태헌이 순식간에 달려왔다.

    “왜 그래.”

    “이상해. 이상한 소리가 나고. 여기…….”

    연서가 아래를 눈짓하자 원피스를 들친 태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괜찮아. 양수 터진 거야.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진통은?”

    “아프지 않은데…….”

    당황하니 사리 분별이 더디었다. 의료인의 지식이 하등 쓸모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준비해서 병원으로 가면 돼.”

    놀라 까무러치기 직전인 연서와 다르게 태헌은 이런 상황을 대비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움직였다.

    연서의 속옷에 패드를 대고, 수건을 가져와 차 조수석에 깔았다. 그러곤 연서를 태우곤 재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핸들을 감았다.

    “아프면 말해.”

    “응.”

    아프지 않다고 말했으나 아까부터 싸하게 찾아오던 통증이 점점 더 강도가 세지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연서야, 한연서.”

    “응. 태헌 씨.”

    “다 왔어. 안을게.”

    태헌이 연서를 안은 채 분만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병원 계단을 통해 뛰는 태헌을 보고서야, 그도 함께 긴장하고 있단 걸 실감했다.

    일자로 굳게 닫힌 태헌의 입술이 평소보다 더 강직되어 있단 걸 뒤늦게 확인했다. 연서는 그의 품으로 얼굴을 묻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만실로 들어가자, 대기하던 간호사가 달려와 연서를 살폈다.

    “한연서 씨죠?”

    “30분 전쯤부터 이럽니다. 진통도 있고.”

    미리 전화해둔 덕에 의료진은 재빠르게 연서의 처치를 시작했다. 가족분만실 침대에 누운 연서는 점점 진해지는 진통에 말을 잃어갔다.

    “촉진제 넣을 거예요.”

    출산은 절대로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아프고 괴롭고, 처절했으며 분주하고 간절했다. 그 모든 과정을 태헌은 빠짐없이 함께했다. 연서의 머리맡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하나만 기원했다.

    연서가 무사하길.

    “무통은 언제 합니까. 많이 아파하는데.”

    태헌의 까칠한 목소리에 내진을 마친 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많이 진행돼서 무통은 어려우실 거예요. 한 시간 안에 출산하실 것 같아요.”

    진통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데 안도해야 하는 건지, 통증을 줄일 수 없이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무엇이든 태헌은 연서가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아파하는, 연서에게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어 피가 말랐다.

    간호사 여럿과 호흡을 맞추며 연서가 힘을 냈다. 이런 때 태헌이 할 수 있는 건 연서의 손을 잡는 것뿐이었다.

    빌어먹을.

    태헌의 이성이 간당간당할 무렵, 의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조급해진 태헌이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

    진통의 강도가 최고치를 찍었는데도 연서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 지독한 통증을 앓는 소리 없이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켜보는 태헌은 마음이 아팠다. 아플 때 기대본 적이 없어서 아프단 소리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전투와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연서의 희생 끝에 아이가 산도를 통과했다.

    으아앙.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깊은 안도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2시 21분, 남자아이입니다.”

    태헌은 허리를 숙여 땀에 젖은 연서의 머리칼을 넘기고 입술을 이마에 붙였다.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에 키스했다. 실핏줄이 터져버린 얼굴을 안쓰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두 번 다시 아이는 없어.”

    눈을 찡그리고 숨을 힘들게 내쉬던 연서가 힘 빠진 듯 웃었다.

    “좀.”

    “웃음이 나오지.”

    “지금 너무 행복해요.”

    “고생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그동안 버티느라 수고했어.”

    연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온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는 동안, 아이의 안위만큼이나 친정엄마를 떠올렸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힘들게 날 낳았구나. 엄마의 목숨을 담보로 내가 태어난 거구나.

    그 감사함을 전하지 못했다. 살아 계실 때 조금 더 잘해드릴걸. 놓친 시간은 이리도 야속했다.

    연서는 잘생긴 눈썹을 한껏 일그러뜨린 태헌에게서 그 분위기가 닮은 선예를 투영했다.

    선예도 그랬을 터다. 이리도 힘들게 태헌을 낳았을 거다.

    “불편한 데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

    태헌은 아이가 궁금하지도 않은지 연서에게 고정한 눈을 단 한 번도 떼지 않았다. 후 처치하는 의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산모는 괜찮은 겁니까?”

    “네. 열상도 크지 않고 괜찮습니다. 이곳에서 회복하시고 한 시간 후쯤, 안정되면 입원실로 올라가실 거예요.”

    출산은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회복이란 길고 긴 여정이 남아 있단 걸 아는 태헌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대신해줄 수 없음에 피가 전부 말라버릴 것 같다.

    “태헌 씨, 아이.”

    “응?”

    “우리 반짝이 보고 싶어요.”

    그제야 태헌이 아이 쪽을 바라보았다. 의료용 시트에 싸인 아이가 간호사의 품에 안겨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서럽게도 울었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열 개 맞고 다른 이상 없어요. 안아 보세요.”

    간호사가 연서의 옆으로 아이를 놓아주었다. 아이를 바라본 연서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어떻게 해. 엄청 조그맣다.”

    “이 조그만 게 나오느라 네가 아팠어.”

    “울지 마, 울지 마. 아가야.”

    연서가 조곤조곤 속삭이었다. 기특하게도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이렇게 예쁘기도 한 걸까.

    연서는 벌써 고슴도치 엄마가 다 되었는지 눈을 꼭 감은 아이가 꼭 천사처럼 보였다.

    “반짝아, 엄마야.”

    작게 부르자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처럼 아이가 울음을 완전히 그쳤다.

    “너 닮았네.”

    아이를 보던 태헌이 던지듯 감상을 내놓았다.

    “그래요?”

    “응.”

    “아이는 이제 몇 가지 검사 후에 저희가 돌볼 거예요. 아이 보시려면 신생아실 오셔서 벨 눌러주시면 돼요.”

    짧은 만남이었다. 아쉽게도 간호사가 아이를 데려갔다. 멀어지는 아이를 보며 연서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태헌 씨가 반짝이 사진 찍어줘요.”

    “그래.”

    “그리고 태헌 씨 가족분들에게도 우리 반짝이 사진 보내주면 어떨까요?”

    태헌이 비딱하게 침묵했다. 처치가 끝난 연서의 배 위로 담요를 당겨 덮었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나는요, 우리 아이가 사랑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얘긴 처음 듣는다는 듯 태헌의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었으면 해요.”

    연서는 세원의 사람이 되기 싫다고 태헌에게 못 박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태헌이 세원 그룹의 사람이고, 수장이 될 운명인 이상 연서 또한 그들과의 고리를 완전히 끊긴 어려웠다.

    사실 그건 투정이었다. 이젠 반짝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연서가 용기를 내어야 할 때였다.

    태헌의 세상에 발을 들여볼 작정이었다. 몸이 회복되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태헌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그리고 고마워요. 엄마 되게 해줘서.”

    태헌이 말을 잃었다. 언뜻 그의 눈가가 붉어진 것도 같았다.

    “아까 봤죠? 우리 아기 연예인 해도 되겠어. 예뻐도 너무 예뻐.”

    태헌이 떨리는 손을 들어 연서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갓 태어나 아직은 쭈글쭈글한 아기에게 연예인이라니. 그런 칭찬은 이르지 않나. 연서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로 삼았다.

    하긴, 아이가 예쁜 건 사실이었다.

    “그래, 너 닮았다니까.”

    *

    연서는 어젯밤 용인에 내려왔다. 태헌이 긴 여름휴가를 받은 터라 용인 집에서 사흘간 머무르기로 했다.

    아침 산책을 다녀온 연서는 샤워하고 거실로 향했다. 이곳도 서울 집처럼 거실 한쪽 벽이 통창이 되었다. 넓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시야엔 햇살이 가득했다.

    연서는 주스를 마저 마시고 정원으로 나왔다. 그네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연서는 버릇처럼 그네에 앉아 흔들흔들, 바람이 흘러가는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어디선가 재잘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절로 미소가 흘렀다.

    태헌과 올해 세 살이 된 은호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간식을 사러 시내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시져.”

    “우은호, 뭐가 싫어. 그럼 사탕 두 개 먹고 배탈 날까?”

    “시져. 됴! 됴!”

    사탕을 두 개 달라고 떼 부리는 아이의 혀짧은 목소리가 마냥 귀엽기만 해 연서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한 손엔 아이를 안고, 한 손엔 검은 봉지를 든 태헌이 연서를 발견했다.

    언제나 연서를 보는 그의 눈빛은 검은 우물처럼 짙고 깊었다. 그 안엔 애정과 위험이 함께 도사렸다.

    그 아득한 애정에 도취되어 연서는 그가 없이 하루도 살지 못했다.

    태헌은 연서에게 시원한 그늘이었다. 우태헌으로 드리운 짙은 그림자엔 휴식과 안식, 평화가 있었다.

    “엄마!”

    은호가 연서를 발견하고 고사리손을 뻗었다. 이목구비는 연서를, 길쭉한 뼈대는 아빠를 닮은 아이였다. 피부가 하얗고 인형 같아 딸이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엄마! 엄마!”

    은호가 바둥거리자, 태헌이 아이를 내려줬다. 은호가 서툰 걸음걸이로 연서에게 달려왔다.

    그네에 앉은 채로 은호를 안아 들자 품이 가득 찼다. 따뜻하고 말랑한 체온을 가진 아이는 날마다 연서를 웃게 했다. 불행이 끼어들 틈 없이 행복했다.

    연서가 아이를 안은 채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은호가 연서의 품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네 뒤로 향한 태헌이 줄을 가만히 밀어주었다. 그는 아늑한 그늘이 되어 연서와 아이를 감쌌다.

    살랑살랑, 그를 만난 해부터 네 번째 맞는 봄이었다.

    <『도망 비서』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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