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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77화 (77/85)

77화

고기로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였다.

“여기 쏘주 한 병이요!”

지영이 주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시원한 소주가 금세 배달되었다. 두 사람은 술을 하지 못하는 연서를 약 올리며 순식간에 소주 세 병을 비웠다.

연서는 볶음밥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배가 팽팽해질 때까지 음식을 먹었더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만에 노래방 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소화가 간절했다.

“좋아. 여긴 내가 계산할게.”

“놔두세요. 임산부는 먹기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조카한테 이런 거라도 해주자. 어?”

지영의 형편을 생각해서 출산 선물을 마다했더니 조카에게 아무것도 못 해준다며 그녀는 뿔이 난 상태였다. 그 안에 깃든 다정함을 알기에 연서는 미소 지었다.

지영이 계산대로 다가서 멋지게 카드를 내밀었다. 세 사람이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사장님이 상상 이상의 금액을 불렀다. 사장님과 지영의 동공이 함께 흔들렸다.

세 사람은 근처의 노래방으로 향했다. 연서는 혼이 빠지도록 몸을 흔드는 지영와 현호를 보며 근심 없이 웃었다.

“이제 3차 가자!”

얼굴이 벌게지도록 뛰어논 지영이 연서를 옆에서 끌어안으며 물었다.

“찜질방 어때?”

“이제 얘 들어가야지. 유부녀 오래 잡는 거 아니다.”

현호가 말렸으나 지영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연서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왜에. 더 놀자아. 연서 많이 힘들어?”

“으음, 나도 더 놀고 싶은데 이만 가야 할 것 같아.”

아까부터 배가 살짝 뭉쳤다가 풀어지는 증상이 있어서 무리할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한동안 친구와 어울리기 힘드니 연서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대신 아직 예정일까지 시간 있으니까 또 보자.”

“어쩔 수 없지. 아기 낳기 전에 또 보는 거다?”

“응. 연락할게.”

하도 웃어서 광대가 아파 연서는 얼굴을 주무르며 노래방 계단을 내려왔다. 앞에는 지영이, 뒤에는 현호가 서서 연서가 넘어지지 않게 도왔다.

“연서야, 태워줄게. 너 차 안 가져왔지?”

“아니야. 택시 타면 금방이야.”

어차피 현호도 대리운전기사를 불러야 했고, 연서의 집은 반대 방향이었다.

“야 너를 어떻게 혼자 보내. 그러지 말고 현호 차 타라. 응?”

지영이 그럴 수 없다며 연서를 뒤에서 껴안았다.

웃으며 도로 가를 바라보던 연서의 눈이 커졌다.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장신의 실루엣이 익숙한 터다.

스리피스 슈트. 한쪽 눈썹을 가린 앞머리. 일정한 보폭의 걸음걸이.

여전히 연서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그는, 태헌이었다.

걱정할 게 뻔해서 장소를 옮길 때마다 메시지를 남겼는데, 이렇게 데리러 올 줄은 몰랐다. 분명 집에서 밀린 업무를 한다고 했는데 옷차림도 그렇고 회사에서 오는 것 같았다.

“태헌 씨, 어디 들렀다가 오는 거예요?”

“시간이 늦어서 데리러 왔어.”

“안녕하세요.”

현호가 먼저 태헌에게 인사했다. 태헌이 연서에게 닿았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그를 마주했다.

연서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태헌이 현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던 과거가 여전히 장막처럼 존재했다.

“네. 또 보네요.”

태헌이 무던히 인사를 건넸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어 구면이었다. 현호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넉살을 떨었다. 악수를 권한 거다.

그 손을 태헌이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악수를 청하면 태헌은 그 손을 가볍게 놓았다가 떼는 편이었다. 무도한 것 같아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다.

그러나 현호에겐 어떻게 나올지 몰라 연서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태헌이 조금만 더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면, 무리해서라도 그를 친구들에게 소개했을 텐데.

어쩌지.

태헌의 침묵에 현호가 눈웃음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 그 손이 무안해지기 전에 연서가 나섰다.

“인사해요.”

태헌의 손과 현호의 손을 각각 잡아 붙여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뵐 일 많을 것 같아요. 그죠, 연서야?”

“응.”

악수한 손은 금세 떼어졌으나 분위기가 와장창 깨지는 건 면했다. 연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좋은 그림이야.

그에 현호가 허,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 친구의 노력이 실로 우습기도 애잔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럼 언제 형님도 같이 식사하시죠.”

“아이 태어나고 연서 몸 회복하면, 자리 만들겠습니다. 그때 제대로 인사 나누죠.”

태헌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연서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지영을 발견한 그가 말을 이어갔다.

“처음 뵙네요. 우태헌입니다.”

“네, 네……. 이지영입니다.”

지영의 목소리가 땅굴을 파고드는 것처럼 작았다. 연서는 수줍어하는 지영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태헌이 별로라던 지영의 눈에 별이 콕콕 박혀 있었다.

지영은 쇼핑몰 직원이 된 이후 잘생기고 예쁜, 보기에 아름다운 것에 현혹되는 일이 잦았다. 누구든 돌아보게 만드는 우월한 외모를 가진 태헌이니 지영의 마음에 꼭 들 수밖에.

그런 지영을 잡아끈 건 현호였다.

“가자. 지땡.”

“응. 자기야.”

두 사람이 자석처럼 딱 달라붙었다. 지영과 현호의 이런 모습은 아직 어색했다.

두 사람은 사귄 지 벌써 6개월 차였다. 현호가 대만으로 떠나려고 했을 때 지영이 제 마음을 자각했다나.

전부터 현호의 마음을 알고 있던 지영이 거침없이 직진했다고 했다. 그러나 현호가 연서의 비밀을 지키느라 잠시 어긋났다고.

연서가 해외를 돌며 이별의 아픔을 지우려 애쓰던 그때, 현호는 사랑 대신 우정을 택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평생 갚아도 부족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 태헌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가야지. 몸 차갑다.”

“태헌 씨는 그럼 집에서 나온 거예요?”

“응.”

그런데 왜 이렇게 갖춰 입고 나와?

연서는 자꾸만 제 남편을 흘긋대는 시선을 의식하며 속으로 투덜댔다. 태헌과 잡은 손을 꼭 잡았다.

이런 번화가에 있는 태헌은 이상하면서도 또 곧잘 어울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 남자가 근사하고 독보적이라 눈을 못 떼는 거겠지.

연서는 얼른 태헌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하고 나니 뺨이 뜨거워졌으나 나날이 질투가 심해져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안 돼. 내 것이란 말이야.

차에 오르자 태헌이 조수석 뒤를 짚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평소처럼 벨트를 채워주려는 줄 알았는데 그의 턱 끝이 향한 곳은 연서의 뺨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 빨아줘.”

“…네?”

“착하게 기다렸는데 상 안 줘?”

태헌이 입술을 살짝 벌려 그 안에 자리한 혀끝을 내보였다. 그가 혀로 얼마나 유려한 그림을 그리는지 알기에 심장이 박동이 도닥도닥 빨라졌다.

꽉 막힌 공간이었다. 오직 태헌만 눈에 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숨이 가빠왔다.

주말은 태헌과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그런 귀한 날을 친구들을 만나느라 함께하지 못한 점은 연서 또한 아쉬웠다. 그러나 연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한연서.”

몸에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뱄다. 지금도 너무 가까워서 곤란했다.

아까 가글하고 껌을 씹긴 했지만 그래도.

“집에 가서 씻고, 그리고 해요.”

“혀만 빨아달라는데 왜 안 돼.”

“이럴 시간에 얼른 가요.”

“내가 해?”

그러나 태헌은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아까보다 더 지독하게 굴었다.

연서의 허벅지를 커다란 손으로 덮으며 바깥으로 벌릴 듯 말 듯 위험하게 지분댔다.

“내가 하면 더 늦어질 건데.”

“순 협박쟁이.”

“뻔히 불붙을 거 알면서 입 맞춘 게 누군데.”

결국 연서가 눈을 내리감았다. 사실은 연서도 태헌의 체온이 그리웠기에 유혹을 계속해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태헌의 입술을 향해 다가가 숨은 열기를 찾았다. 벌어진 틈에 도사리는 미끈하고 부드러운 혀끝을 입술 사이에 묻고 살짝 빨아들였다.

아. 어떻게 해.

연서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밭은 숨을 내쉬다가 떨어져 나왔다.

“부족해.”

“태헌 씨가 하라는 대로 했잖아요.”

“빠는 거?”

새빨개진 귓바퀴에 그의 손길이 은근히 닿았다가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입 맞추듯 귓바퀴를 따라 더듬던 손가락이 귓속으로 처박혔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어떤 행위를 연상하는 행위에 연서가 그의 셔츠를 잡고 숨을 바삐 토해냈다.

“태, 태헌 씨…….”

짙게 밴 태헌 특유의 향기가 이 순간을 더 아득하게 했다. 아까부터 방만하게 벌어진 그곳에 태헌의 손이 머무르며 느긋한 파도를 선사했다.

“아, 태헌 씨…….”

“이번엔 제대로 빨아. 그래야 집에 가지.”

“못됐…….”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격랑에 휩쓸렸다. 입술을 벌리며 태헌이 들어찼고 연서는 열심히 그것을 핥고 깨물고 삼키려 노력했다.

그가 목 근처를 슬슬 어루만지며 난잡하게 입술을 섞었다. 질식감이 들 무렵 태헌이 젖은 혀를 빼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내 거 무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건데.”

“……흣, 그걸 말이라고.”

“…다른 게 하고 싶어.”

“몰라. 집에 가요.”

태헌이 혀끝으로 연서의 입가를 핥은 뒤 피식 웃었다. 그러곤 운전석 창을 조금 열었다. 안개처럼 들이찼던 밀폐된 공기가 조금 맑아졌을 무렵 차가 출발했다.

태헌이 연서의 손을 버릇처럼 찾아 깍지를 꼈다가 풀곤, 그의 배꼽 아래로 올려주었다. 확연해진 존재감에 연서가 놀라 손을 떼자 태헌이 전방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플 정도야. 잠깐 지퍼만 내려줘.”

“…여기서?”

“무슨 생각일까. 그냥 벗기기만 해달라는 건데.”

“거짓말하지 말아요. 전에도 이러다가 만져달라고…… 변태.”

연서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붉어진 뺨을 모로 돌리자, 태헌이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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