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식사 후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다. 데이트를 하기엔 시간이 늦어 외곽을 돌며 소화를 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서는 바깥 풍경보다 운전대를 잡은 태헌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연서와 깍지 낀 태헌의 오른손과 핸들을 잡은 왼손. 길고 곧은 손가락엔 연서와 같은 모양의 결혼반지가 자리했다. 그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단 사실을 인지할 때면 가슴 떨렸다.
언뜻 보이는 손목시계와 커프스, 그리고 단단한 가슴팍까지 차츰 시선이 따라붙었다. 태헌의 너른 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해 입만 아팠다.
세상의 모진 부분을 막아주고 외로움을 멀리 쫓아주는 품이었다. 그리고 연서를 향해 뜨겁게 뛰기도 했다. 얼른 저기 안기고 싶은데.
예민한 태헌이 집요해진 연서의 시선을 모를 리 없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고 싶었어요.”
“적당히 귀여운 짓 해. 이제 한계야.”
태헌이 피식거리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랜만에 태헌을 봤는데 옆 모습만 보고 있으려니 조급증이 일었다.
얼른 그와 눈을 제대로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문득 도로를 달리는 이 행위가 부질없게 여겨졌다.
태헌과 함께라면 뭐든 즐겁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둘만 있는 곳에서 감정을 교류하고 싶었다.
곧 아이가 태어날 거고 그럼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몰두해야 할 터다. 연서는 제 목숨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아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태헌과 단둘이 보낼 시간이 줄어들 건 서운했다.
어떻게 해. 욕심쟁이가 되었나 봐.
한숨을 폭 내쉰 연서가 몸을 뒤척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5성 호텔이 마침 딱 눈에 띌 게 뭐람.
“곧장 집으로 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시내 쪽은 막히니까 40, 50분쯤.”
“오래 걸리네…….”
연서가 중얼거리며 차창에 턱을 괬다.
“자리 불편하면 의자 젖히고 누워. 소화 안 돼?”
“많이 먹어서 그런가 배가 좀 눌리는 것 같아요.”
대번에 태헌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태헌이 연서의 안색을 재빠르게 훑었다.
“힘들면….”
“응.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잠깐 차 세울 데 있나 볼 테니까 일단 누워.”
연서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태헌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그리고 수초 뒤, 태헌이 한 박자 늦게 연서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한연서.”
“응. 나 차 말고 다른 데서 쉬고 싶어요.”
태헌이 다정히 잡았던 손깍지를 풀고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물결치듯 내려가는 넥타이에 묘한 쾌감이 일었다.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모르지.”
“조금은 알아요.”
“글쎄.”
차가 부드럽게 유턴했다.
*
호텔 프런트부터 엘리베이터까지, 태헌과 손깍지를 낀 채였다. 태헌은 손을 이렇게 잡는 걸 좋아했다. 한 손만 사용하는 게 불편할 텐데도 밖에서 태헌은 웬만하면 손을 놓지 않았다.
어떨 땐 아무 곳에도 못 가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카드키를 꼽자마자 불이 붙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반해 입술을 파고드는 태헌의 혀는 거칠었다. 뜨겁고 말캉한 돌기가 연서를 물어뜯으며 흉포한 본성을 드러냈다.
이러다가 신발도 벗지 못하고 일을 치를 것 같아 연서가 그의 가슴을 두드려 거리를 벌렸다.
“자, 잠깐 씻고…….”
“하고 씻어. 더 못 참아.”
열흘간의 출장이 가져온 부작용은 컸다. 연서는 벽을 짚은 채, 현관에서 태헌을 받았다.
임신한 몸을 생각해 강하게 짓쳐 들진 않았으나 태헌의 열기를 제대로 품기는 여전히 버거웠다.
무너지는 허리를 커다란 손으로 세워 느긋하게 쳐올리다 원을 그렸다. 부푼 배를 받치며 유연하게 율동했다.
태헌을 부추긴 걸 후회하면서도 그를 품고 싶어서 허리를 빼고 더 원한다는 몸짓을 내보였다. 그의 낮은 숨소리가 둔탁하게 공기를 갈랐다.
“한연서, 너 이러다가 다쳐. 적당히, 사람을…….”
“괜찮으니까, 더……. 더 해주세요.”
태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흔들리는 시야와 처덕대는 소음, 발끝에 닿은 습기. 모든 게 엉망이었다. 제련되지 못한 날 것의 본능이 활개 쳤다.
연서는 끊임없이 태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가 미치겠다는 듯 앓았고 연서는 그런 태헌의 반응에 끝도 없이 느꼈다.
연서를 안아 든 그가 침대로 향했다. 마찰로 인해 뜨거워진 곳에 얼굴을 묻고 집요하게 굴었다.
“그만, 아…… 태헌 씨.”
그는 만족을 몰랐다. 항상 갈증 난다는 눈으로 연서를 바라보았다. 간혹 흡족하다는 듯 배부른 포식자처럼 느른한 태도를 취할 때가 있다.
“손 치우고 더 벌려. 가리지 말아야지.”
“흣…….”
그럴 땐 연서는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홀렸다. 태헌이 입술을 핥으며 몸이 무거운 연서의 몸을 손쉽게 바꿔가며 탐했다.
느긋하면 느긋한 대로, 가쁘면 가쁜 대로 희열이었다. 내리막을 내달리는 것처럼 막연한 질주가 이어졌다.
깊게 낀 깍지와 맞닿은 체온 하나로 이어진 감각, 그만 보이는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사랑해.”
“그만, 내가…… 잘못, 흣!”
“사랑하는데, 어떻게 참겠어.”
연서가 도리질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리로 태헌의 붉은 입술이 깊게 묻혔다.
더는 못 하겠다고 끙끙댔으나 태헌은 살살 연서를 달랬다.
착하지. 괜찮아. 금방 끝나.
말씨는 다정했으나 행위는 능란하고 전위적이었다.
“미안해. 더 울리고도 싶어서.”
너뿐이라고, 매일 매일 온몸으로 고백하는 남자가 있어 연서는 불행을 몰랐다.
*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남겼다. 그동안 몰아친 많은 일이 꼭 거짓말처럼, 연서는 멍한 기분이었다.
한 달 전에 이사를 마쳤다. 아이와 함께 지낼 새집에 대대적인 공사를 하느라 이사가 늦어졌다. 꼼꼼한 태헌의 눈에 차지 않는 모든 것이 뜯기고 부서져 재조립되었다.
넓은 집에 가구와 가전을 채워 넣는 것도 일이었다. 태헌은 전문가에게 맡겨도 좋다고 했으나 연서는 셋이 함께할 보금자리를 손수 가꾸고 싶었다.
태헌도 기꺼이 집에 관한 모든 걸 연서에게 선택권을 준 탓에 그녀는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즐겁게 살림을 마련했다.
출산 준비와 더불어 결혼 준비도 해야 했다. 결혼식을 출산 예정일 100일 후로 잡았는데도 손이 가는 일이 많았다.
소규모 결혼식이니 장소를 정하고 옷과 식사만 준비하면 될 줄 알았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웨딩 플래너는 매일 같이 연서의 핸드폰으로 연락해왔다. 전문가의 식견으로 후보를 간추리면 최종 판단은 연서가 해야 했다.
웨딩드레스도 난관이었다.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웨딩드레스를 시착하며, 출산 후 변화될 체형을 고려해 결정했다.
결국 웨딩드레스는 총 다섯 벌이 선택되어 제작에 들어갔다. 물론 연서는 한 벌이면 됐으나 태헌의 욕심은 그게 아닌 듯했다. 하객 수만 줄었지, 결혼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조금도 소소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열릴 세원 그룹 소유의 리조트엔 태헌 혼자서 여러 번 방문했다. 연서도 따라간 적이 있는데, 태헌이 입을 열 때마다 어깨가 점점 내려가고 고개가 땅으로 꺼지는 관련 직원을 보고 있자니 곤혹스러웠다.
그만하라고 팔을 당기니 힐난을 멈춰주긴 했으나, 태헌은 모든 게 완벽해야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연서도 웬만하면 태헌의 뜻에 맞춰 주고 싶었다. 그가 제게 그랬듯이, 태헌이 바라는 바가 있다면 힘닿는 선에서 돕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식 준비는 대장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굵직한 준비를 마치고 한숨 돌릴 틈이 나자, 현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출산 전에 한번 만나자는 기별이었다. 지영의 얼굴도 볼 겸 세 사람이 함께 자리했다.
“진짜 이걸로 되겠어?”
현호가 혀를 차며 삼겹살을 뒤집었다. 노릇노릇한 면이 위로 올라가며 지이익,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냈다.
“응. 삼겹살 너무 먹고 싶었어.”
“네 남편이 안 사 주냐?”
“우리 태헌 씨?”
“우리래. 참나.”
지영이 투덜댔다. 지영은 아직 태헌을 보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시간이 계속 맞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태헌과의 러브스토리를 언뜻 듣기만 해서인지. 지영은 태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깃밥 먹을래?”
연서가 말을 돌리며 웃었다.
“당연하지. 이모 여기 밥 세 개요!”
은색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 왁자지껄한 소음. 사실은 이런 쪽이 연서에겐 더 익숙했다.
그러나 태헌에겐 이런 곳에 오고 싶다고 내색하지 못했다. 깔끔한 그의 성격상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물론 연서가 원한다면 와줄 테지만 그를 배려하지 않고 욕심만 채우기는 미안했다.
현호가 가위로 잘라낸 삼겹살을 열 맞춰 늘어놓았다. 지영이 얼른 묵은지를 올렸다.
공깃밥을 배당받은 연서는 두 손을 모으고 고기가 익길 기다렸다.
“결혼 준비하랴. 출산 준비하랴. 힘들지?”
“응, 정신없긴 해.”
“내가 도울 건 없니?”
지영이 은근히 서운한 투로 물었다. 연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제 거의 다 준비했어.”
“근데 남편이 잘해주는 거 맞아? 어째 날이 갈수록 더 홀쭉해져?”
연서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렇게 연비 안 좋은 몸이라니 그녀도 곤란하긴 했다.
태헌의 본가에서 보내오는 건강 음식은 고사하더라도 태헌이 먹이는 귀한 음식을 생각하면 연서는 지금쯤 20킬로그램 정도 불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먹는 것에 비해 연서의 살집은 도통 늘지 않았다. 의사가 아이가 작은 편이니 많이 먹으라고 하는데도 노력에 비해 성과가 시원찮았다.
“남편분 인간미 실종한 분이잖아. 너한테도 무뚝뚝하게 할까 걱정이야.”
“그 사람 다정해. 태헌 씨 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거야.”
“안 봐도 척하면 척이지. 사람 잘 안 변한다?”
“지땡, 오지랖 그만 부리고 먹어라. 결혼까지 한 마당에 둘이 알아서 하겠지.”
현호가 먹으라며 익은 고기를 연서의 앞접시에 놔주었다.
현호의 타박에도 의심 어린 지영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런다고 태헌의 다정함을 구구절절 설명하긴 낯간지러웠다.
그가 지닌 의외의 면을 자기만 알고 싶기도 하고, 지영이 이러는 게 걱정인 걸 알기에 해명하기 쉽지 않았다.
일단 고기를 입에 넣었다. 고소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지자 연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이 맛을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