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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75화 (75/85)

75화

막 계산을 마친 시은이 카드를 손가락에 끼운 채 화색을 띠었다.

“언니? 새언니 맞죠?”

그렇게 반가워할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쪼옥. 연서가 빨대로 남은 주스를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언니! 저 아시죠?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아. 태헌 오빠 만나러 왔구나?”

“잘 지냈어요?”

강 여사의 장례식 때 보고 만나는 거니, 꽤 오랜만이었다. 장례식 때 가장 많이 운 사람이 시은이었다. 속정이 깊은지 시은은 발인이 끝나는 날에도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연서는 자연스레 강 여사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건강하게 잊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방법이 없는 건지도 모르지.

“뭐야! 언니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응? 내가 어떻게 웃었는데요?”

“슬피 웃는달까요? 설마 태헌 오빠가 구박해요?”

시은은 앉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연서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가방을 옆으로 던지는 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값이 상당해 보이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신기해 그리로 시선을 보내자 시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원래 물건 막 써요.”

“네에.”

“그건 그렇고 진짜 안색이 별로야. 임신해서 그런가?”

시은이 제 앞으로 손을 둥글게 말아 볼록한 연서의 배를 표현했다. 그러다 진짜 연서 배를 보고 눈을 화등잔만 하게 키웠다.

“우와, 진짜다.”

어쩐지 부끄러워 연서가 다시금 웃었다.

“뭐랄까. 힘들어 보이지만 아름다워요.”

참 미워할 수 없는 상대였다. 시은은 전처럼 귀엽고 재미있다.

“난 처음에 새언니가 승빈 오빠 만나는 줄 알았잖아요. 아차차. 그 이름 말하면 안 되는데.”

승빈의 이름 또한 오랜만이었다. 시은이 말실수했단 표정으로 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주변을 쓱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태헌 오빠가 다시는 그 이름 꺼내지도 말라고 살벌하게 말하더라고요. 어후….”

“태헌 씨가요?”

“네. 전에 할머니 장례식에서요.”

승빈의 기억은 불유쾌한 것뿐이었다.

“나는 그때 언니랑 태헌 오빠랑 그런 사이인 줄 몰랐거든요. 그래서 승빈 오빠는 어디 두고 언니 혼자 그러고 있냐고. 잠깐 정신 차렸을 때 물었다가 혼났다니까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땐 태헌과 이별했을 때였다. 그러니 태헌이 시은과 무슨 얘길 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 가족이랑, 친척도 함께 있었거든요. 태헌 오빠가 사람 그렇게 챙기는 거 처음 봐서 다들 놀라고……. 승빈 오빠랑 헤어지고 태헌 오빠랑 만나는 거냐고 숙덕거리고.”

연서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시은을 보며 주스를 쪼옵쪼옵 마셨다.

“그 뒤로도 태헌 오빠가 언니 살뜰하게 챙기니까 다들 눈치깐 거죠. 새언니 임자가 우승빈이 아니고 우태헌이구나.”

따지고 보면 승빈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거고 연서는 피해자였다. 진실을 모르는 태헌의 가족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긴 했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뭐 놀랍긴 하지만 저는 그래도 지금이 보기 좋아요. 솔직히 태헌 오빠가 훨씬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언니가 현명한 거죠. 승빈 오빠는 어른들한테 밉보였는지 한국 땅도 못 밟는데, 태헌 오빠는 승승장구니까. 이것도 많고.”

시은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눈을 찡긋했다. 연서가 잔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시은 씨는 여기 어쩐 일이에요?”

“세상에, 언니. 시은 씨라고 하지 마요. 우리 사이에! 이제 시은아, 하고 불러요. 알았죠?”

“푸흡.”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은 덕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언니 저는 진짜 심각하단 말이에요. 태헌 오빠 부인이시잖아요. 후, 그 오빠한테 밉보이면 저도 승빈 오빠 꼴 날걸요? 오빠가 새언니 애지중지한다고 소문이 파다한 마당….”

“뭐가 파다해.”

돌연 낮은 음성이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음성의 주인은 태헌이었다.

태헌의 몇 걸음 뒤엔 신 비서도 함께였다.

“어? 오빠.”

시은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크게 어깨를 들썩이더니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가방을 챙겼다. 그러곤 허리를 연서에게 작게 속삭였다.

“다음에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조카 얘기도 해주세요.”

“연서가 왜 너랑 식사를 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던 길 가.”

“예예. 안 그래도 가려고 했거든요?”

시은이 투덜거리며 연서에게 한 번 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연서도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잘 가요.”

“아, 근데 언니.”

가려던 시은이 돌아와 테이블을 짚었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배 만져 봐도 돼요? 꺄악!”

연서의 배로 향하던 시은의 손목이 태헌에게 붙들려 바깥으로 꺾였다. 놀란 건 연서도 마찬가지였다.

무턱대고 배를 만져 보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물어보고 만지려는 시은이 양반일 만큼이나. 그럴 때마다 혼자였던 터라, 태헌의 이런 날 선 반응은 연서도 처음이었다.

“태헌 씨.”

연서가 조용히 부르자 태헌이 손목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그리 세게 잡진 않은 듯했다.

“아들. 더 물을 거 있으면 신 비서 통해서 연락해.”

“뭐?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임시은, 예의 차려.”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만 꺼지란 소리였다.

시은이 태헌의 눈빛에 눌려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카운터로 총총 뛰어갔다. 주문한 음료가 나온 모양이었다. 시은이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헌이 연서의 귓바퀴에 손끝을 가져갔다가 뗐다.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네가 와 있단 소리를 들었어.”

“날 어떻게 알고…?”

“여기 보는 눈이 몇 개인데. 한연서가 내 와이프인 거 웬만한 임원은 다 알지.”

태헌과 함께 중요 행사에 몇 번 참여 했더니, 얼굴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그럼 케이크 많이 먹는다고 소문나면 어떻게 해요?”

태헌이 피식 웃으며 손을 가져와 연서의 입가를 문질렀다. 그녀의 얼굴만 보면 임신한 태가 하나 안 났다. 그래서 늘 걱정이었다.

연서가 회사까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온다 한들, 주차장이나 로비 바깥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렇게 카페에 들러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에 태헌은 걱정이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시은 씨는 여기 무슨 일로 온 걸까요?”

연서가 카페 밖으로 빠져나가는 시은을 보며 물었다.

“임시은 언니, 임지은이 마케팅부 팀장이야. 이번 일은 유감이지만, 일일이 받아주지 마.”

“귀엽잖아요.”

“적당히 너그러워도 돼. 신 비서, 남은 일정은.”

“보실 서류 메일로 송부하겠습니다. 오늘 자정 전까지만 확인해 주십시오.”

“그래요, 그럼.”

“저는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사모님도 살펴 가십시오.”

“네. 안녕히 가세요.”

두 사람에게 인사한 신 비서가 연서의 트레이를 들고 먼저 자리를 떴다.

연서가 치운다고 우겨봐야 먹히지 않은 일이란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연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 비서가 제가 마신 컵을 정리하는 모습을 찜찜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 이쪽으로 닿는 직원들의 시선을 느꼈다. 흘긋흘긋, 태헌을 보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태가 났다.

사적인 시간이라면 방해하기 어려우니 함부로 나서서 인사하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태헌 씨 오니까 사람들이 여기를 보는 것 같아요.”

“앞으론 바로 사무실로 올라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이런 시선에 담대하기 어려웠다. 뉴스나 넷 지면에 이름 석 자가 종종 올라오는 남편의 존재에 녹아드는 건 쉽지 않았다.

태헌은 프러포즈한 며칠 뒤, 결혼 사실을 공표했다. 결혼식은 가족끼리 이미 치른 것으로 알렸다. 그래야 귀찮은 잡음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를 낳은 뒤에 소규모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이 일에 태헌은 몰라도 그의 부모님이 선뜻 응해준 게 의외였다.

결혼식은 둘만의 행사가 아니었기에 반대에 부딪히리라 생각했는데, 태헌의 부모님은 의외로 너그러웠다.

연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헌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겉옷 입고 다니라고 했을 텐데.”

“깜빡했어요. 정신이 없어서….”

“바쁜 일이라도 있었어?”

“태헌 씨 열흘 만에 제대로 보는 거잖아요.”

태헌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연서가 그의 옆에서 재잘댔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어. 서두르다 보니까 잊은 거 있죠.”

“귀여운 소리를, 이런 데서 다하고.”

태헌이 낮은 음성으로 목울대를 울리며 카페 문을 열었다. 태헌은 지난 열흘간 미국에 있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으나 집에 들러 얼굴만 비치고 다시 회사로 나와야 했다.

그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연서가 먼저 회사까지 달려온 거다.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전에 잘 먹던 거기로 예약했는데.”

“음, 차엘리노?”

차엘리노는 태헌의 친구가 오너 셰프로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연서의 말에 차 문을 열다 말고 태헌이 멈칫했다.

“왜요?”

“거기 가고 싶었어?”

“잘 먹던 데라고 해서… 거기 아니에요?”

“닭백숙 예약했는데.”

사실 잘 먹은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단호하게 하나만 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최근 기억을 떠올린 건데 잘못 짚었다. 태헌이 예약을 다시 하려는 것처럼 이너 포켓에 손을 넣었다.

“아니에요. 닭백숙 먹을래. 맛있겠다.”

강도 보이고 운치 좋은 곳에서 닭백숙에 칼국수를 먹고 입가심으로 누룽지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벌써 입맛이 당긴 연서가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전화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닭백숙 사 주세요.”

태헌이 헛웃음을 살피다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어쩌려고 이럴까.”

“예쁨 받으려고 이러는 거예요.”

태헌이 가만히 연서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일단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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