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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74화 (74/85)

74화

수증기가 자욱하게 욕실에 들어찼다. 두 사람은 공사 중인 1층을 피해 2층 욕실을 사용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서 연서는 언 몸을 녹였다.

태헌이 욕조 밖에서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거품을 내고 헹궜다. 투박하고 서투른 손길에 그녀는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그가 연서의 목 뒤와 어깨까지 아프지 않게 주물렀다. 임신 중기가 넘어가며 쥐가 나거나 몸이 뭉칠 때가 많았다. 매일 태헌이 마사지를 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으응…….”

그의 손끝이 등허리 어딘가를 누르자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시원함과 더불어 이상야릇한 감각이 찾아든 터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가 부끄러워 연서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시간을 두고 태헌을 바라봤다.

그는 연서의 샴푸를 전부 마치고 목욕물 온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윗옷만 벗은 태헌은 아직 슈트 하의를 입은 채였다. 그녀를 씻기는 데 열중한 나머지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 보였다.

“어디 불편해?”

“그런 건 아닌데…… 태헌 씨도 바지 다 젖었어요.”

“누가 버둥대는 바람에 물이 튀어서.”

“그거야……. 갑자기 옷을 벗기니까 그러지.”

“몸이 얼음장이라 급했어. 추웠으면 말했어야지.”

태헌이 한숨 쉬었다. 사실 춥다고 말했다면 그는 연서를 안은 채 먼 거리를 뛰어왔을 터였다.

“다시는 혼자 산에 들어가지 마. 아이 낳을 때까지만이라도 참아. 이건 양보 못 하니까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래도 설득하고 싶으면?”

“넘어가겠지. 그러니까 하지 마.”

“사실 나도 조금 무서웠어요. 다신 안 그럴 거야. 조심할게요.”

“착하네.”

건조한 대꾸였으나 태헌이 안도했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연서의 행동에 진지하게 근심했다가 다시금 피식 웃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 설�다. 연서에게 져주다가도 능수능란하게 그녀를 다뤘다.

그렇게 연서의 심장을 쥐락펴락했다. 그래서 속수무책인 건 연서였다. 태헌이 앓는 사랑을 하는 듯이 굴면 그의 말을 전부 들어주고 싶어졌다.

어쩌면 태헌은 꼬리가 여럿 달린 여우일지도 몰랐다. 결국엔 그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으니.

태헌의 손끝이 연서의 이마를 쓰다듬고 턱선을 탄다. 물이 지나간 길을 덧그리는 손길이 자극적이었다.

“간지러워.”

“아직, 대답 안 했어.”

연서가 젖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대답?”

“결혼하자는 말에 대답 안 했지.”

프러포즈는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그와 결혼할 거란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인데도 직접 들으니 감회가 달랐다.

함께하기로 했고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사랑을 공유했으니 그 마지막은 결혼이 될 터였다.

전처럼 그에게 사생아가 필요한 건가, 두 집 살림하려는 건가. 하는 불필요한 생각은 태헌을 만난 뒤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좋았다. 태헌의 진심이 전해져서, 그가 가져온 혼인신고서에 여유가 없어진 태헌의 내면이 담긴 것 같아서 벅차올랐다.

“일단 태헌 씨도 이리 들어와요. 나보다 눈 많이 맞았잖아요.”

연서가 욕조를 짚은 팔뚝을 살짝 당겼다. 시선을 맞추자 저 너머에 자리한 태헌의 심연이 더 지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선 그가 연서를 내려다본 채로 파스너를 내렸다.

근육질의 늘씬한 허벅지엔 잔근육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묵직한 형체를 수납한 속옷으로 눈길이 가서 슬그머니 피했다.

태헌의 나체는 아직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수 없이 맞춘 몸인데도 뻔뻔하게 보려면 얼굴이 달아올라서…….

“내외나 하고.”

연서의 옆구리에 손을 넣은 그가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맑은 살갗에서 흐른 물방울이 수면 위로 튀었다.

따뜻한 물이 출렁거리고 태헌이 그녀의 뒤로 앉았다. 그의 허벅지 사이에 앉은 연서는 제 다리를 태헌의 다리 위에 겹쳐 올렸다.

그러곤 물의 저항을 이용해 발끝을 동동 흔들었다.

“3분만 있다 나갈 거야.”

“응.”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건 임산부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연서는 몰랐던 걸 태헌이 알고 있었다. 태헌은 임신과 출산에 해박했다.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임신과 출산, 육아 서적만 열 권이 족히 넘었다. 군데군데 책갈피도 있어 허투루 읽은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잘 아는 거고.

태헌이 연서의 목에 콧날을 묻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결혼식은 아이 낳고 해야겠지.”

“…….”

“준비하다 탈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연서는 공연히 물장구를 쳤다. 찰랑찰랑 수면이 흔들렸다.

“혼인신고서는 서울 올라가는 대로 제출할 거야.”

“그렇게 빨리요?”

연서가 고개를 돌려 태헌을 바라보았다. 태헌의 쭉 빠진 턱선이 가까이 있어 뺨을 붉혔다.

“곧 아이 태어날 텐데, 온전한 부부로 만나야지 않겠어.”

“부부… 라니 기분이 이상해요.”

엄마 아빠도 도통 제 것 같지 않은 이름이었는데 부부라니, 산 넘어 산을 만난 기분이었다.

“입에 안 붙어, 나도.”

연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잘생겼다고 생각한 턱 끝을 손으로 매만졌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그럼 왜 대답을 아끼는 거야. 결혼하자는 말이 새삼스러워?”

태헌이 물었다. 연서는 살짝 눈을 내리감았다. 욕실 등이 그녀의 뺨을 희뿌옇게 감쌌다. 모든 것이 아득한 기분이었다.

“결혼하면, 나도 세원가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게 걱정이야?”

“나는 세원가 사람이 되는 게 꺼려져요. 아이가 태헌 씨처럼 주목받는 인생을 사는 게 반갑지 않아요.”

“환경이 부담스럽다?”

“응. 반짝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으면 해요. 선택권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랑 아이를 강제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거 알잖아.”

그래, 알고 있다. 태헌은 이제 연서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는다. 자만일지 모르지만, 연서가 세원을 포기하라고 하면 태헌은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날 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태헌이 세원에 몸담은 이상 연서도 그 한 자리에 퍼즐처럼 끼워지는 게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연서는 평생을 평범하게 살았다. 강 여사가 안긴 유산만으로 충분히 분에 넘쳤다.

우태헌이란 과분한 사랑을 얻었는데 그 밖의 다른 게 더 필요할까.

태헌을 사랑하기에도, 아이를 키우기에도 벅찼다. 세원의 구성원으로서 몫을 짊어지고 기대에 부응하는 게 피곤하게 느껴졌다.

태생부터 다른 그들과 어울리는 건 보통이 아닐 터다. 세원가에서 연서를 반겨줄 리도 없었으니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반짝이에겐 선택할 기회를 줘야겠지.

“네가 원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알아. 태헌 씨가 나랑 아이 지켜줄 거잖아요.”

“그럼 믿어봐. 내가 이보다 미안해지지 않게 걱정 좀 덜어주고.”

태헌을 탓하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연서는 그의 팔을 지그시 붙들었다.

“그리고 결혼식은 간소하게 해요.”

태헌은 예상대로 못마땅한 눈치였다.

“주목받는 거 별로 좋지 않아요. 그리고 초대할 하객도 없고….”

“벌써 그런 것까지 생각했어?”

“당연하죠.”

가진 게 없어서, 그에 비교될까 봐. 아직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속내를 들킬까 봐.

그가 그러하듯 그녀도 태헌에게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서는 여전히 못난 자신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요. 태헌 씨한테 결혼식 중요할 텐데.”

“한연서.”

“응?”

연서가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너만 오면 돼. 네가, 있어야 되는 자리야.”

“…….”

“너면 돼.”

연서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맙고 좋았다. 그리고 태헌에게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에게 좀 더 필요한 사람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자 태헌이 입을 맞추었다. 좀 더 몸을 붙이자 그가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골반을 지분댔다.

맞닿은 체온이 예민한 살갗을 자극해 달뜬 숨이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호르몬의 변화로 팽팽하게 부푼 언덕을 쥐며 그가 만족스럽게 목울대를 울렸다.

연서가 참지 못하고 간지러운 부분을 문지르며 옅게 신음했다.

“태헌, 씨…….”

“여기선 안 되는 거 알면서 애교 부리지 마.”

“태헌 씨가 먼저, 으응…….”

“내가 먼저야? 예쁜 네가 원인이지.”

태헌이 허리 아래를 가득 주무르며 흥분한 신체를 과시했다. 물이 찰랑이며 욕조 밖으로 흘렀다.

“방으로, 방으로 가요.”

“1층에 이모님이 있는데.”

“안 돼, 응….”

“버릇이 나쁘게 들었어.”

“태헌 씨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연서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웅얼거렸다. 그가 조금만 어루만져도 반응하게 된 건 필시 태헌의 탓이었다. 매일 물고 빨고 하는데 민감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좁은 틈을 문지르며 태헌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전부 받아줄 테니까 옆에만 있어. 그거면 돼. 네가 아니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든든한 안식처를 얻은 것처럼 등불 같은 불안함이 잠잠해졌다.

그와 가족이 되고 싶었다. 평생 서로를 지킬 그런 가족.

*

봄볕이 제법 따스해서 겉옷을 챙기지 않았더니, 저녁쯤 되자 바람이 꽤 쌀쌀했다.

동그랗게 부푼 배가 유독 무거웠다. 청색의 긴 원피스를 입은 연서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 있다가 카페에 들어섰다.

세원 자동차 1층 한편에 자리한 사내 카페테리아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제법 북적였다.

치즈 케이크와 와플, 머핀과 주스를 주문했다.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허해 눈에 보이는 대로 시키고 말았다.

태헌의 퇴근까진 1시간이 남았으니 천천히 요기하며 시간 보내면 되겠지.

구석 자리에 앉아 음식을 반쯤 비웠을 때, 카운터에서 긴 머리칼을 넘기던 여자가 연서를 알아보고 눈을 키웠다.

“어?”

태헌의 사촌 동생, 시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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