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연서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자, 잠깐 팔이…….”
입술이 다시금 부딪혀왔다. 일어난 그가 연서를 받치고 침실로 향했다.
온종일 아프다고 하더니 정말 거짓말이었나 보다. 그녀를 받친 팔은 견고했다.
푹신한 시트가 등에 닿는 순간 가운 끈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태헌은 예나 지금이나 손이 빨랐다.
잠깐 사이 뜨겁게 빨린 입술이 반들반들했다. 연서가 상체를 조금 띄웠다.
“오늘은 내가 해볼래요.”
“무슨 뜻이야, 그건.”
연서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쳤다. 태헌이 깍지를 껴 여린 속살을 빈틈없이 결착했다.
그러며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그 여파로 띄웠던 등이 다시 시트에 파묻혔다.
“태헌 씨, 다쳤잖아요.”
목덜미가 간지러워 몸을 뒤틀며 웅얼거렸다.
“그래서.”
“무리하면 안 되니까, 내가…….”
“더 참는 게 무리야.”
태헌이 커다란 손으로 연서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의 시선도 함께 그리로 닿았다.
아랫배가 조금 부풀어 있었다. 아이의 존재는 이렇듯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두 사람의 관계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안정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간이 빨리 지나버렸으면 했다.
“이 녀석이랑 너 다칠까 봐,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참은 이유가……. 아이 다칠까 봐 그런 거예요?”
“그럼 왜겠어. 밤마다 혼자 빼면서까지, 참을 이유가 있어?”
태헌이 시큰하게 웃었다. 다쳐서 못 한 게 아니라, 임신에 무리가 될까 참았다고?
“하지만 팔이…….”
“다친 건 팔이지. 이건 멀쩡해.”
연서가 오해를 깨닫자마자, 태헌이 뜨겁게 달려들었다. 폭발한 애정이 순식간에 그녀를 잠식했다.
그의 입술과 손길이 부드럽게 혹은 거칠게.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연서를 탐했다. 그런 태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숨기지 않고 열어 주었다.
그가 빗줄기처럼 달려오자 연서는 지면이 된 것 같았다. 따끔할 때도 있고 아릿한 통증이 일기도 했으나 몸을 재조립하는 것 같은 쾌락에 전부 내맡겼다.
할 수만 있다면 태헌을 모조리 흡수하고 싶었다. 달뜬 목소리가 습한 공기에 스몄다.
열린 테라스 문 너머로 빗소리가 가열 차게 행진했다. 태헌도 그와 비슷하게 달려왔다.
태헌이 잠시 흐느끼는 연서를 쉬게 하려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연서가 흐린 시야를 거두려 눈을 깜박였다. 여름에도 땀을 흘리지 않던 태헌의 가슴과 턱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예전에 비해 행위가 과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태헌은 오히려 전보다 더 힘든 것처럼 흉곽을 거칠게 부풀었다 꺼뜨리길 반복했다.
“네가 그렇게 보면, 미칠 것 같아.”
“…읏, 그게 막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웠어? 가르친 적이 없는데.”
“으응, 몰라.”
“더 달라는 듯이 졸라놓고 발 빼면 못쓰는데.”
태헌이 나쁘게 웃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행위를 재개했다.
그의 허리가 물결처럼 굽이쳤다. 활짝 열린 곳으로 너울대던 열감은 연서의 머리끝까지 달궈놓았다.
찰랑이던 고양감이 극렬하게 폭발했다. 태헌이 다시금 깍지를 끼며 연서의 뺨과 눈, 코,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푹 젖은 몸이 시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태헌이 그러잡았다.
쾌감이 가시질 않아 연서가 잘게 몸을 떨었다.
“그만…….”
“아직 멀었어.”
연서의 뒤로 누운 태헌이 작은 몸을 끌어당기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품에 갇힌 작은 체구가 애달프게 흔들렸다.
그에게 함몰되는 과정은 희열에 가까웠다. 턱이 달달 떨릴 만큼 환희에 쓸려가던 연서가 버둥대며 울었다.
빗소리와 닮은 물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찰박였다. 태헌이 몸을 더욱 맞붙이며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연서야. 아직이야.”
그의 사랑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알려주는 목소리였다.
*
눈이 그쳤다 했더니 또 눈이다. 1월 신년부터 많은 눈이 내렸다. 펑펑 내리는 눈은 연서를 두고 출근하는 태헌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하루에 한 번 산책해야 한다며 꽁꽁 무장한 채 산책을 나서는 연서를 말릴 수도, 감시할 수도 없어 태헌은 애만 탔다.
그렇게 평일을 보내고 어느덧 주말이 되었다. 태헌은 갑자기 일이 생겨 출근했고 연서는 먼저 용인으로 내려갔다.
용인 집은 공사에 들어갔다. 개보수 후 별장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용인과 회사까진 거리가 있고,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라서 별장으로 사용하길 확정한 것이다.
두 사람의 집도 곧 이사를 앞두었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마당이 있는 고급빌라로 갈 예정이었다.
태헌은 제법 굵어진 눈송이를 피하려 우산을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검은 우산을 쥔 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어머나, 이사님 오셨어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전에 용인 집 살림을 맡았던 영례가 현관 앞에서 태헌을 맞이했다. 어쩐지 그녀의 낯이 초조해 보였다.
“연서 아니, 사모님이 오늘 공사 상황 같이 보자고 하셔서 왔어요.”
공사가 끝나면 영례가 전처럼 살림을 돕기로 했다. 영례의 의견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터니, 조만간 그녀를 부르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연서는 어디 있습니까.”
“그게……. 아까 산책한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 왔어요. 나가서 찾아보려는데 이사님이 오신 거예요.”
태헌이 전화기를 들었다. 출발하기 전에 전화했을 때만 해도 산책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런 날씨에 산책이라니. 반대할 게 뻔하니 숨겼겠지.
태헌이 지겨운 통화음을 들으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눈송이가 굵어져 어디에 있든 밖이라면 위험했다.
“사모님 전화 안 받아요. 어휴. 저도 몇 번을 했는지 몰라요.”
“산으로 갔습니까?”
“아마 그럴 건데……. 어머, 이사님. 이사님! 우산은 들고 가셔야죠!”
태헌이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아무리 산책로라지만 눈이 쌓인 산은 위험했다.
거의 평지로 이뤄진 길이긴 하나, 임신한 연서는 뭐든 조심해야 했다. 쉽게 미끄러지고 넘어질 수 있었다. 달리기 시작하자 태헌의 속도로는 산책로까지 순식간이었다.
눈 쌓인 나무가 오늘따라 음산했다. 약한 것을 잡아먹은 듯한 위화감이 느껴져 욕설이 샜다.
태헌의 바짓단이 푹푹 눈에 잠겼으나 쉬지 않고 눈으로 연서를 찾았다. 어느 순간 정자에 앉아 있는 연서가 보였다.
“한연서.”
그녀를 부르며 속도를 높였다. 웅크리고 있던 연서가 태헌을 봤다. 놀란 듯 눈을 키우다가 살짝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날. 너를 처음 봤던 날.
그래, 태헌은 연서를 처음 본 날을 잊지 않았다.
병원에서 봉투를 건네던 날.
강 여사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사례하던 날의 연서는 아직까지 선명했다.
은은한 파우더 향이 나던 한연서. 짧게 깎은 손톱과 매끈한 피부, 휘둥그레지던 눈, 맑은 목소리.
친절함이 몸에 밴 그런 평범하다면 평범한 너였는데.
기억 어딘가에 박제된 연서는 잊을 만하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재회했을 때, 그넷줄을 쥐고 있던 연서는 불편하게 간직했던 기억을 일깨웠다.
그래서 모질었다. 사랑을 몰라 그게 성욕이라 단정 지었고 타인과 나누는 게 싫어 연서를 상처를 입혔다.
연서의 모든 것이 좋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하아…….”
태헌이 거친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일어선 연서가 눈을 휘며 태헌을 맞이했다.
종아리까지 오는 패딩에 털 부츠, 얼굴을 감싼 넥워머까지.
단단히 무장한 꼴이 우습고 또 기가 막히는데, 이렇게 멀쩡한 걸 보니 안심되었다.
끊길 듯 말 듯 하던 신경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다.
“미안 놀랐죠.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려서…… 움직이는 것보다 여기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넌, 항상.”
연서는 항상 사랑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껏 사랑이었다.
그래, 돈이 돈 봉투를 내밀고서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말간 너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동요하는 마음의 출처를 몰라서 등신처럼 도망쳤다.
“나를, 미치게 해.”
연서가 팔을 벌렸다. 안아달란 요구마저 분에 넘치게 예뻤다.
그녀의 자존감을 짓밟아가며 사랑을 구걸한 못난 과오를 전부 씻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네가 먼저 팔을 뻗어온다면 그걸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해도 되나.
태헌이 성큼성큼 정자 위로 올라갔다. 태헌은 포옹 대신 이너 포켓에서 반지를 꺼냈다.
딱 예쁜 크기의 보석이 박힌, 은색 링.
연서가 받아줄 만한 적정선을 고려해 제작을 맡기느라 생각보다 오래 소요됐다.
“…태헌 씨.”
이사님에서 태헌 씨. 저에서 나.
그리고 종종 투정하는 반말.
가까워지는 거리감을 발견할 때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고 말한다면 너는 웃을까.
그러겠지. 눈부신 너니까.
“결혼하자.”
연서의 배는 이제 누가 봐도 임산부인 걸 알 수 있을 만큼 볼록했다. 오늘로 24주 3일. 벌써 임신 7개월에 들어섰다.
아이는 4월 말쯤에 태어날 예정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출산일을 생각하면 이미 많이 늦은 프러포즈였다.
“결혼해서 같이 있어. 아이도 키우고 영원히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함께 있고 싶은데, 난.”
태헌이 손을 내밀자, 연서가 고민 없이 왼손을 내밀어주었다.
“내가 늦었지.”
연서가 입술을 실룩였다. 그러더니 태헌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켰다.
“그건 뭐예요?”
“혼인신고서.”
“혼인신고서?”
“결혼식까지 못 기다려.”
그러니 이제 부부가 되자고, 태헌이 말했다. 하나 연서는 재깍 대답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