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어, 여기는…….
“주, 중요하다니….”
“아니야?”
“아니이, 맞긴 하지만 다른 데도 중요한데…….”
“반짝이 동생이 여기 있어.”
무슨 소린가 싶어 연서가 눈을 홉떴다. 화가 난 분신은 사실 아까부터 인지했다. 어쩌면 탈의할 때부터 이랬던 것 같았다.
“아픈 내가 할까.”
“알았어요.”
침을 꼴깍 삼킨 연서가 손을 뻗었다. 태헌이 깊은숨을 쉬는 듯하다가 일어섰다. 그러곤 직접 샤워기 아래로 다가갔다. 해달라더니 필요 없어진 것 같았다.
“씻고 나가자. 감기 들면 안 되지.”
“…네.”
연서는 반쯤 아쉬운 마음을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태헌을 닦이고 말리고 바르고 입히기까지, 굉장한 노동이었다.
연서는 반쯤 탈진해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잠이 들었다. 젖은 옷을 태헌이 갈아입히는지도 모르고 깊게.
*
연서는 한 시간 뒤에야 잠에서 깼다. 그만 용인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이만 가겠다고 입을 뗄 때마다 태헌이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떠나는 게 지체되었다.
결국 늦은 저녁까지 돌아가지 못해 내일을 기약했다.
저녁 식사 시간. 연서는 태헌의 개인 접시에 반찬을 놓아주고 물을 챙기는 등,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내일 아침 일찍 가야겠어요. 할 일이 많아요.”
“아픈 나를 두고 가겠다고.”
“응? 그런 게 아니잖아요.”
“밥도 못 먹고 씻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화장실도 못 갈 텐데.”
화장실은 잘만 갔으면서?
“그렇게 많이 아픈 거예요? 주치의를 부르고 그래도 심하면 병원으로 다시 가요.”
“천천히 나아질 거라고 했으니 완쾌할 때까진 이러겠지.”
“어떻게 해….”
걱정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린 연서의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를 본 태헌의 동공이 흔들렸다.
“…울어?”
“안 울려고 했는데…. 이사님이 이렇게 힘들어하니까 마음 아파요.”
“그렇다고 울기는 왜.”
종종 이런 식으로 눈물이 솟곤 했다. 호르몬 때문일 터다. 흐어엉. 연서가 눈물을 터뜨렸다.
태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잔이 쓰러진 줄도 모르고 연서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흐으으윽. 이사님이 왜 미안해요.”
“아픈 거 아니야.”
“흐윽…….”
“너 못 가게 하려고 거짓말한 거야.”
“흐윽, 응?”
“울리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미안해.”
연서가 훌쩍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태헌이 난감한 기색으로 연서의 뺨을 닦아 내고 있었다.
“…거짓말이라고?”
“그래. 아픈 거 아니니까 울지 마.”
“나 가지 말라고 거짓말한 거예요?”
“…그래.”
태헌이 멋쩍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연서는 한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훌쩍거렸다.
티슈로 눈물을 닦아주고 코를 닦으라고 새 티슈를 손에 쥐여주는 그를 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태헌은 정말 여우 같았다. 맹목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이 아이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연서의 뺨을 문지르는 손길은 온전한 성인 남자의 것이었다.
연서가 손을 뻗어 태헌의 양 뺨을 잡았다. 얼굴을 내려 태헌의 입술에 가볍게 부딪혔다가 뗐다.
“그럼 가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요.”
“가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안 갔잖아요.”
“내 말은…. 내일도 가지 마.”
“안 돼요. 내일은 꼭 청소해야 하는걸요.”
태헌의 눈썹이 실룩였다. 그가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와 사는 건 싫어?”
“응?”
당연한 소리를 왜…….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집으로 이사해도 돼.”
설마……. 용인으로 영영 가는 줄 알았던 걸까.
담백한 그의 표정에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에게 이토록 중요한 사람이 되었구나. 태헌이 계속 마음 졸이고 있었구나.
연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용인에 갔다가 돌아올 거예요.”
“…내일 안으로?”
본래는 며칠간 용인 집에서 자려고 했으나, 그렇게 했다간 태헌이 크게 상심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태헌의 뺨을 감쌌다.
“이제 우태헌 옆에 꼭 붙어서 절대 안 떨어질 건데. 반짝이도 함께 있을 건데.”
“그런 건 빨리 말해야지.”
태헌이 연서의 손목을 붙들었다.
“사람을, 진짜.”
그가 일어나며 바로 입술을 겹쳤다. 말랑하고 도톰한 입술을 흠빨았다.
조금은 급하게 입술을 벌리며 태헌이 흘러들었다. 불붙은 심지처럼 엉킨 혀가 점화되었다. 섞일수록 열기가 거세졌다. 성마른 심정을 드러내듯 키스의 흐름이 빨랐다.
“아, 태헌 씨…….”
“네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살아 있는 기분이야. 말했었나?”
“몰라. 흣…….”
턱을 젖히는 연서의 목덜미를 깨물며 그가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었다.
“청소는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되잖아.”
“흐읏. 아, 아파.”
“이제 겨우 같이 있을 수 있는데. 왜 자꾸 빠져나가려 그래.”
가지 마. 곁에 있어. 태헌이 그런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여운이 남는 맹렬한 키스 이후, 테이블을 짚은 태헌의 눈빛이 위험하게 일렁였다.
“하…….”
이대로 끝까지 하게 되는 걸까.
태헌이 컨디션만 좋다면 연서는 얼마든지 그와 몸을 섞을 의향이 있었다. 어서 우태헌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태헌은 붉어진 눈으로 연서를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부푼 입술을 손끝으로 쓸던 태헌이 자리를 박차고 돌아섰다. 다이닝룸을 나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고 그냥 가버린 거야?”
연서가 허탈함과 약간의 안도를 담아 한숨 쉬었다. 키스할 때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 겁났는데, 막상 태헌이 자리를 피해버리니 아쉬웠다.
용인 집에서 거주할 생각까진 없었다. 그저 정리하려던 건데 태헌답지 않은 어수룩한 착각이 귀엽고 짠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태헌이 물어뜯어 따끔한 목덜미를 더듬을 땐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이렇게 욕망하면서 몸이 아파 참아야 하는 그가 조금 짠했다.
*
그래. 욕실의 거울 앞에서 연서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헌이 힘들게 참는데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사실 연서도 참기 힘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태헌이 괴롭지 않게 도와주려는 거다. 태헌이 격한 운동을 못 하니 노력하려는 것뿐이고.
“휴….”
연서는 거울을 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금세 두 뺨이 복숭앗빛이 되었다.
“될까?”
급격히 자신감이 없어졌다가, 태헌이 나을 때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다 싶어 용기를 끌어모았다.
“될 거야.”
전에도 비슷하게 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땐 태헌의 도움이 있었으나, 응용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 터다.
연서는 속옷을 입지 않고 가운을 걸친 뒤 허리끈을 꼼꼼하게 여몄다.
돌아간 침실에 태헌이 없어 약간 헤맸다. 따개비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가 없으니 허전하고 궁금했다.
태헌은 침실에 이어진 테라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넓은 집엔 테라스가 몇 개나 되었고 전부 분위기가 달랐다.
침실 테라스는 가장 어둡고 모던했다. 태헌이 자주 사용하는 곳이니 그렇겠지.
“경매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발주 전이랍니까. 협력 갈아 치워야겠습니까.”
일할 때 태헌의 목소리는 살벌했다. 직장인의 애환을 잘 아는 연서는 핸드폰 너머의 상대에 감정을 이입하고 눈꼬리를 내렸다.
연서의 기척을 느꼈는지 태헌이 뒤로 돌았다. 그러나 연서는 장난치듯 그의 뒤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껴안았다.
“당연한 소리 말고 내일 아침까지 받아놔요.”
전화를 끊은 태헌이 허리에 감긴 연서의 손을 풀어내고 옆의 의자에 앉았다.
뭐야. 피하는 걸까?
태헌이 피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내심 속상했다. 넌지시 시선을 보내는 그의 차가운 얼굴을 보자 저 혼자만 달아올랐나 싶어 울적하기까지 했다.
“아프거나 한 덴 없고?”
“없어요.”
“배고프진 않아?”
“응.”
배는 사실 터지기 직전이었다. 태헌이 자꾸 뭘 먹이려 들어서 하나둘 주워 먹다 보니 소화가 될 겨를이 없었다.
위로라면 토실토실해져도 태헌은 별 신경 안 쓸 것 같다는 것?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연서가 웅얼거렸다.
“으음, 다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해요.”
“다리?”
연서가 움직여 태헌의 허벅지 한쪽에 살짝 걸터앉았다. 태헌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다친 덴 팔이니 조금 걸터앉는다고 아마 무리는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약간 걱정이라 얼른 그의 안색을 살폈다.
태헌이 가볍게 연서의 아랫입술을 어루만지듯 빨았다가 내뱉었다.
“일부러 이러는 거 같기도 하고.”
“일부러 이러는 거면요?”
“무슨 뜻일까.”
“속옷 안 입었어요.”
말해놓고 수줍어 입술을 깨무는 연서의 다갈색 눈동자가 유달리 반짝였다.
“하.”
태헌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언뜻 보이는 그의 입술이 웃고 있는 것 같다.
검은 밤하늘, 조용한 테라스. 익숙한 서울의 공기. 단둘만 남은 공간.
모든 것이 완벽한데 사랑을 미룰 수 있을까. 연서가 몸을 전부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가 말캉한 입술로 태헌을 먼저 찾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워…….”
“이러면 못 참아.”
“안 참으면 안 돼요?”
“환장하게 만들지 마.”
흐트러진 머리칼 속으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눈가를 찡그린 그가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서서히 그로 젖어가는 게 좋았다. 입을 맞출 때면 태헌이 좀 더 예민하게 느껴져서 어쩌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빗방울이 테라스 차양을 두드렸다. 잠시 그쳤던 비가 또다시 지면을 적시고 있었다.
달큼한 호흡이 가까이 얽혀 비밀을 나누듯 속닥였다. 숨이 차오르자 태헌이 물러났다.
연서가 눈을 슬며시 떴다. 가까이 마주한 그의 동공이 살 떨릴 만큼 진한 색감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제는 쥐어짜지 않아도 행복했다.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이 사랑이 아름다웠다.
“좋아해요.”
툭 터져버린 마음이 그의 눈동자에 파동을 낳았다.
“실은…… 나도 같이 살고 싶었어요.”
“적어도 침대까진 가게 해줘야지.”
나른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하지만 굶주린 듯한 허기가 그에게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