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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71화 (71/85)

71화

2주 후. 태헌의 고집으로 이른 퇴원을 했다. 주치의는 일주일 정도 더 입원 치료를 권했으나, 퇴원을 말하는 태헌의 뜻이 강경했다.

이른 퇴원에 연서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근심스러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태헌이 연락하면 곧장 달려올 의사만 여럿이었다. 한쪽 팔에 여전히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으나 거동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퇴원 후 지켜야 할 수칙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태헌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태헌이 일찍 집으로 온 이유는 연서 때문이었다.

그는 연서가 병원에서 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연서가 매일 용인과 병원을 오가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원에 있으려는 연서를 위해 퇴원을 앞당긴 것이다.

두 사람은 태헌의 레지던스로 향했다. 그의 집을 방문하는 건 두 번째였으나 여전히 낯설었다. 사람 기죽이려고 만든 집인 게 틀림없었다.

연서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드레스룸을 간신히 찾아냈다. 고시원 방을 여럿 합친 것만큼 광활한 드레스룸에서 태헌이 갈아입을 옷을 꺼내다가 연서는 한숨 지었다.

“이래선 청소하는 것도 문제야.”

그러다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선 태헌을 발견했다. 그는 퇴원할 때 입은 캐주얼 슈트 차림이었다.

셔츠에 재킷만 살짝 덮은 그의 편한 모습에 눈치 없이 가슴이 떨렸다. 뭘 입어도 예쁘니 큰일이었다. 너무 티 내지 말아야지.

아직은 태헌이 의기양양해지면 안 됐다. 연서는 나름 밀당이란 걸 해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이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이 옷 괜찮아요?”

옷을 보이며 물었다. 태헌은 연서의 손에 들린 옷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서 그저 그녀를 빤히 보았다.

태헌은 요즘 종종 저랬다. 연서를 바라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끈질기게 그녀를 살폈다. 늘 시선으로 행방을 추적했다.

어린아이처럼 연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태헌의 변화 중 하나였다.

“안 보여서 찾았어.”

“아까 옷방에 간다고 했는데, 못 들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데.”

집을 헤맸단 말이 안 나와 연서가 대답을 아꼈다.

“자고 갈 거지?”

“용인에 가야죠. 내가 가야 이사님도 편히 잘 텐데.”

태헌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못마땅한 듯했으나 연서도 용인 집에 밀린 할 일이 많았다. 그가 몸이 온전히 나을 며칠간, 용인과 이곳을 왕복할 생각이었다.

용인 집은 이제 연서의 소유였다. 강 여사 남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많은 유산도 잡음 없이 고스란히 그녀 몫으로 남았다.

태헌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그의 도움이 컸을 거다.

처음엔 유산을 마다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서가 받지 않으면 승빈과 윤빈에게 상속된단 유언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넘기느니 연서가 받는 게 나았다. 강 여사는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있던 거다.

다만 현호에게 빚을 갚고도 어찌할 바를 모를 만큼 돈이 남아버렸다. 어디 어디에 연서 몫의 빌딩이 있다곤 하는데, 차마 직접 확인하진 못했다.

갑자기 얻은 부가 좋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연서는 두려움이 더 컸다. 워낙 없이 살아서 천 원 한 장이 소중했다. 이러다가 나중에 본업으로 돌아갔을 때, 그 일이 하찮게 여겨질까 걱정이었다.

어쨌든 연서는 유산으로 받은 용인 집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임신한 몸으론 무리가 있어서 아직 청소를 제대로 못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차근차근 살필 작정이었다.

“네가 있어야 편해. 자고 가.”

“내가 있으면 불편하다고 그랬잖아요.”

태헌이 병원에서 연서를 내보낼 핑계로 세우던 말이었다. 물론 임신한 연서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란 걸 안다.

“집은 다르지.”

태헌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바꾸었다. 몸을 붙이고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가 다른 쪽으로 힘들어한단 걸 깨달은 지 조금 됐다.

쾌차할 동안엔 밤엔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더니.

“샤워하고 싶은데, 네가 도와줘야 돼.”

“왜? 혼자 못 할 것 같아요?”

병원을 나왔다고 금방 통증이 도진 걸까, 연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조금 아파서.”

그럼 큰일인데.

연서가 얼른 태헌의 어깨를 대충 덮어놓은 슈트를 벗겼다. 보호대를 조심히 푸르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워낙 내색을 안 하는 태헌인데, 도와달란 말을 하다니 아픈 게 분명했다.

“많이 아픈 거면 우리 다시 병원으로 가요. 응?”

“그 정돈 아니야. 혼자 거동하기 좀 힘든 거지.”

병원에서도 보호자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서는 근심이 가득 어린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셔츠 단추를 얼른 풀어냈다.

“그럼 얼른 씻고 쉬어요. 그게 낫겠어.”

셔츠가 양옆으로 벌어지자 단단한 근육이 뚜렷한 선을 띠며 드러났다. 그의 몸은 봐도 봐도 이 집처럼 적응이 안 되었다. 타고난 골격과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래도 벗겨야지.”

“…….”

연서가 벨트로 손을 가져갔다. 복잡한 구조의 벨트를 어렵지 않게 풀자 태헌이 물었다.

“잘하네.”

“응급 환자들 탈의를 도와야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 거라고 해도 싫은데.”

연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것도 질투인가?

“네가 다른 사람 옷 벗기는 생각만으로 짜증이 치밀어.”

“애처럼 왜 그래요?”

태헌이 연서의 손을 끌어 파스너 위로 올렸다.

“마저 해.”

그는 너무 야했다. 전보다 야해진 것 같았다. 얼마 전이었다. 병원 욕실에서 태헌이 혼자 푸는 모습을 목격했다.

본래 연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용인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날은 핸드폰을 두고 나와서 다시 병실로 올라갔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기에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분명 저녁 식사 전에 샤워를 마쳤기에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그를 찾은 건데, 벽에 기대어 제 이름을 부르는 태헌을 봤다.

태헌이 성적 흥분을 참고 있단 건 진즉 알고 있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온도와 뜨겁고 짙은 눈빛을 모르려야 모를 순 없었다.

그러나 태헌은 환자였고 격렬한 운동을 삼가야 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을 치를 만큼 연서는 강심장이 아니었다.

그날, 태헌은 갑자기 욕실 문을 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연서를 부르며 파정했다.

살짝 찡그린 눈가와 짙은 숨이 토해지던 입술.

손등에 솟은 핏줄. 단단하게 조여든 복근.

「왜. 가까이 볼래?」

음란했던 목소리.

살굿빛 기억에 빠져 있다가 흠칫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아주 색마가 끼었다. 태헌은 혼자 샤워를 못 할 만큼 아픈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고개를 저은 연서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태헌의 옷을 벗겼다.

이건 씻는 걸 도와주는 거야. 경건한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그와 함께 욕실로 입성했다.

“왜 나만 알몸일까.”

“응?”

“너도 벗어야지.”

연서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음탕한 그녀의 속을 읽어낼 듯이 그가 가까이서 연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을 보며 연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병원에서 태헌은 한 번도 연서에게 씻는 걸 도와달라 한 적이 없었다.

방수 패드를 붙이고 혼자 샤워하는 그를 되레 연서가 걱정했을 만큼, 그는 혼자서도 곧잘 했다.

그래서 태헌을 씻겨주는 게 처음이었다. 그녀도 벗어야 한단 기본적인 생각을 못 했다.

“그러면 다 젖을 텐데.”

태헌이 넌지시 말했다. 이어 그의 시선이 배꼽 아래로 향하는 건 착각일까. 연서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대꾸했다.

“이따 갈아입으면 돼요.”

“여긴 네 옷 없는데.”

“있어요. 오피스텔에 있는 거 여기로 옮겨달라고 신 비서님께 말씀드렸거든요.”

예전 오피스텔은 정리했다. 이젠 굳이 필요 없는 공간이었으니 정리하며 남아 있던 짐을 이리로 옮겨달라고 했다.

“둘이 따로 연락도 잘하고.”

태헌이 담백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것도 질투하는 걸까.

태헌이 이럴 때마다 연서는 솔직하게 좋았다. 어른 남자가 쩔쩔매는 게, 그녀에게만 이러는 게 묘한 우월감마저 채워주었다.

그녀가 수도 레버를 올리자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욕조에 물이 채워질 동안 태헌을 욕조 턱에 앉혔다.

수술 자국이 어깨와 쇄골, 팔꿈치까지 두 군데로 나뉘어 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와서 울지 않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나 그거 해보고 싶어요.”

“어떤 거.”

태헌이 손을 뻗어 연서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으나 그곳에 깃든 다정함을 이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연서는 웃으며 셰이빙폼과 면도기를 가져왔다.

“이거.”

“그래, 해 봐.”

태헌이 얼마든 해보라며 턱을 들어주었다. 그의 턱은 깔끔했으나 연서는 조심히 거품을 펴 바른 뒤 면도기로 살살 긁었다.

“더 세게 눌러.”

“다치면 어떻게 해요.”

“네가 한 건 다 괜찮아.”

“으아.”

손이 미끄러지며 연서가 탄식을 내뱉었다.

“죽여도 좋을 테니까 겁내지 마.”

연서가 돌연 면도기를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우태헌 씨.”

그가 감았던 눈을 떴다. 저 검은 눈동자 안에 죽음이란 단어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어딘가에 은신한 채 수틀리면 또….

“죽는다는 말 하지 말아요.”

“안 할게.”

“약속해줘요.

태헌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아픈데.”

“응? 아파요?”

“팔이 아파, 연서야.”

태헌이 이마를 툭 떨어뜨려 연서에게 기댔다.

“그렇게 아파? 많이 아파요?”

“응.”

연서는 하얗게 질려 서둘러 움직였다.

“얼른 씻고 보호대 해야겠어요.”

욕조에 물을 받는 걸 포기하고 샤워기 레버를 올렸다. 거품을 잔뜩 낸 타월을 커다란 몸에 대고 꼼꼼히 문질렀다.

몸이 어찌나 크고 긴지 비누칠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기분이다. 숨이 차 잠시 헐떡이고 있자, 태헌이 이곳도 하라는 듯 손을 가져왔다.

“여기도 해야지. 제일 중요한 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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