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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70화 (70/85)
  • 70화

    다음 날이 되었으나 연서는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간병인을 돌려보내고 직접 태헌을 돌봤다.

    우려를 드러내는 태헌을 무시하곤 그의 밥을 챙기고 손과 발을 닦아주었다. 필요에 따라 의료진을 호출하며 지극정성으로 태헌을 간호했다. 태헌은 연서를 걱정하면서도 또 그리 마다하진 않았다.

    연서는 잠시 병실 밖 복도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자꾸만 따라붙는 태헌의 음험한 시선을 피할 겸, 뜨거운 뺨을 식혔다.

    “여우.”

    태헌은 노골적이었다. 전에는 제한된 집착이었다면 이젠 일거수일투족, 연서의 행방 전체에 관심을 두었다.

    신 비서가 찾아와 업무 얘기를 할 때도 연서만 바라보았다. 연서는 뺨을 꾹꾹 누르며 음료수를 한 캔 더 뽑았다. 병실로 돌아가자 태헌의 검은 동공이 늑대처럼 찾아들었다.

    “어디 다녀와.”

    “좀 자요. 환자는 잘 먹고 잘 자야 금방 낫는 거예요.”

    “찬 거 안 좋아하면서. 배탈 날 텐데.”

    태헌이 연서가 냉장고에 음료를 넣는 걸 보며 말했다.

    “임신하면 체질이 바뀐대요. 그리고 누구 때문에 천불이 나기도 해서요.”

    태헌이 낮게 웃었다. 아니 왜 환자가 잘생기고 그런 거지?

    이쯤 되니 태헌이 환자 역의 배우나, 병원 침대 광고 모델쯤으로 보였다. 집 나간 콩깍지가 돌아온 듯했다.

    “이리 와.”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거 아니에요.”

    연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괜히 창가를 서성였다. 솔직히 이제 와서 태헌을 보려니 민망했다.

    그간 그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과 홀랑 돌아온 것,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숨기지 못하는 어수룩함까지 모두 부끄러웠다.

    링거대가 밀리는 소리가 나기에 뒤로 도는 순간 태헌의 커다란 몸이 그늘처럼 드리웠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돼.”

    “아프지 않아요?”

    골절이 심해 재활 치료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전처럼 완벽하게 팔을 사용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란 진단에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그런데 태헌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연서는 조마조마하게 그를 올려보다가 점점 다가오는 태헌에게 밀려 창틀에 엉덩이를 붙였다.

    “미리 말하는데, 저는 어디까지나 이사님 그냥 한번 다시 만나보는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해.”

    “근데 왜 웃어요?”

    “그냥 한번 만나는 게 누구보다 어려운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모르시나 본데 저 엄청 쉬워요.”

    “그럼 그간 내가 한 개고생은 뭘까.”

    “우리 아이가 듣고 있으니까 말조심해 주세요.”

    연서가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태명은 언제 지어줄 거예요?”

    아직 태헌에게서 태명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언뜻 마주한 태헌의 눈동자가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뭘?”

    “우리 아이, 그거. 다시 말해줘.”

    우리 아이란 말에 태헌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단 게 새삼 신기했다. 아이로 귀결된 끈끈한 유대감을 그도 느낀 걸까.

    “우리 아이 태명 생각한 거 있어요?”

    “반짝이 어때.”

    “반짝이요?”

    “그래. 보통 태명은 된소리로 짓는 게 좋다던데.”

    “그런 것도 알아요?”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반짝. 태헌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 못 한 단어였다. 그러나 곱씹어 보자 좋았다.

    “반짝이.”

    19주가 되어서야 아이는 태명이 생겼다. 태명을 지어준 아빠도 생겼다. 아빠. 가족. 아이. 그런 것이 한꺼번에 모이자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왔다.

    여전히 끝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태헌과 떨어져 있을 때보다 지금이 편했다. 그리고 이토록 뜨겁게 저를 바라보는 사람이 식어버린다는 게 잘 상상되지 않았다.

    태헌이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 우태헌이 인정한 유일한 가치가 쉽사리 무효가 되진 않을 거다.

    속는 셈 치고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이번엔 다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반짝이 좋아요. 반짝아, 반짝아.”

    연서가 작게 불러보다가 웃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태헌이 입술을 손가락으로 빼내며 물지 마, 나지막이 말했다.

    연서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혀를 조금 빼내 그의 손끝을 핥았다. 태헌이 뜨끈하게 한숨 쉬었다.

    “어쩌려고 이렇게 귀엽게 굴어.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지.”

    “…하지 말아요?”

    “진짜 한연서 모습이 이런 거였네. 사람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살랑살랑.”

    그렇게 말하는 태헌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웃는 것도 잘생겨선. 심장이 떨려와 큰일이었다.

    “그래도 먼저 떠나면 안 돼요.”

    연서는 툭, 본심을 내뱉었다. 내가 이만큼 달려왔으니 당신도 나를 놓으면 안 된다고. 지금 이만큼만 뜨겁게 있어 달라 연서가 소심히 투항했다.

    “서툴지 몰라. 그럴 때마다 네가 알려줘.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널 다치지 않게 할지.”

    “좋아요.”

    태헌이 시큰하게 웃었다. 한쪽 팔을 들어 연서를 감싸 안았다. 처음엔 가벼웠던 포옹이 점차 힘이 실려 연서가 바둥댔다.

    “그만 놔줘요……. 무슨 힘이…… 으응, 답답해.”

    “네가 택한 거야.”

    태헌은 여전했으나,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바닥을 길 수도 있다던 태헌은 연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혀를 문질렀다.

    “아, 그만!”

    “그만이 안 되게 하지 말았어야지. 시작을 누가 했지?”

    태헌이 부푼 아래를 맞춰오면 질 낮게 웃었다. 연서는 살덩이를 움켜쥐며 발진하는 태헌을 말리려 온몸을 바동거려야 했다.

    *

    신 비서가 외부에서 공수해 온 고급 도시락은 연서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더 먹으란 태헌의 눈빛에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한술 더 떴다.

    부쩍 말라버린 연서는 식사 때마다 번번이 태헌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물을 마신 연서는 제 그릇을 챙겨 일어나 태헌의 것까지 치우려 했다.

    “그냥 둬. 내가 할 테니까.”

    “환자는 하는 거 아니에요.”

    “임산부가 할 말은 아니지.”

    결국 태헌의 고집에 연서는 그릇을 빼앗겼다. 태헌이 직접 개수대로 향해 그릇을 정돈했다.

    한 손은 붕대를, 한 손은 링거를 매단 터라 태헌의 손이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결국 연서가 그의 뒤에서 손을 뻗어 정리를 도왔다.

    “봐요. 내가 하는 게 빠르다니까.”

    사이좋게 양치를 하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방문객이 찾아왔다.

    똑똑똑.

    식사 전에 다녀갔으니 간호사는 아닐 터였다. 태헌이 문가를 무표정하게 노려보며 직접 움직였다.

    손님일까. 태헌이 중상을 입었단 소식에 면회를 신청한 사람이 줄을 섰어도 섰을 거다.

    “누굽니까.”

    직접 문을 연 태헌이 등을 보이곤 멈춰 있어 연서도 그리로 다가갔다. 누구든 인사는 해야 했으니까.

    “찾아올 것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넌 애가 어쩜 그리 매정하니.”

    “새삼스럽네요.”

    비딱한 목소리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태헌의 등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자 선예가 있었다.

    그녀의 손엔 5단 찬합과 종이가방이 있었다. 아들 걱정에 고민하다 달려온 티가 났다.

    “안녕하세요.”

    연서가 인사하며 태헌의 옷깃을 뒤로 당겼다. 문에서 물러나란 뜻이었는데 태헌은 요지부동이었다. 되레 연서를 들어가라 손짓했다.

    “들어가 있어.”

    그러니까 선예를 문 앞에서 내치겠단 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선예는 어른이었다. 경우 없이 문전박대할 순 없었다.

    결국 연서는 태헌의 앞쪽으로 비집고 나서서 제집인 양 선예를 맞이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니에요. 이것만 전해주고 갈 거예요. 태헌이 잘 있는지 얼굴 봤으니 가야죠.”

    선예는 딱히 연서의 존재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다 알고 온 것 같았다. 태헌과 다시 만나는 게 머쓱하고 민망해 연서가 눈을 피하며 살짝 고개 숙였다.

    “지난번에 쓰러졌을 때,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이제 몸은 괜찮은 거죠?”

    “네.”

    “뭐든 잘 챙겨 먹어요. 이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는데, 병원 밥보단 나을 거예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안 갑니까.”

    태헌이 심드렁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냈다.

    “이사님은 들어가 있어요. 이거 가지고요.”

    연서가 찬합과 종이가방을 받아 태헌에게 넘겼다. 슬쩍 올라서는 눈썹을 무시하고 연서는 문밖으로 나섰다.

    “교수님은 제가 배웅할게요.”

    “가긴 어딜 가겠단 거야. 들어와.”

    “이사님은 들어가세요. 환자잖아요. 어서요.”

    연서가 눈에 힘주어 말한 뒤 태헌 앞에서 병실 문을 닫았다. 선예가 놀라운 광경을 마주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닫힌 문을 주시했다. 연서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 가셔요.”

    선예가 걱정스럽게 병실 쪽을 흘긋거렸으나 그녀의 예상처럼 태헌이 쫓아와 연서를 데려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서가 당당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실은 태헌과 약속했다. 다시는 사람 붙이지 않기, 연서의 주변 사람에게 해코지하지 않기, 연서를 물건처럼 취급하지 않기 등.

    마지못해 약속하는 느낌이 다분했으나 어쨌건 태헌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로써 확답했다. 약속해 놔야 태헌이 전처럼 마음대로 하지 못할 거다. 그래야 이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될 테고.

    연서가 변하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아시겠지만, 이사님이랑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연서 씨, 내가 그때 일 사과 못 했죠?”

    “네?”

    “백화점 일 말이에요. 그땐 두 사람에 대해 잘 몰랐어요. 태헌이가 그렇게까지 연서 씨를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이런 게 변명이 되진 않겠지만…….”

    선예가 연서를 마주 보았다. 여전히 고운 선예의 낯에 후회와 미안함이 어려있었다.

    “마음 많이 상했을 거예요. 많이 늦었지만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 걱정하신 거 알아요.”

    “난 내 자식이 어려워요. 도무지 쟤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네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선예가 어두운 기운을 거두곤 옅게 웃었다.

    “앞으로 태헌이 잘 부탁해요.”

    “교수님…. 이사님께 직접 말씀하시는 건 어떨까요?”

    선예의 고개가 약간 기울었다. 무슨 의미냐는 듯이.

    “많이 걱정하시는 거, 이사님은 모르니까요.”

    선예는 전보다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장례에 이어 태헌의 사고 소식까지 마음이 많이 곯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들이었다. 연서가 완전히 문식을 놓지 못했던 것처럼, 선예와 태헌의 사이도 비슷하지 않을까.

    감정의 골은 깊겠지만 어쩌면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서는 감히 추측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선예가 미웠다.

    태헌에게 사랑을 알려주지 않아서. 태헌을 옳은 방법으로 사랑해주지 않아서. 그를 외롭게 해서.

    그러니 이제라도 엄마 노릇 좀 해달라고 연서는 소극적으로나마 뜻을 전했다.

    그 가여운, 사랑을 몰랐던 남자를 감싸 달라고.

    “살펴 가세요.”

    연서가 고개를 숙였다. 탄압에 꺾이지 않을 준비는 되어 있었기에 고개 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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