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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9화 (69/85)

69화

주저하는 연서 대신 현영이 노크했다. 연서는 숨을 들이켜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연서를 발견한 태헌이 말을 멈추었다. 연서도 그를 마주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태헌은 지난 사투를 알려주듯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한쪽 어깨와 팔을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이었다. 환자답지 않게 멀끔한 얼굴만 빼곤 부상 범위가 심각해 보였다.

환자복 바지만 입은 채 이불도 덮지 않은 그의 대범함이 꼭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의 일면 같아서 연서는 울컥 화가 났다.

“가관이네요.”

목이 메고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각오하고 왔는데도 직접 마주한 건 힘들었다.

“누가 연락했어.”

“브레이크를 안 밟았다면서요.”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해.”

“왜 그랬어요?”

“그렇다고 한들 이제 한연서 씨완 상관없는 일이지. 돌아가.”

태헌이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나빴다. 정말 나빴어.

그런 모습을 하고선 가라고?

“죽으려고 그랬어요? 진짜 죽어서 어쩌게? 나한테 두고두고 복수하려고?”

“대체 왜 온 거야.”

“그렇게 혼자 죽어버리면 나는, 죄책감에….”

“놔주었을 때 가!”

태헌이 핏발선 눈으로 소리쳤다. 그가 이마를 손등으로 덮으며 숨을 가삐 내쉬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한데 가줘.”

눈시울을 붉힌 연서는 물을 머금은 듯 막힌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쁜 새끼.”

“그래. 그러니까 가. 나쁜 새끼 신경 쓰지 말고.”

“우태헌 너는 정말 나쁜 새끼야!”

연서가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처음부터 그에게 창피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가여운 이가 되고 싶지 않았고 동정받기 싫었고, 애첩 따윈 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우태헌은 연서에게 남자였기에.

천천히 용인 집의 계단을 올라오던 그가, 돈 봉투를 던져주던 그가 좋았다. 처음부터 사랑이었다. 사랑한 덕에 아팠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면 이만큼이나 얽매이지 않았을 거다. 헤매지도 않았겠지.

사랑이 버거워 발버둥을 쳤다. 쌀알 같은 행복을 줍고 줍다 보니 상처까지 주워버렸다. 하나 그 안에 행복은 분명히 있었다.

태헌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엔 괜찮을까.

연서는 자신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태헌이 일부러 상처를 주진 않을 거란 희망을 품을 순 있었다.

그가 사랑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데 뭘 어떻게 해.

내가 어떻게 더 밀어내.

“정말 날…… 사랑해요?”

연서를 바라보는 태헌의 눈가가 붉었다. 그는 더 이상 모진 말을 하지 않았다. 전처럼 연서를 가난하게 만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랑하니까.

“날 사랑하냐구요. 그래서 죽어버리려고 그랬어?”

“너를 망가뜨릴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널…… 어떻게 해버릴 것 같아.”

괴로운지 태헌의 음성이 탁했다.

“떠나야 하는 걸 아는데 떠나고 싶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널 강제로 취할 방법을 생각하지.”

“…흐윽.”

“집 앞까지 찾아갔다가 너를 해칠까 두려워서 도망가길 반복했고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지 않았어.”

연서만큼이나 태헌은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막을 수 있다면, 죽는 게 어렵겠어? 널 다치게 하는 것보단 나을 텐데.”

“당신은, 미쳤어.”

“그래. 그러니 미친놈에게 붙잡히지 않게 잘 도망가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이 꼴을 하고 어떻게 도망가라 그래?”

연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물었다. 여기까지 오며 생각했다.

태헌이 분명 계획적으로 벌인 짓일 거다. 정말 죽으려고 한 건 아닐 거야.

나를 돌아오게 하려고 머리를 쓴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을 불사한 그의 사랑이 너무 가여워서. 여태 사랑 같은 감정이 뭔지 몰랐다는 태헌이 불쌍하고 애달파서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태헌에게선 맹목적인 사랑만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돌아오길 바랐다면 돌아가라 내치지 않았을 거다.

“…흐윽, 이렇게까지 해놓고 나더러 가라고?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한연서, 일단 눈물 그쳐. 또 픽픽 쓰러져서 사람 돌게 하지 말고.”

태헌이 미간을 좁히며 일어나려고 하기에 연서가 먼저 놀라 달려갔다. 전신마취를 했다면 당분간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환자가 일어나면 어떻, 흐윽. 흐으윽…….”

둑에 가두었던 강물처럼 눈물이 터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의 가슴을 가볍게 누르자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났다.

붉은 소독약 자국과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공포스럽게 자리했다. 정말 죽으려 했던 그의 과감함에 진저리가 나면서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연서는 목놓아 아이처럼 울었다.

“울지 말라니까. 한연서. 연서야…….”

태헌이 그녀의 등을 어쭙잖게 어루만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동안 울던 연서는 겨우겨우 눈물을 닦아 냈다. 그만 울어야 했다. 이 미친 남자에겐 이런 약한 모습보다 단호한 대처가 어울렸다.

그래야 다신 이런 생각을 안 하지. 연서가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가만 안 둘 거예요, 진짜.”

눈을 앙칼지게 치뜨다 다시금 흐르는 눈물에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러자 가만히 연서를 보던 태헌이 손을 들어 작은 얼굴을 문질렀다. 또 복받칠 것 같아서 그 손을 밀어냈다.

“하지 마. 됐으니까 제대로 누워요.”

“…….”

“말 좀 들어주면 안 돼요?”

그제야 태헌이 베드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제대로 누우니 정말 환자 같다. 정말 환자 맞지.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환자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또 눈물이 솟았다. 결국 연서는 엉엉 울며 링거줄을 정돈하고 태헌의 몸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태헌이 멀쩡한 팔을 뻗어 연서의 손목을 가볍게 감쌌다. 눈가를 재차 문지르는 그녀를 막으려는 거다.

“언제까지 울 거야. 말을 해줘. 그래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눈물이 나는 걸 어떻게 하라고요. 이런 것도 이사님 허락받아야 해요?”

“닦아주고 싶은데.”

“됐어요.”

머뭇대던 연서가 티슈를 뽑아 얼굴을 정돈했다. 새빨개진 얼굴을 보던 태헌이 피식 웃었다.

“이런 때도 발정이 나네.”

“…뭐?”

“섰어.”

태연한 태헌의 아랫도리를 바라본 연서가 다시금 크게 눈물을 터뜨렸다. 어이없고 슬펐다. 안도가 밀려들자 그가 더없이 가여웠다.

그래도 단단히 일러 둬야 해.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그래, 너 이렇게 우는 거 보니까 못 그럴 것 같네.”

“또 죽으려고 하기만 해봐. 그땐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유령 돼서 이사님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테니까.”

“그건 호사 같은데.”

태헌의 아랫도리를 심각한 눈으로 흘긋거리며 눈물을 닦아 내던 연서가 도로 눈을 매섭게 떴다.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그가 연서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묻은 손으로 가느다란 손목을 매만졌다.

“이제 못 가는 건 알지.”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네가 오면, 못 놔준다는 말 잊었어?”

태헌의 형형함은 여전했다. 그를 빤히 보던 연서가 코웃음 쳤다.

“그런 거 일일이 기억 못 해요.”

“한연서.”

“화장실 갈 거예요.”

쌀쌀맞게 대답한 연서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엉망이 된 얼굴을 정돈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다시 나와 물을 마시고 머리를 묶는 동안 태헌의 시선이 한 번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은 안 돼. 이렇게 와 놓고 가 버리는 거, 안 돼.”

“시끄러워요.”

“하…….”

태헌이 웃을 듯 말듯 한숨을 내쉬었다. 연서가 링거를 확인한 뒤 커튼을 쳤다. 그리고 태헌의 베드로 향했다.

신발을 벗고 그의 옆에 누웠다. 베드는 넓었으나 상처가 닿지 않는 선에서 조심히 그의 곁을 차지했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자 우습게도 잠이 밀려왔다.

“난 잘 거예요. 누구 때문에 한숨도 못 자서 쉬어야 해요. 이사님도 자든가 반성하든가. 뭐 그러세요.”

연서의 눈가를 조심히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었다. 머리칼을 넘기고 이마를 만지다가 뺨을 문지른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히 덧그리다가 입술에 닿았다.

“이미 죽은 건가. 그래서 꿈이라도 꾸는 건가.”

“네. 꿈일 거예요. 사회에 공헌한 게 많아서 상이라도 주나 봐요.”

“그런 거면 깨기 싫은데.”

영원히 연서의 꿈을 꾸겠단 그의 목소리가 달콤하기만 했다. 연서의 입술 끝이 움찔거리다가 위로 올라섰다.

“이사님이 안 보내는 게 아니라, 내가 안 가는 거예요. 내 선택이에요.”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눈을 살짝 뜨자 언젠가 맞닥뜨렸던 검은 우물이 보였다. 일렁이는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잠깐. 움직이면 안….”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겹쳤다. 아주 가볍게 닿았다가 느리게 핥는다. 비비고 문지르며 호흡이 뒤엉켰다.

머금었던 말랑한 입술을 툭 내뱉었다가 조심히 빨아들였다. 촉감이 물처럼 스몄다. 눈가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태헌은 다정했다. 보들보들한 속살을 치대며 어루만지듯 채워갔다. 치열을 더듬었을 땐 아랫배가 저릿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거다.

연서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졌을 때 그가 입맞춤을 멈추고 입술을 떼어냈다.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거 사실, 환장하게 좋아.”

잠긴 목소리에 흥분과 희열이 묻어났다.

“달래고 싶은데 더 울려보고 싶어. 네가 나로 흔들린단 소리니까.”

못된 고백은 연서를 충만하게 했다.

사랑이란 건 그런 건가 보다. 마음이 통했을 때, 비소로 완성이 되는 감정인가 보다.

따뜻한 풍선이 가슴을 가득 채운 것처럼 마음이 넘실거렸다.

“이제 똑바로 누워요. 자야 해요.”

“너무 예쁘게 굴지 마.”

태헌이 피식 웃으며 곤란하다는 듯 연서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보고 누웠다. 곁을 차지한 태헌이 연서 또한 꿈 같았다. 꿈이었으면 하다가 꿈이 아니길 바랐다.

연서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더는 슬픈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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