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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8화 (68/85)
  • 68화

    차에 오르자 잊고 있던 태헌의 향취가 폐부 깊숙하게 들이찼다.

    “곧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

    “그런데 널 이대로 두고 가면 신경이, 많이 쓰일 것 같아.”

    태헌은 연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앞을 보고 있었다.

    “용인 집은 어때. 그곳에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용인이요?”

    “할머님이 네 앞으로 용인 집을 남겼어. 곧 변호사가 연락이 가겠지만, 유산도 좀 남겼고.”

    “선생님이 왜…….”

    “받고 말고는 네 자유야. 받아서 백현호한테 은혜를 갚는 데 써도 될 거고.”

    태헌의 입에서 현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연서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가 현호에게 한 짓이 떠올라서 조마조마했다.

    “용인이 멀면 오피스텔로 들어가도 좋고, 전의 레지던스를 써도 돼.”

    “이사님.”

    “아니면 미국까지 가서 널 감시하게 될 거야. 그건 너도 원하지 않겠지.”

    “…제가 불쌍해요?”

    “아닌 거 알잖아.”

    태헌이 짙게 한숨 쉬었다. 언뜻 멀쩡해 보여도 핸들을 잡은 손을 떨고 있었다.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구나. 우태헌은 이 사랑을 얼마나 더 앓은 후에야 끝낼까.

    문득 그런 게 궁금해졌다. 나처럼 오래오래 아플까.

    똑똑한 사람이니 헤매는 시간이 길진 않을 거다.

    “그거면… 돼요? 제가 괜찮은 집에서 지내면 이사님 마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그게 되겠어.”

    앞만 보던 태헌이 그제야 연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평생 못 놓겠지. 나 같은 사람은 애정이란 걸 못 느끼거든. 네가 유일한 거야.”

    괜한 걸 물었다. 그의 시선이 덫처럼 달라붙고 있었다.

    “……용인으로 갈게요.”

    “잘 생각했어. 유산 문제는 김현영 비서와 상의해. 편하게 연락해도 돼. 내가 관여하는 일 없을 거야.”

    태헌이 말을 마쳤는지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했다. 연서의 집이 있는 계단 아래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도착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단 복잡한 생각이 들어 선뜻 손잡이로 손이 가지 않았다.

    “유산 상속받으면 아이 키우기 어렵지 않을 거야. 괜히 몸 상할 일 하지 마.”

    동네 의원에 면접 본 걸 알았구나.

    그의 정보력에 감탄해야 할지 겁을 먹어야 할지 이제는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맹목적이었다. 감정의 정의만 바뀌었을 뿐 태헌은 전부터 지금까지 연서에게 밀착한 형태로 함께했다.

    무섭기도 했으나, 원체 외로움이 많아 그런지 애정의 지표처럼 여겨져 안심할 때도 있었다.

    이젠 의미 없겠지.

    아이 태명을 부탁했는데 태헌은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묻지 않을 거였다. 그에겐 아이가 그 정도 의미였을 터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연서가 문고리를 당기는 순간이었다.

    “너를 또 아프게 할 것 같아서 가는 거야.”

    “…….”

    “그러니까 다시는 눈에 띄지 마. 내가 널 찾아올 일은 없을 거고.”

    “그 말 지켜주세요.”

    “대신, 네가 온다면 그땐 너 못 놔.”

    경고였다. 어쩌면 또 다른 고백 같았다.

    “안녕히 가세요.”

    연서가 애써 미소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차에서 내렸으나 뒤는 돌아보지 못했다.

    계단을 조금씩 올라가며 태헌이 욕심을 부려 자신을 가둬버렸다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영양가 없는 상상을 하다간 집에 도착했을 땐 허무한 미소만 머물러 있었다.

    잘 가요.

    *

    그로부터 열흘 뒤.

    연서는 그간 강 여사의 유산과 용인 집을 상속받는 문제로 종종 현영과 통화했다. 그리고 오늘 태헌이 떠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갔구나.

    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이제 그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으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숙제하지 않은 아이처럼 불안했다. 독초를 삼킨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그러다 늦은 새벽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신 비서의 전화였다.

    -이사님께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서 꿈일까 의심했다.

    너무 뒤척이다가 잤구나.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연서가 느긋하게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무슨 소리예요?”

    -이사님 지금 신주 병원에 계십니다.

    꿈이 아니구나. 연서는 먹물처럼 왈칵 몰려든 현실 앞에서 곧장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시겠습니까?

    “이사님이……”

    -가해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했습니다.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연서가 간신히 냉정한 말을 토해냈다.

    -이사님, 사고 순간에 브레이크를 안 밟으셨습니다.

    이성이 선로를 이탈하는 소리가 났다. 삐. 이명이 섬뜩하게 고막을 뒤흔들었다.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으셨습니다. 일부러… 받으신 것 같습니다.

    중앙선, 브레이크. 떠도는 단어가 이질적이었다.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주먹으로 가슴을 쿵 내리쳤다.

    “…많이, 다쳤나요?”

    -네. 지금 수술실에 계십니다. 꼭 와주십시오. 이사님 그동안 많이 힘드셨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통화가 끊기고 연서는 힘없이 핸드폰을 내렸다.

    “하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통을 잡다가 물을 죄 쏟고 말았다. 엎어진 물이 허벅지와 종아리로 스몄다. 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작은 부상은 아닐 터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정말, 죽으려고 한 거야?”

    문득 죽으려 했다던 태헌의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죽을까 싶었는데.」

    「살 이유가 없는 것 같거든. 그런데 죽으려니 착한 네가 눈에 밟혀.」

    그럴 수 없었다고 했으면서 태헌은 스스로 생명을 놓으려 했다.

    “대체, 왜…….”

    연서가 이불 위로 쓰러졌다. 가슴이 찢길 듯 아팠다. 태헌이 만약 정말 죽었다면.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세상에 우태헌이란 사람이 사라진단 가정은 깊은 공포를 불러왔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그가 잘 살고 있을 거란 위안을 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어쩌면 태헌의 곁에 남아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것보다 우태헌이란 사람이 영영 사라지는 게 더 무서웠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연서는 진정할 수 없어 작은 손을 가슴에 얹고 쌕쌕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를 사랑했던 흔적을 정말 지우고 싶었던 걸까.

    태헌이 연의 꼬리처럼 닿을 듯 말 듯 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손을 뻗어도 될까.

    그럼 당신이 온전히 잡혀줄까.

    다가오는 차를 향해 돌진할 만큼 힘들었다고. 그만큼이나 태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연서는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죽으면 안 돼. 누구 마음대로… 죽어?”

    크게 다치는 것도 안 되었다. 완벽한 피조물에 가까운 우태헌. 그 잘난 몸에 장애가 생긴다면 오만한 그는 받아들이지 못할 터다.

    시린 바람이 가슴에 들이찬 것 같다. 연서는 결국 그의 숲으로 달려가게 될 운명이었다.

    어느덧 태헌의 숲은 연서의 세계를 전부 뒤덮어버렸다. 그리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단 걸 깨달았다. 연서는 겨우 몸을 일으킨 후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나약하게 울며 엎어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눈에 띄지 마.」

    「대신, 네가 온다면 그땐 너 못 놔.」

    순 멋대로였던, 그래서 태헌다웠던 마지막을 떠올렸다.

    당신 뜻대로 안 될 거다.

    죽음도, 사랑도, 만남도, 이별도.

    태헌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건 없을 거라고, 직접 말해야 했다. 바보 같고 뻔뻔하고 잘난 맛에 사는 남자에게 잘못된 생각이었단 걸 깨우쳐 주어야 했다.

    “가만 안 둘 거야.”

    연서가 중얼거렸다. 실은 겁에 질려 굳어버린 손으로 겨우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더 빨리 나설 걸 후회했다.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태헌이 잘못된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여태 품었던 고민이 부질없었다.

    태헌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는 것과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가 이리도 컸다.

    “우태헌 정말…….”

    연서가 주먹을 꼭 쥐고 씨근덕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주 병원 앞이었다. 고민이 길었던 만큼 날이 밝고도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오후 3시. 오후의 햇살이 나른했지만 11월 말의 가을바람은 차디찼다. 어느덧 여름과 가을이 모두 지나가고 있었다.

    연서는 떨리는 턱에 힘을 주고 병원으로 향했다. 로비를 서성이던 현영이 연서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왔다.

    “오셨어요?”

    올 줄 알았다는 듯 구는 현영의 태도에 자신이 미련을 많이 흘리고 다녔구나, 깨달았다.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

    “수술은 잘 마치셨습니다. 두어 시간 전에 병실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지셨답니다.”

    태헌의 병실로 향하는 동안 현영이 사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상대의 졸음운전이라고 했다. 중앙선을 침범한 과실 차량이 뒤늦게 핸들을 꺾어 대참사를 막았으나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태헌은 상대 차량의 후미에 충돌했다고.

    테헌의 한쪽 어깨와 팔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수술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고 했다. 자칫 신경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이라 적절한 재활만 받으면 별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사님 보고 가실 거죠?”

    “네.”

    “병실엔 한동안 아무도 안 오실 겁니다. 가족분들이 오셨다가 5분도 못 돼서 쫓겨나셨거든요.”

    현영이 그녀답지 않게 극성스레 말을 덧붙였다. 연서가 돌아갈까 불안한 눈치였다.

    “제가 온 걸 알까요?”

    “아뇨. 모르십니다.”

    눈앞의 병실 문이 멀게만 느껴져서 연서가 잠시 주저했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태헌을 밀어내지 못하겠지.

    연서는 그리 독한 성격이 못되었다. 이만큼이나 그를 밀어낸 것도 노력을 쥐어짜고 쥐어짜 가능했다.

    정말 목숨을 놓으려고 했던 태헌을 매몰차게 등 돌리기엔 미련이 남았고 그를 사랑한 기억이 강렬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해서 등 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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