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마루에 올라 미닫이문을 열었으나 꼼짝없이 잠겨 있었다.
밖에 달린 자물쇠를 보아 집에 없는 듯했다. 보안의 허술함만 되새긴 태헌은 다시금 집을 뛰쳐나왔다.
고백을 하는 게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그래서 도망간 것 같다.
착각일 거라고 말하던 연서는 침착했다. 사실을 말하듯 잔잔했다.
흔들면 흔들리던 예전과 달랐다. 연서의 마음이 온전히 떠나버렸단 증거가 이리도 뚜렷했다.
태헌을 볼 때마다 어쩔 줄 모르던 수줍은 여자 대신, 귀찮단 표정만 가득 짓는 모르는 한연서만 남았다.
태헌은 연서가 종종 들르던 동네 슈퍼와 공원을 살폈다. 감히 연서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날들에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가 다니던 길이 훤했다.
쏴아아.
빗줄기가 굵어지자 행인조차 뚝 끊긴 작은 동네에 태헌만 우두커니 남아버렸다. 주변을 한참이나 뒤졌으나 소득 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백현호의 집에 있는 건가.
이제 별수 없이 사람을 풀어 추적해야 할까.
연서가 싫어한단 걸 알면서도 그녈 놓지 못하는 욕심이 있다. 적어도 연서가 무사하단 확인이 필요했다.
태헌은 오피스텔에 들러 그녀가 남긴 은은한 잔향만 확인하고, 다시 레지던스로 돌아왔다. 혹시 연서가 있을지 모른단 희망을 품고서.
-여보세요?
끼익. 연서의 목소리에 태헌의 차가 거칠게 주차 칸으로 미끄러졌다.
“너 어디야.”
-집이죠.
“누구 집.”
연서가 말이 없었다.
“미치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 누구 집이야.”
-이사님 집이요.
“기다려.”
태헌이 차에서 내려 달렸다. 제 몰골 따위 생각하지 못하고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만 노려보았다.
두 번을 갈아타야 하는 엘리베이터는 태헌의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그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야 엘리베이터 입구가 벌어졌다. 문이 열리는 걸 채 기다리지 못하고 집으로 뛰었다.
“한연서.”
태헌은 대번에 연서를 부르며 집을 가로질렀다.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넓은 집을 헤매는 것보단 전화가 빠르단 판단이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여기 꽃이랑 화분 있는…….
태헌이 전화를 내리고 뛰었다. 외부로 통하는 테라스는 기역 자 구조였다. 커브를 돌기 전에 문이 있었는데 연서가 굳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갔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연서가 있는 곳은 둥근 유리가 천장을 감싼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야경을 감상하기 위한 용도였으니 태헌이 찾은 적 없는 곳이었다.
벤치에 앉아 쏟아지는 빗물을 구경하던 연서가 태헌을 발견하고 눈을 키웠다.
“이사님.”
태헌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허탈하게 웃으며 그러나 안도하며.
“전화는 왜 안 받아.”
“몰랐어요. 부재중이 많이 찍혀 있어서 놀랐어요. 무슨 일 있어요?”
“간 줄 알았어.”
“…….”
“네가, 간 줄 알았다고.”
연서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비가 많이 와서, 못 갔어요. 감기 들면 안 되니까.”
그래, 연서가 무사하니 됐다.
연서가 혹시 떠나갔을까 봐. 아예 모습을 감추려 들까 봐.
마음을 졸였다.
태헌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내 다른 무릎마저 꿇어앉았다. 패잔병처럼 그렇게 앉아 연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허벅다리가 젖어 슈트에 진한 윤곽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격앙된 숨소리도 고스란히 연서에게 닿고 있었다.
“이사님. 왜……. 일어, 일어나요.”
“안 되나.”
“…….”
“그렇게 안 되겠어? 미안하다고 빌어도 안 될까. 네가 용서할 때까지 바닥을 기어도 안 되겠어?”
연서의 맑은 눈동자에 할 수만 있다면 투신하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칼로 목을 조를 수만 있다면, 너로 물들 수 있다면.
네가 닿을 수만 있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은데.
태헌이 넓게 펼친 허벅다리 위에 두 주먹을 올렸다.
“어려웠어. 내 감정을 모르고 성욕으로 치부한 건 실수야.”
정립되지 않은 감정이 위태롭게 삐거덕거리다가 연서를 찔렀다.
“늦은 거 알아.”
태헌은 이제 한계였다. 억지로 가지고 싶다. 거부한다면 힘을 써서라도 가두고 싶다.
하지만 강제가 아닌 연서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
네가 다시 햇살 같은 눈으로 봐주길.
그럼 난 뭐든 다 할 수 있는데.
“네가 행복했으면 해.”
연서의 침묵에 기대어 태헌은 속내를 끄집어냈다.
“그러려면 널 놔줘야겠지.”
태헌이 그녀의 인생에서 빠져야 연서의 행복이 완성될 터다.
“하루는 널 미치게 안고 싶다가, 또 하루는 내가 증오스러워.”
“이사님.”
“네가 없으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
“…….”
“멀어지려고 했는데 안 됐어. 지금도 이렇게 용서를 구하려고 지저분하게 굴고 있지.”
태헌이 눈가를 찡그렸다. 연서를 떨쳐낼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걸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만 깊어져 갔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힌 걸 뒤늦게 알았다. 한연서의 독에 갇혔는데 유일한 동아줄인 연서가 그를 놓았다.
이제 태헌의 남은 삶은 전보다 더 지독한 어둠만 남았다.
“……난 이사님을 계속 의심해요. 이제 와서 나한테 왜 이러지? 어디에 써먹으려 그러나? 아니면 내 몸이 필요한 걸까? 아이를 데려가려고 그러나?”
연서의 목소리가 더없이 차분했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온정 없이 깔끔한 음성이었다.
“차라리 죽을까 싶었는데.”
“…이사님.”
“살 이유가 없는 것 같거든. 그런데 죽으려니 착한 네가 눈에 밟혀.”
태헌이 텅 빈 동공에 연서를 담으려 애썼다. 잡히지 않을 테지만 조금만 닿아달라고 남은 애원을 쥐어짰다.
“너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아니, 한 번이라도 전처럼 날 봐준다면 뭐든 할 거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사랑이 이런 거라면 사랑은 너무 가학적이다. 알지 못했던 날엔 연서를 망가뜨렸고, 알게 된 후엔 태헌을 망가뜨리고 있었으니.
“사랑해.”
그럼에도 사랑이었다.
“…….”
“사랑해, 연서야.”
“난 무서워요.”
연서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웃었다.
“이사님이랑 함께 있으면 계속 무섭고 불안할 거예요. 우린 맞지 않으니까.”
“세원을 버리면 되겠어? 다 버리고 너만 본다고 해도 어려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분이 오른 건지 연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려는 거다. 태헌이 급히 일어나 연서의 손목을 잡았다.
“연서야, 나 봐.”
“이제 그만하세요.”
“연서야.”
시선을 모로 내리깐 연서가 그를 끝내 거부했다.
“놔주세요. 집에 가고 싶어요.”
전부 쏟아부었는지 빗소리가 잦아들어 있었다. 꽉 찬 마음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연서의 사랑은 끝나버렸다.
태헌이 잡은 손목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이대로라면 연서를 망가뜨려서 가지고 싶어질 거다. 그래서 힘주어 당기지 못했다. 이 이상 연서를 다치게 할 순 없었다.
사라지는 발소리가 아팠다. 뜨겁게 헐떡이는 태헌의 심장에 자국을 남기며 멀어졌다.
혼자가 된 태헌은 깊은 수렁에서 허기진 숨을 쉬었다. 그녀가 달아날 시간을 주어야 했다.
*
임신 중기로 들어서자 연서는 앉아 쉬기만 하는 생활이 슬슬 지루해졌다. 가만히 있으면 괜한 생각만 나곤 했다.
연서는 차라리 일해볼까 싶어 파트 타임을 생각하고 동네에 의원에서 면접을 보았다. 출산 휴가를 떠난 직원을 대신하는 자리라서 연서가 근무하기에 알맞았다. 연락하겠단 원장의 대답을 듣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태헌의 레지던스에서 돌아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마음이 다 잡히긴커녕 싱숭생숭해졌다.
「사랑해.」
그날의 습도, 온도. 태헌의 젖은 뺨, 목소리가 여태껏 선명했다.
「사랑해, 연서야.」
여러 번 되새겼더니 오래된 테이프처럼 그 목소리가 천천히 재생되는 착각마저 들었다.
사랑한다니. 그 무도한 우태헌이, 사랑을 한대.
똑똑한 사람이니 착각은 아닐 거다. 그러나 연서는 착각이라고 치부했다.
이 순간 진실이어도 시간이 흐르면 착각이 되는 마음, 그런 게 사랑이니까.
많은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 사랑을 잊는다. 연서도, 태헌도 곧 그렇게 될 거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미련의 덩이를 품고 사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현호와 해외를 떠돌며 마음을 정돈했다.
예전에는 연서 혼자였지만, 이젠 아이와 둘이었다. 혹시 태헌이 질린다면 그땐 연서뿐만 아니라 아이도 함께 내칠 터다.
혹은 연서만 그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고 아이만 데려가려고 하겠지. 아이와 생이별하게 되는 최악의 수는 끔찍하기만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슬렀을 무렵 태헌과 재회했고 강 여사의 죽음으로 다시금 얽혔다.
레지던스를 빠져나오던 그 날. 태헌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서가 옷을 갈아입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잡을 줄 알았는데, 힘으로라도 가둬놓을 줄 알았는데 태헌은 그러지 않았다. 그 덕에 태헌의 마지막 모습은 우뚝 선 남자의 뒷모습으로 각인되었다.
왜 당신이 버림받은 것처럼, 충격받은 것처럼 아픈 모습을 보이는 건데.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핸드폰으로 눈이 갔다. 그리고 저녁 7시가 되면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나 태헌의 그림자는 이제 없었다.
보도로 천천히 걷는 연서의 곁으로 세단 한 대가 느리게 굴러가고 있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뒤에야 차의 존재를 깨달았다.
연서가 세단을 바라보자 바퀴가 멈추었다. 조수석 창이 내려갔다. 연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날카로운 분위기의 남자. 눈을 감고도 얼굴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수없이 생각했던 우태헌.
“타.”
“아직 할 얘기가 남았나요?”
“마지막이야.”
태헌이 먼저 운전석에 올랐다. 미동 없는 세단을 노려보다가 연서가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