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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6화 (66/85)
  • 66화

    그녀의 촘촘한 속눈썹에 짓눌린 물방울이 물줄기가 되어 흘렀다. 태헌이 다시금 젖은 뺨을 문질러 닦았다.

    “아들이에요……?”

    “사진 챙겨 뒀으니까 나중에 봐.”

    따로 원하는 성별이 있는 건 아니었다. 튼튼한 아들이었으면 지나가듯 생각한 게 다였다.

    태헌을 닮은 아들일까. 태헌을 빼닮은 얼굴로 아장아장 걸어 다닐 아이를 그려보자 속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가만히 있던 연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태명.”

    “태명?”

    “태명은 아빠가 지어주는 게 좋대요.”

    연서가 시트를 움켜쥐고 말하자 태헌이 고개를 느긋하게 기울였다.

    “지금 지어달라는 거야?”

    “싫어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태헌의 목울대가 느리게 왕복 운동을 했다. 그가 고개를 모로 돌린 뒤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헌은 정지된 시간에 갇힌 것처럼 멈추어 있었다.

    “이사님.”

    연서가 조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움직, 이지 마.”

    태헌의 커다란 손바닥 아래로 투명한 것이 흐르고 있단 걸 발견한 연서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사님.”

    “꼴사납게.”

    태헌은 눈물 따위 흘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이 당혹스러웠다.

    왜 우는 걸까. 왜?

    아, 그렇구나. 그도 선생님이 그리운 거구나.

    담담하게 장례를 치렀으나 상실감으로 속이 곯았을 터다. 조용해진 지금 잠가두었던 빗장이 풀리고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들었을 거다. 연서가 위로하듯 말을 꺼냈다.

    “선생님 좋은 곳에 가셨을 거예요. 이사님 잘 지켜주실 거예요.”

    벌떡 일어난 태헌이 티슈를 뽑아 얼굴을 아무렇게 닦아 내곤 연서 곁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나갈 줄 알았는데, 차분하게 연서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아이 태명은 생각해볼게.”

    “네. 하나 정돈 이사님이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하나 정도.”

    “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생각해주세요.”

    창끝 같은 시선이었다. 연서를 관통할 것처럼 어느새 태헌의 눈빛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내가 이 얼굴을 보고 싶었다고 했었지.”

    “…몸을 섞었던 사이인데 조금은 그럴 수 있겠죠.”

    “조금?”

    위험한 남자에게 넘어 가버렸던 과거처럼 또 그렇게 될까 봐, 약해진 틈에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될까 봐 연서는 시선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태헌이 턱을 가볍게 잡아 눈을 맞추었다.

    “눈 피하지 마.”

    “놔 줘요.”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면 어떨까. 널 붙잡을 수 있나.”

    “다시?”

    연서의 말끝이 고양되었다.

    태헌이 곧장 해명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연서가 고개를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나자 그때야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 처음부터 다시 해보고 싶어.”

    연서가 시큰한 숨을 토해냈다. 눈시울이 빠르게 뜨거워졌다. 돌아오란 말을 들었을 때보다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전보다 나을 거야. 약속할 수 있고.”

    다시라는 단어는 연서가 꽁꽁 감추어두었던 미련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진흙탕에 빠진 것 같던 그때로 돌아가는 일.

    실낱같은 행복을 찾으며 사랑을 구걸하던 그 전으로 돌아갈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무한히 상처 받기엔 연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고, 이젠 지켜야 할 아이도 있었다.

    “이제 이사님 도움 필요 없어요. 빚도 없는데 우리가 주고받을 게 더 남아 있을까요?”

    “백현호에게 갚을 빚이 생겼을 건데.”

    “그래서요? 그 돈을 다시 이사님이 주겠단 거예요? 도돌이표처럼?”

    돌연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이제 곧 모진 말을 하겠지.

    아픈 말로 사람 후벼 파는 거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니까 언제나처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말을 할 줄 알았다.

    “네가 필요해.”

    그러나 태헌은 연서의 예상을 깨부쉈다.

    “네가 가장 중요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너만, 있으면 돼.”

    거짓말.

    “널 좋아해.”

    삐.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그의 고백이 불필요한 소음처럼 고막을 뒤흔들었다. 반갑지 않았다. 뒤늦은 고백 같은 건 원한 적 없었다.

    “저는 싫어요.”

    “…얼마나.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싫어졌어?”

    산부인과 앞에서 분명 연서는 뜻을 전했다. 태헌도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내고 물러섰다.

    그러나 또 이렇게 매달리듯 구는 태헌을 보자 마음이 복잡했다.

    “스폰이니 빚이니 그딴 얘길 하자는 게 아니야.”

    “그게 없으면 우리 사이에 뭐가 있는데요?”

    “내가 널 좋아해. 버거울 만큼.”

    그의 고백은 검게 물든 숲이 스산하게 우는 것처럼 동요를 불러왔다.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왜 이제 와서. 나는 이미 겁쟁이가 되었는데.

    가진 용기를 모두 써버려서, 당신의 곁이 두렵기만 한데.

    “저는 이제 아니에요.”

    “…노력해도 안 되겠어?”

    “무슨 노력을 할 거예요? 대체?”

    연서가 턱이 아리도록 입술에 힘을 주었다. 또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그를 쏘아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알려줘. 내가 어떻게 해야 전처럼 봐줄 건지.”

    태헌이 애절하게 속삭였다.

    좋아한다니. 노력하겠다느니.

    태헌은, 태헌은 정말 나쁜 자식이었다.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인제 와서 이러면 좋아할 줄 알았어요? 내가 우스워요?”

    “우스웠으면, 이렇게 미친 새끼처럼 너한테 목매진 않았겠지.”

    어둑한 지하에 갇힌 불온한 죄인처럼 그가 나쁘게 웃었다.

    회한과 후회,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악을 품은 사람처럼 태헌은 위험하고 고독했다.

    “오피스텔 사정 봤으니 알 거야. 네가 없는 사이에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연서의 가슴이 가삐 들썩였다. 아픈 숨이 자꾸만 갈빗대를 두드렸다. 위태로운 태헌이 미웠다. 마음 쓰게 하는 것조차 원망스럽다.

    “이사님과 있으면 이제 행복하지 않아요. 그리고 태어날 아이에게 그런 기분 느끼게 하고 싶지 않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알려줘.”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의 흉곽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이사님 지금 가진 감정, 잠깐이에요.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 착각일 수도 있겠죠.”

    “착각?”

    “저는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연서는 일부러 모진 길을 택했다. 그렇지 않으면 태헌에게 휘말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테니.

    태헌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모른 척 그의 손을 잡고 싶기도 했으나 고민에 그쳐야만 했다.

    “이사님 같은 사람이 자고 싶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안 설레겠어요. 상황에 취했던 거예요. 돈도 주겠다는데 거부할 수 있었겠어요?”

    연서가 흐리게 웃었다. 전처럼 가슴 뛰는 설렘 같은 건 이제 없었다.

    그렇게 부단히도 그를 밀어냈다.

    “이미 늦으셨어요.”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듯 태헌이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연서는 피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우린 끝난 거예요.”

    침묵하던 태헌이 움직인 건 한참 뒤였다. 그는 연서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녀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알았으니 식사해. 밥은 먹어야지.”

    지금 밥이 넘어가겠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말았다. 해묵은 감정의 골 사이로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태헌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런 태헌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는 스스로도 이상했다.

    사랑이 처음이었듯, 이별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사랑의 끝이 어떤 건지 연서는 잘 알지 못했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

    밥만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에 사르르 통증이 있어 한숨 더 잤다.

    잠깐 쉬려던 생각이었는데 아침까지 자버렸다. 연서는 아무도 없는 레지던스에서 길잃은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잘 차려진 식탁을 발견했다.

    어제처럼 진수성찬이었다. 식탁 한쪽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식사 거르지 말고 먹어. 아무 때나 연락해도 좋고. 금방 올 거야.]

    연서는 메모를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발을 옮겼다.

    *

    장례 일정을 소화하느라 태헌의 업무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그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일어 출근해야 했다.

    연서를 두고 회사로 나오는 발이 가벼울 리가 있을까. 태헌은 실무진을 물어뜯다시피 닦달하고 대기한 차에 올랐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레지던스에 도착했을 땐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연서는 아직 레지던스에 있다. 입주민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면 보고가 있었을 터였다. 물론 연서는 이런 감시를 원하지 않겠지만, 이미 여러 번 그녀를 놓쳐본 적 있는 태헌은 이런 쪽에서 아직 의연해지지 못했다.

    적어도 연서가 집을 나서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그러나 집에 그녀가 없었다.

    “한연서.”

    연서를 찾는 태헌의 발이 빨라졌다. 방과 거실, 테라스, 욕실까지. 모두 뒤져보았으나 연서의 그림자는 보이질 않았다.

    전화를 걸며 다시금 꼼꼼히 집을 살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이런 때 쓸데없는 집이 거추장스러웠다. 태헌이 차가워진 손으로 통화 목록을 뒤졌다.

    “한연서, 밖으로 나갔습니까.”

    -아니요. 나오신 건 못 봤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현영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연서의 출입만 확인하라고 지시해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집으로 간 건가.

    사람을 보내 연서의 집을 살피는 게 빠르겠지만, 낯선 사람이 집주변을 어슬렁거린다면 연서는 그 집을 떠날 거다. 그래서 함부로 거리를 좁혀 감시할 수가 없었다.

    전에 그랬듯이 멀리 떠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핸드폰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레지던스에 없는 것 같은데, 됐습니다. 내가 찾죠.”

    태헌이 전화를 끊었다. 넥타이를 풀어 던져두고 집 밖으로 향했다. 직접 운전대를 잡고 연서의 집으로 향했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연서가 이런 위험한 동네에 정을 붙이고 사는 게, 이런 곳이 제 곁보다 더 안식인 것이 미치게 괴로웠다.

    쾅쾅쾅.

    “한연서, 한연서!”

    대문을 두드리다가 담을 훌쩍 뛰어넘어 아담한 마당으로 침입했다.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성큼성큼 주변을 거닐었다.

    연서가 떠나버렸을까 봐 머릿속이 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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