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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5화 (65/85)

65화

연서는 오피스텔 현관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문득 지쳐서 생각을 바꾼 거다.

레지던스까지 허락한 태헌이 새삼 오피스텔 방문을 거부할 리는 없을 터다. 그런데도 막상 비밀번호를 누르고 나자 손잡이를 당기기 어려웠다.

염치없고 뭐랄까…. 아직도 그의 그늘 아래 있는 것 같았다. 태헌과 깍지 끼었던 손이 여태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현영에 곁에서 말을 얹었다. 그래, 지금은 아이만 생각하자.

먹고 자자. 그러면 발인도 참여할 수 있을 거다.

태헌의 가족을 볼 낯은 없지만, 강 여사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었다.

조금 뻔뻔해도 돼.

“식사 여기 받으세요. 전부 드시란 말씀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말씀인지는 묻지 않아도 안다. 연서는 현영에 내민 하얀 봉투를 받아들었다.

“전복죽이랑 삼계죽입니다. 전에 잘 드신 기억이 있어서…… 괜찮으십니까?”

“네. 잘 먹을게요.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김 비서님 이만 쉬세요.”

연서가 빨리 들어가야 현영도 쉴 수 있을 터였다. 인사를 마친 연서는 오랜만에 오피스텔에 발을 들였다.

현관 등이 노을처럼 붉게 켜졌다. 어딘가 삭막해진 것 같은 복도를 지나던 연서가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게, 다…. 뭐야?”

도둑인가? 언뜻 보이는 광경에 놀란 연서는 긴장한 채 봉투를 꼭 쥐었다. 혹시 몰라 귀를 기울였으나 다행히 타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굴리며 조심히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커튼에 가려 어둡던 거실이 밝아졌다.

“어떻게…….”

깨진 물건이 이곳저곳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바닥엔 핏자국까지 있었다.

설마. 도둑이 들어서 태헌과 몸싸움을 한 건가?

그래서 그런 상처가 난 걸까?

연서는 태헌의 손등과 목에 남은 상흔을 떠올리곤 숨을 시큰하게 내쉬었다. 곧장 현영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이내 도둑이 아닌 것 같단 판단을 내렸다.

도둑이라면 물건을 훔쳐야지. 물건을 이렇게나 깨부술 이유는 없었다. 또한 이 오피스텔은 얼굴이 등록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며 주방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유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실로 향했다. 그나마 이곳은 멀쩡했다.

연서는 옷가지가 쌓인 침대 위로 다가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침대 위에 흩어진 건, 연서가 한 번씩 입었던 옷이었다.

침대 위에 쌓인 옷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차분하게 머리를 굴려 보던 연서가 천천히 가슴께를 움켜쥐며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우태헌, 당신이 그런 거야?

어째서.

어디선가 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둔해진 손끝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발신인은 태헌이었다. 연서는 따끔한 눈을 깜빡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피스텔로 갈 줄은 몰랐는데.

“…도둑이 들었나 봐요.”

-나와. 거기서 못 쉬니까.

태헌의 한숨이 깊고 짚었다. 부쩍 음산해진 이 오피스텔처럼 그에게서 암울한 그늘이 느껴졌다.

“왜 이런 거예요? 이사님이 그러신 거예요?”

-보고 싶어서.

누군가 심장을 주먹으로 내리친 것처럼 강한 둔통이 가슴을 울렸다. 가슴 안쪽의 가느다란 실이 조여들었다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유 모를 통증이 그녀를 아프게 애태우고 있었다.

아니겠지. 태헌이 보고 싶어 했던 대상이 자신이 아닐 거라, 짧은 순간 연서는 그렇게 정리했다.

하지만.

-한연서 보고 싶어서 미친놈이 된 거지. 그러니까 거기서 나와.

“정말 이사님이……. 왜?”

-이보다 더 형편없어지고 싶지 않은데.

연서가 소리 없이 흐르고 있던 눈물을 닦았다.

그게 뭐야. 대체 무슨 뜻이기에 사무치게 그리워했단 뜻처럼 들리게 해.

온 집 안을 뒤집어 놓을 만큼 길길이 날뛴 것처럼 말하는 태헌이 낯설었다.

어째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출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보고 싶단 감정이 그에게 깃들었단 사실조차 못내 의심스러웠다. 한편 묘한 고양감이 몰려왔다.

그 우태헌이 자제하지 못하고 물건을 부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태헌이 조금만 더 아파하길 바랐다.

비록 태헌에겐 잠깐 겪는 혼란이겠지만 연서가 아팠던 반의반이라도. 아니 백 분의 일이라도 그가 아팠으면 했다.

조금은 복수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김현영 비서 보낼 테니 나와.

“저 피곤해요. 침실은 깨끗하니까…… 대충 치우고 쉴게요.”

-부탁이야. 진짜 미치게 하려고 그래?

태헌의 조급증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진짜 미치지도 않을 거면서. 끊을게요.”

연서는 전화를 끊고 메마른 입술을 잘근댔다. 흐트러진 옷을 한쪽으로 치우고 침대에 몸을 묻자 태헌의 향이 느껴졌다.

묵직하고 시원한, 현관 번호처럼 잊히지 않은 그리운 향이었다.

*

강 여사의 발인이 끝났다. 갈대밭을 뒤흔드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어지러워. 연서는 화장실 세면대에 손을 씻으며 잠시 숨을 토해냈다. 비통한 마음에 잘 먹고 자지 못해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비틀비틀 화장실을 나오다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몸을 기댔다. 눈물을 참는 게 고역이었다. 강 여사의 마지막 모습을 의연하게 배웅하고 싶어 모든 기력을 다해 담담하게 곁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오늘 연서의 옆엔 태헌이 함께였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세원가의 사람들은 연서를 흘긋 볼 뿐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헌의 가족도 마주쳤으나 그들 또한 연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할 뿐 강 여사를 보내기 위한 준비에만 몰두했다.

태헌의 무표정에선 그 어떤 기류도 읽을 수 없었다. 보고 싶었다고 말했던 남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차가움만 느껴졌다.

“하…….”

연서가 벽에서 등을 떼는 순간 또다시 휘청거렸다. 서둘러 벽을 짚자 화장실 쪽으로 다가오던 인영 둘의 걸음이 빨라졌다.

“괜찮아요?”

선예의 목소리였다. 흐릿한 시야에 선예와 태선이 함께였다.

올 것이 왔구나. 왜 태헌과 함께 있는지 궁금했던 거겠지. 감히 발인까지 참여한 것 또한 추궁당할지 몰랐다.

이제 돌아갈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연서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세상에, 연서 씨!”

“연서 씨?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선예와 태선이 동시에 묻자 머릿속이 울려댔다.

“식은땀 좀 봐. 태선아, 박 교수 불러야겠다. 연락처 있지?”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만 이대로 있으면 돼요. 죄송합니다.”

연서가 파리해진 입술로 불편한 호의를 밀어내려 하자 선예가 팔을 내밀었다.

“죄송하단 말을 할 상황은 아니잖아요? 연서 씨,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부터 옮겨요. 우리가 부축할게요.”

“그래요. 연서 씨. 내 팔 잡아봐요.”

태선과 선예가 동시에 몸을 숙여 연서를 이끌었다. 연서는 미안하고 거북한 마음에 거절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천천히 일어나요.”

두 사람은 그렇게 연서를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다들 여기서 뭐 해?”

송현의 목소리에 두통을 느끼며 연서가 다시 풀썩 쓰러졌다.

“연서 씨!”

두 여자가 다급히 붙들었으나 연서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저 복도 끝에서 연서를 발견한 태헌이 매섭게 다가왔다.

“비켜요.”

선예와 태선을 물린 그가 힘없이 늘어진 연서를 안아 들었다.

“태헌아, 바로 병원으로 올라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는, 정나미 없는 대꾸를 남긴 태헌이 바삐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간 연서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처음부터 따라왔어야 했다. 홑몸이 아닌 연서가 장례 일정에 참여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강 여사를 배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진즉 쓰러지지 않은 게 기적이지.

태헌은 가볍기만 한 무게감에 한숨 지으며 대기한 차에 올랐다.

“병원으로 가죠.”

연서의 작은 몸을 가득 당겨 안았다.

“최대한 빨리.”

*

연서는 넓은 침대에서 잠이 깼다. 여기가 어디지. 연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블랙과 그레이톤의 어두운 침실. 넓고 세련된 느낌의 방은 어떤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태헌의 집이구나. 연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다 말고 멈칫했다.

커다란 티셔츠 한 장 차림이었다. 허벅지 중간까지 덮는 길이었지만 연서가 직접 갈아입은 적이 없으니 태헌의 손을 거쳤단 뜻이었다.

이제 와 부끄럽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이미 끝난 남자에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단 게 껄끄러웠다.

껄끄럽다니. 태헌의 도움을 받아 선생님과 인사할 수 있던 건 괜찮은 거고?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오류에 연서가 입술 끝에 꾹 힘주었다.

태헌에게 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보다 더 무너졌을 터다. 강 여사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겠지.

담담하게 발인을 지키던 태헌 덕에 연서가 힘을 얻은 건 분명했다.

“벌써 보고 싶다.”

할머니. 연서는 슥슥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다가 결국 터져버린 슬픔을 참지 못하고 훌쩍였다. 눈물을 훔치느라 태헌이 가까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몸은 좀 어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연서가 딸꾹질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헌이 눈매를 좁히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울면 힘 빠져.”

태헌이 손을 뻗어 엄지로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쓰러졌어. 기억나?”

연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들러서 수액 맞고 이리로 왔어. 과로에 빈혈이라던데. 수면 부족으로 잠든 거고.”

“아이는……. 괜찮은 거죠?”

연서가 아직은 태가 안 나는 아랫배를 감싸며 물었다.

“무사해.”

연서가 안도했다. 기억이 없는 동안 동의 없이 이런저런 검사를 했겠지만, 아이가 무사하다면 그거로 됐다.

“아들이라던데.”

연서가 눈을 깜빡였다.

“날 닮으면 곤란한데. 그래도 예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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