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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4화 (64/85)

64화

강 여사가 힘없이 눈가를 접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녀는 얼른 그 손을 잡았다.

마지막이나마 인사를 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란 단어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선생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따뜻한 눈빛이 연서를 감쌌다.

잠시 뒤 연서는 흐트러진 강 여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언제나 깔끔한 모습을 고수하는 강 여사가 사실은 자존심이 강하단 걸 안다. 이곳에 누워 자식과 손주에게 약한 모습을 내보이는 게 그녀로선 힘들 터다.

“이제 더 예뻐지셨어요. 고와요.”

말하는 건 어려운 건지, 강 여사는 쉽사리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연서는 그동안 불러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던 방식으로 강 여사를 불러보았다.

“…할머니.”

“그래. 내… 아가.”

한 글자 한 글자, 강 여사가 느리게 답해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지 말아야 해. 울면서 이 귀한 시간을 흘려보낼 순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된 날,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 강 여사였단 걸 기억해냈다.

“저… 아이가 생겼어요.”

“태… 헌… 인 게, 야?”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연서가 눈물 가득한 눈동자로 물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태헌이 저 무뚝뚝한 녀석이 예쁘다고…. 그렇게….”

“죄송해요.”

“앞으론 너만 생각해……. 아이, 도 좋… 지만… 너를 제일로 위해라. 알겠누?”

연서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사랑해요.”

작아진 몸을 끌어안았다. 강 여사에게 받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겠노라, 다짐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래, 이건 마지막이었다.

“밥…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편안하시라고 울지 않았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나중에 만나요.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게 있는데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평생 죄책감 느끼며 살게요. 그러니 마음 가볍게 가시라고 연서는 홀가분해지는 대신 죄를 함묵하기로 했다.

“…또 봬요.”

연서는 말라붙은 뺨에 입술을 맞추고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다음엔 태헌이 강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커다란 등을 보며 지금 태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도 아픔이란 걸 알까. 알 터다.

병원 복도로 나갔을 때, 연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연서야.”

주저앉은 연서를 안아 든 태헌이 차로 향했다. 태헌을 물리칠 여력도 없이 슬픔에 잠겨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의 품인데, 혼자가 아니란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그날 새벽, 강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출장에서 돌아온 이혁이 그녀와 인사를 마치자 편하게 떠났다고 했다.

삐-

듣지 못한 기계음이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한 기업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던 강 여사의 장례식은 우 회장 때와 같이 커다란 규모로 진행됐다.

연일 뉴스에 보도되었고 조문 행렬이 끊임없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연서가 이틀이나 장례식장 한구석에 머물러도 내쫓는 이가 없었다.

연서는 줄줄이 다녀가는 조문객들과 영정 사진에 담긴 강 여사를 지켜보았다.

슬퍼 우는 사람도 있었고 애통한 표정으로 슬픔을 억누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무적인 태도로 분향을 하고 절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강 여사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우 상무도 뻔뻔하게 상주 자리를 차지하고 침통한 면상으로 조문객을 맞이했다. 강 여사는 아마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았을 거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받는 분이, 세원의 기둥 중 하나이신 분이 우 상무와 그녀의 잘못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죄송하단 말로는 부족해서 그래서….

연서는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오늘이 장례 이틀째였다. 아직도 몰려드는 조문객은 그 끝이 없어 보였다. 문식이 죽었을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컸다. 죽음은 고인이 살아온 삶과 닮아 있었다.

연서는 천천히 걷다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벤치에 앉았다. 강 여사와의 추억을 더듬다 보니, 수년 전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간호사로 근무 중이던 연서는 퇴근 후 동료 간호사에 전해줄 게 있어서 VIP 병동을 찾았다.

「이 선생님, 이거 두고 가셨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고마워요, 한 선생님.」

식당에 두고 간 핸드폰을 돌려주고 이 선생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일반 병동과 다르게 조용한 편이라 여유 시간이 있던 터다.

이야기를 마친 연서는 귀가할 생각으로 비상계단을 찾았다. 운동 겸 걸어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비상구 문을 연 순간, 아슬아슬한 장면을 목격했다. 휠체어를 탄 환자가 계단 끝에 멈춰 있던 거다.

「환자분 여기 계시면 위험……. 환자분!」

돌연 계단 끝에서 덜컹, 휠체어 바퀴가 주저앉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연서는 온몸을 날리다시피 뛰어 재빠르게 앞으로 쏟아지는 환자를 받았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휠체어는 두 사람을 뛰어넘어 계단 저 아래로 추락했다. 우당탕,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 환자까지 계단을 구르는 참사는 막았기에 연서가 한숨 돌리며 품으로 받은 환자를 살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아이고, 아이고…… 간호사 선생님은 괜찮누?」

연세가 있으신 환자라 연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얼른 몸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우선 몸을 돌려 환자를 업었다. 찢어진 수액까지 챙겨서 왔던 곳으로 뛰어가자 이 선생이 알아보곤 기함했다.

「세상에!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게 강 여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일로 연서가 조금 다쳤다. 계단에 찍힌 양쪽 무릎 중 한쪽 무릎 세 바늘을 꿰맸다. 오른 손목은 금이 가 반깁스를 해야 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강 여사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으면 큰 화를 면치 못했을 터다.

연서의 상태를 걱정한 강 여사를 다시 찾아갔을 때였다.

「미안해요. 내 손주가 온다고 해서 어디쯤 왔나 보려다가 폐를 끼친 게야. 정말 미안해서 어쩌누.」

「괜찮습니다. 환자분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 일로 연서는 병가를 받았다. 아무리 환자를 돕다가 다쳤다고 해도 일손이 부족한 대형 병원이라 혼쭐이 날 줄 알았는데 웬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연서는 VIP 병동으로 출근하란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강 여사의 전담이 되었다.

「이게 우리 태헌이 사진인데, 손주 중에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아이야.」

연서가 흘긋, 강 여사가 내민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예쁘셨으면 마중까지 나갔을까 싶어 본 화면에는 아이 대신 다 큰 남자가 있었다.

멀리서 찍은 사진이나 한눈에도 그가 미남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채가시는 건 어쩌누?」

「네?」

「우리 태헌이 말이야.」

「제, 제가요?」

「태헌이 아직 짝이 없는데 선생님이랑 잘 어울리지 않겠어? 한 선생님처럼 착하고 선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세상이야.」

연서는 그리 착하고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 여사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긴 했다. 몸 둘 바를 모르며 연서가 난감하게 웃었다.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닌걸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자꾸 말 높이시면 저도 선생님이라고 할 거예요.」

강 여사가 사람 좋게 웃었다. 연서가 정말 강 여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른 뒤에야 연서야, 아가.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야간 근무하던 연서에게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짙은 색의 슈트를 입은,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연서는 어렵지 않게 그가 강 여사가 자랑하던 손주란 걸 알아차렸다.

우태헌.

「인사가 늦었습니다. 우태헌입니다. 사례는 마다했다고 하던데.」

「안녕하세요.」

「받아둬요. 그래야 할머님 심기가 편할 겁니다.」

그가 내민 건 하얀 봉투였다.

「네?」

연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강제로 봉투를 맡기다시피 하고 돌아섰다.

설마 돈?

봉투엔 정갈한 글씨체로 우태헌, 이란 이름 석 자가 새겨 있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쌀쌀한데 춥지 않아?”

연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절로 흐른 눈물을 닦아 내고 고개를 들자 그곳에 태헌이 있었다. 무늬 없는 새카만 상복이 애석하기만 했다.

“이러다 쓰러지면, 할머님이 좋아할까.”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돌아가려던 차였다.

“발인까지 시간 있으니 좀 쉬어.”

“저도 가도 되는 거예요?”

직계가족만 참여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그래. 여기서 내 집이 가까워. 그리로 가 있으면 연락할게.”

“이사님 집…이요?”

그 레지던스? TV에서 보던 높은 타워를 생각하다가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갈래요, 그게 편해요.”

태헌이 팔을 잡아 연서를 일으켜 세웠다. 마주 보고선 그가 손가락을 내려 연서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웠다. 하나 연서가 고개를 틀어 그 손길을 피했다.

“함부로 만지지 마요.”

“미안해.”

미안하다니. 강 여사가 떠난 슬픔에 태헌도 약해진 건가.

하지만 조문객을 맞이하는 태헌은 태산 같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슬픔도 찾아볼 수 없는 자세로 허리를 세우고선 세원 그룹이 견고하단 증명을 몸소 했다.

그래서 태헌이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제 슬픔에 취해 그의 속사정까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에야 태헌에게 드리운 짙은 상실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눈썹을 약간 찡그린 태헌이 연서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식사 보낼 테니까 거르지 말고.”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그만 돌게 하고 말 좀 들어. 너 지금 한 끼도 안 먹은 건 알아?”

“먹었….”

“고작 두 숟가락이 식사야? 아이 지킨다며. 그럼 기를 쓰고 먹어야지.”

아이. 그래 아이를 위해서라면 빠르게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게 어렵다면 식사라도 잘해야 했다.

태헌이라면 현영의 차를 타고 돌아가라고 할 것 같아서 주변을 살폈다.

“김 비서님 오셨죠?”

“이쪽으로.”

태헌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손깍지를 끼었다.

연서는 저를 속박하는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반항하는 게 의미 없는 것 같아 가만두었다. 앞서가던 그의 걸음이 점차 속도에 맞춰 느려지는 건 착각이겠거니, 안일하게 넘겼다.

“가서 쉬어. 내일 차 보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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