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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63화 (63/85)
  • 63화

    연서는 세원의 그림자 안에서 꼭두각시처럼 살아갈 생각 따윈 없었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에게도 좋은 방향이 아닐 터다.

    아이에게 부유한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을 조금만 가져야지.

    “그리고 이제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태헌의 느긋한 물음에 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제가 키울 거예요. 그러고 싶어요. 저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하시다면 그렇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태헌에겐 아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을 터다. 아이의 존재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진 사람이니, 살다 보면 오늘의 충동을 후회할 날이 올 거다.

    “이게 제 대답이에요.”

    잠시 입을 닫았던 태헌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보고 싶다고 하시면 아이 사진은 가끔 보내드릴게요. 아이가 커서 아빠를 원한다면 그때 만나도록….”

    “그래, 이제 안 나타날게.”

    “…….”

    “나도 부탁 하나 하지. 아프지 마.”

    허리를 편 태헌이 차 문을 조심히 닫았다. 그러곤 차가 느리게 출발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서 있나 궁금했으나 연서는 차마 뒤쪽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이 때문에 온 게 아니었을까.

    태헌은 아이에 대한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서 쉽게 물러났다.

    혹여 나를 못 잊고 온 걸까.

    미안하다고, 그답지 않게 사과하던 모습이 진심이었던 건 아닐까.

    웃기는 소리였다. 하지만 웃음은커녕 눈물이 뜨겁게 고였다. 연서는 손등을 들어 현영이 보지 않게 얼른 지워냈다.

    우태헌은 언제나 폭풍 같았다.

    *

    점심 식사 전, 연서는 동네 공원에서 가볍게 산책했다. 가을바람이 제법 시원했고 높은 하늘이 청명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지금 날씨처럼 맑게 개는 듯했다.

    15주 5일. 입덧이 끝난 뒤라 몸 상태가 나아졌다. 삼시 세끼에 달콤한 후식까지 쉼 없이 먹어댔다.

    잘 먹히는 건 좋은데 이대로라면 살이 확 찔 게 뻔했다. 만만찮은 식비도 문제였다.

    짧게나마 태헌의 비서로 일한 대가가 고스란히 입금되어 통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그 돈을 사용해야 했다.

    몸도 가벼워졌는데 가까운 곳에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찾아볼까, 고민했다.

    짧은 산책이지만 잠시 쉬어갈 생각이었다. 아이를 위해 연서가 벤치에 몸을 기대었을 때 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접니다. 지금 통화 가능합니까?“

    “네. 무슨 일로…….”

    태헌과 관계된 사람인지라 자연히 긴장했다.

    -여사님 의식이 돌아오셨습니다.

    “네?”

    연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서 씨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지금 연서 씨 집으로 가고 있는데, 10분 후에 내려오시겠어요?

    “네. 네, 그럴게요.”

    전화를 끊고 바로 집 아래로 향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겨를이 없었다.

    현영이 모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중환자실에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강 여사가 깨어났단 소리에 달려온 가족 친지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비서진과 변호사, 강 여사의 변호사도 보였다. 유산 얘기가 오가는 복도는 시끌벅적했다.

    오늘이 마지막 인사가 될 거라고 했다. 강 여사와의 관계에 따라 면회 순서가 정해졌고 당연히 연서의 순서는 저 뒤쪽이었다.

    사실은 가끔 병원에 찾아왔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찾아와 조용히 중환자실을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태헌과 헤어진 마당에 그의 도움을 받을 순 없었기에 그렇게나마 강 여사를 보고 돌아간 것이다.

    누군가 얘기를 나누던 현영이 곤란한 얼굴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사님께서 오고 계시니까 그때 들어가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연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여럿이 뒤섞인 향수 냄새가 독했다. 입덧이 다시 돌아오는 듯해 창가에 기대어서 숨을 고를 때였다.

    “저기 그쪽 간병인, 맞죠?”

    연서가 벽에서 등을 떼며 다가온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는 승빈의 동생 윤빈이었다. 전에 승빈이 사진첩에서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유학 중인데 사고를 많이 쳐서 걱정이라고. 그러고 보니 승빈도 오려나.

    묻어두었던 기억이 악취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졸라 예쁘다더니 진짜네.”

    남자는 껄렁했다. 격식 있게 갖춰 입긴 했으나 태도와 눈빛이 가벼웠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연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더럭 그녀의 손목을 잡은 윤빈이 욕설을 내뱉었다.

    “간병인 주제에 어디 사람 말을 끊어.”

    “놔주세요.”

    “얼굴 반반한 거 믿고 까부는 거 재미있겠지. 근데 나한테 안 통하거든?”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걸까. 승빈은 그래도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윤빈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인간 말종. 사촌들에 비추면 태헌은 아주 약과가 아닐까.

    “내가 돈 줄게. 같이 놀자. 어? 할머니 곧 뒈질 것 같은데 그럼 어차피 실직이고. 차라리 나한테 취직할래?”

    “말이 심하시네요.”

    “아 원래 내가 싸가지가 없어서. 그건 이해하시고.”

    “선생님, 쾌차하실 거예요.”

    “선생? 누구? 아 우리 할멈? 다 늙어서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빨리 뒈져….”

    짝.

    연서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이란 걸 인지했으나 후회는 없었다. 독기 있게 눈을 치뜨며 말했다.

    “쓰레기.”

    “하, 이게 미쳤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연서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을 때였다.

    “뭐 하는 짓거리야.”

    낮고 단조로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헌의 것이었다.

    연서가 재빨리 눈을 뜨고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손목에 기분 나쁜 감촉이 화끈하게 남아 있었다.

    “형?”

    “뭐 하는 짓이냐고 묻잖아.”

    “아니, 형. 이년이 자꾸 사람을 빡치게 하잖아.”

    태헌이 눈동자를 움직여 두 사람을 건조하게 살폈다.

    “내 얼굴 보이지?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는데, 기가 막혀서.”

    윤빈이 다소 억울한 표정으로 태헌에게 변명하다가 연서를 때릴 것처럼 위협했다.

    “아오, 이게 진짜!”

    그러나 연서는 아까처럼 겁먹지 않았다. 전보다 살이 오르고 말끔해진 태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수척하다고 느꼈는데, 그땐 잠깐 피곤했던 거였나.

    연서는 그의 손등을 재빨리 살폈다. 이상했다. 멀끔해진 겉모습과 다르게 새 상처가 늘어나 있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지.”

    “뭐?”

    “지금은 말고, 나중에. 이제부턴 눈에 안 띄게 처박혀 있어.”

    “혀, 형?”

    “꺼져.”

    태헌이 고개를 까닥인 뒤 연서 쪽으로 한 발 다가왔다. 그가 연서의 어깨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구석에 내몰리듯 서 있던 연서는 고개를 내려 제 차림을 살폈다. 티셔츠에 반바지. 운동화. 어쩌면 지금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마음 아프라고 일부러 이러나?”

    “네?”

    “쌀쌀해. 입어.”

    태헌이 재킷을 벗어 연서의 어깨를 둘러주었다.

    “갈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얼굴빛이 안 좋아. 혹시 모르니까 잡아.”

    연서는 고민하다가 손을 잡았다. 이해타산적이라고 해도 강 여사를 만나려면 태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손을 조심히 잡자 태헌이 한숨을 느긋하게 쉬곤 연서의 허리를 끌어 앞에 세웠다. 그러곤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끝이 차디차서 연서가 눈가를 찡그렸다.

    “저 새끼가 어디 손댔는지, 나중에 말하고.”

    “형, 뭐야? 대체…. 이 여자랑 무슨 관계야?”

    윤빈이 영문을 모르겠단 낯으로 태헌을 붙들었다.

    “비켜. 죽이기 전에.”

    태헌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모하자 윤빈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태헌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서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제야 연서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다.

    씨발, 엿 됐다. 태헌이 형 건 건드리면 안 되는데.

    윤빈이 입을 틀어막고 닥쳐올 불행에 괴로워하는 사이, 태헌은 손에 쥔 작은 온기를 잃을까 초조해 미칠 것 같았다.

    그는 한 번 목숨을 버리고자 했다. 연서가 없는 세계가 힘이 들어 그녀의 세상으로 찾아갈 기대를 걸고 사라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연서의 옷을 목에 감고 한계까지 조르다가 혹시 이 일로 연서가 죄책감을 느낄까 봐 힘을 놓았다.

    누군가 너 때문에 죽었다, 말을 옮길까 봐.

    그럼 그 착한 한연서는 평생을 아파하며, 우태헌을 동정하며 살겠지.

    그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았으나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할 연서에겐 무거운 짐이 될 게 뻔했다.

    그리고 연서가 아이를 세원가에 빼앗길 경우를 생각해야 했다. 태헌이 사라진다면 태헌의 피를 받은 아이를 탐낼 게 분명했다. 최악의 수를 떠올리자 죽는 건 사치란 판단이 내려졌다.

    연서의 곁을 허락받지 못하더라도. 아이의 아빠 자리는 허락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거라도 연서와 닿을 수 있는 끈이 되지 않을까.

    작은 기대감은 그를 죽음의 기로에서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태헌은 지금, 기대 하나로 버텨내고 있었다.

    회사에 다시 출근했고, 몸 관리에 힘썼으며 식사도 제때 했다. 여전히 잠은 못 잤지만 자려고 발악은 했다.

    속은 시꺼멓게 썩어갈지언정, 껍데기만은 우태헌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렇게라도 연서를 만났을 때 아이 아빠의 자리를 주장하려면, 멀쩡한 놈으로 비쳐야 할 테니.

    그러니 이런 만남일지라도 태헌에겐 귀했다. 그간 밀린 업무로 병원에 늦게 도착하지만 않았어도 연서를 복도에 세워두는 일은 없었을 텐데.

    신 비서가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고, 오래지 않아 연서를 데리고 중환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앙상해진 강 여사가 연서를 알아보고 눈동자를 떨었다. 태헌이 연서의 등을 밀어주었다.

    “얘기 나눠.”

    연서가 고민 없이 강 여사의 베드로 달려갔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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